1158화 헬프 (1)
‘어떠려나.’
수간호사는 두근거려서 밤새 잠도 못 잔 상황이었다.
보아하니 수혁과 하윤…….
이 두 사람, 어제 학회 준비하다가 진짜로 단둘이서 밥 먹으러 가지 않았나?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고 또 오가는 대화를 들어 봐도 오직 나만이…….
‘나만이 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군그래.’
병원이라는 곳은 진짜 심심한 곳이다.
맨날 바쁘다고 하면서 심심할 겨를이 있냐고 한다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아무리 바빠도 사람은 재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거든.
근데 재미있을 수 있나?
환자 보는 걸 재밌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수혁과 이현종이 별종 취급을 받을 수 있었을까.
어느 정도의 재미는 느낄 수 있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재미를 추구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중 하나라고 평하기에도 미안할 만큼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가십이었다.
‘누구라도…… 쥐톨만큼이라도 알아차렸다면 반드시 떠들고 있었을 텐데.’
주변에 있는 간호사 중 누구 하나 입도 벙긋하고 있지 않았다.
레지던트들?
저놈들은…….
아무래도 간호사들보다 지금 당장은 더 힘든 상황이긴 했다.
당직 서고 다음 날 정규 근무 시간 다 채우고 나서 퇴근하는 걸 오프라고 부르는 이상하고 불쌍한 놈들이니까.
그래 봐야 소문에 대해 떠들 땐보다 피곤한 얼굴 떠든다는 차이만 보여 줄 뿐, 다를 게 없었다.
‘후후후.’
그놈들도 다 조용했다.
안대훈, 김성진도 그랬다.
충신이라는 말도 모자랄 만큼 수혁에 대해 헌신과 봉사를 다 하는 놈들이지 않나.
특히 김성진은 함께 보내온 세월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안대훈의 인정을 받게 된, 말 그대로 수혁교의 떠오르는 신성이었다.
‘술도 잘 마시더만…….’
수간호사는 절로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제대로 된 회식은 사실상 어제가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교수가 오는 회식에서 뭐 애들이 신나게 놀겠나?
여기 교수라고 하면 이현종, 이수혁인데?
하나는 일단 나이가 너무 많고, 직급도 너무 높았고, 다른 하나는 젊은 교수지만…… 술 한 잔에 바로 가 버리는 알콜 쓰레기였다.
그에 비해 안대훈, 김성진은 술고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말도 꽤 잘했다.
사이비 교주 포교라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을 벌써 몇 년간 성공적으로 해 온 사람이 말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만…….
‘분위기가 어째 좀…….’
꽤가 아니라 너무 잘했다.
해서 수혁과 하윤을 이어 주려 만든 번개 회식이었는데, 어쩌면 안대훈, 김성진이 이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놈들 외에 김인수, 장종우, 이태원 등도 꽤나 괜찮은 녀석들이다 보니 다른 테이블에서도 아마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좋은 아침! 억!”
어차피 잠도 안 오겠다 새벽같이 나와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현종이 왔다.
옆에 이기자가 있었는데, 이현종이 굿바이 키스를 날리다가 한 대 맞았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렇게 금슬이 좋을 수 있을까.
수간호사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 뒤로 출근한 것은 이수혁이었다.
하윤은…….
하윤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같이 오다가 여기서 잠시 찢어졌나? 그랬네, 그렇겠네!’
그래, 병원 바닥이 얼마나 좁은 곳인데 그걸 그렇게 곧이곧대로 오겠나.
‘아……. 다 잘하다가 한 가지를 놓쳤구나!’
심증만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는 없지 않나?
둘이 오는 걸 봤어야 했다.
그러려면 여기서 기다릴 게 아니라 로비나 아무튼, 좀 다른 데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고.
‘천려일실이구나……. 아!’
수간호사는 혼자 절규하고 있었다.
이현종은 꽤 오래 알아 온 사이이니만큼 뭔가 일이 안 풀리는 게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보다 재미난 일이 있어서 그랬다.
“수혁아, 어제 아주 그냥 외과 학회 조져 놨다며.”
“네? 조지진 않았는데. 김승규 교수님이 조졌죠.”
“아……. 그것도 들었어. 교수를 팼어?”
“때린 건 아니고, 여기를 이렇게.”
“그 손으로 잡았으면 팬 거지……. 죽었대?”
“모르겠네요? 외과 학회니까 뭐, 설마 죽었겠어요? 거기 중증외상센터 선생님들도 많잖아요. 트럭에 치여도 살리는데.”
“하하, 맞네.”
학회 하나를 박살 내지 않았나.
물론 수혁과 이현종 모르게 김승규가 한 번 더 부쉈는데, 그건 이제 차차 알게 될 터였다.
“어어, 그래? 그럼 당연히 우리 센터에 전화했어야지!”
그렇게 떠들고 있으려니 하윤이 들어왔다.
전화를 하면서였는데 뭔가 평소랑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고데기? 화장……?’
뭔가…… 뭔가 했다.
“이잉. 웬일이에요? 소개팅 가세요?”
“그러니까. 드디어 남친 생기는 거예요?”
“오…….”
수간호사만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미세한 변화는 아니었다.
간호사들부터 일단 난리가 났다.
맨날 쌩얼로 다니던 사람이 뭐라도 칠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수혁이 머리에 왁스를 바르거나 스프레이를…….
‘어?’
뿌렸잖아?
자세히 보니까 수혁도 뿌렸다.
그…….
그냥 머리 말리고 뿌려서 모양 자체는 똑같은데 안 감은 것처럼 굳은 형태를 띠고 있어서 눈치채기 쉽진 않았지만, 아무튼, 뭔가 꾸미려고 애를 썼다는 말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걸 눈치채 준 건 수간호사뿐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눈치챘을 수도 있을 텐데, 비주얼적으로 눈길이 가는 게 아무래도 하윤 쪽이다 보니 대화는 그쪽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떡진 머리 만든 놈과 화장이 업이었나 싶을 만큼 잘하고 온, 그러나 항상 쌩얼이었던 분 중 누구에게 가 볼래 하면 당연히 후자일 터였다.
“아, 아녜요. 그냥 한번 해 봤어요.”
“그냥 한번 해 본 게 이렇다고요? 거의 무슨 샵을 다녀오셨는데?”
“이 시간에 하는 샵이 있냐? 신부 화장도 이렇게 빨리는 안 해 줄걸……? 8시 결혼식이 있지 않은 이상.”
“네, 그냥 제가 유튜브 보고 했는데 어때요? 화장품도 그냥 거기서 사라는 거 사서 했어요.”
“와……. 금손……. 미쳤네.”
“유튜브를 보고 했어도……. 어떻게 이렇게 찰떡으로 했지? 말이 안 되는데.”
맨날 의학 얘기만 오가던 통합진료센터에서 드디어 일상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이현종이야 아무 생각이 없겠지만 수간호사로서는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세상 아니겠나.
미친놈들이 모여서 맨날 환자 얘기하고, 병 얘기하고, 학회 얘기하고…….
‘이 뒤에 사랑이 있다는 건 나밖에 모르겠지?’
수간호사는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참기로 했다.
다행인 것은 간호사 업무를, 그것도 병동에서 수십 년을 해 온 사람이다 보니 참을성이 보통 사람들의 몇 배가 된다는 점이었다.
무언가 참는 것은 이제 그녀에게 있어 그렇게 커다란 고통은 아니었다.
“아, 맞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윤은 그 후로도 대략 5분간 재잘거렸다.
사실 하윤도 생전 처음 하는 화장인 데다가, 화장을 한 자신의 모습이 마치 TV 속 연예인처럼 이쁘다는 사실에 들떠서 그랬다.
하지만, 하윤은 어쩔 수 없는 의사였다.
그것도 똥인 줄 알면서도 굳이 통합진료센터에 들어와 사서 고생하고 있는 의사.
“교수님. 이비인후과에서 연락 왔습니다.”
“이비인후과?”
“그 코 파고 귀 파는 과는 왜?”
해서 하윤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이현종, 수혁에게 달려갔다.
둘은 계속 외과 학회 얘기 중이었다.
아마 김승규가 들었다면 둘 다 찢어 죽였을 만한, 그런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이제 외과 놈들도 내과의 위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을 거라는 둥…….
사실 외과는 의대 정규 과목도 아니었다는 둥…….
칼이나 들고 설치는 게 사실 의사는 아니지 않냐는 둥…….
그런 와중에 외과 중에서도 마이너 과에 해당하는 이비인후과 얘기가 나오니 어쩌겠나.
내과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크다 못해 다른 과에 대해 무례해진 사나이, 이현종은 당연하다는 듯 이비인후과 의사들이 들으면 피를 토할 만한 말을 해 댔다.
“아, 그렇죠. 코 파고, 귀 파다가 수술도 하는데…….”
물론 하윤이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여기 들어온 지 벌써 한 달도 넘었는데 이런 일에 놀라서야 되겠나.
능숙하게 받아칠 수 있었다.
게다가…….
‘옆에 이수혁 교수님이 있으니까, 든든하네.’
어제 잠시 스턴을 주고받았지만, 저녁을 먹다 보니 확실히 차분해질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수혁이 진짜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그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이 수혁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나 곰곰이 생각을 해 봤더니 상당히 오래전이었던 것 같았다.
적어도 우연히 세 번 부딪쳤던 그날보다는 훨씬 오래되었다.
“케이스 하나가 너무 이상하다고 해서요.”
“이상해? 어떤 케이스지?”
“잠시만요. 제가 등록 번호를 받았습니다.”
“그래, 근데…… 이비인후과 케이스가 이게 뭐 어려울까?”
이현종은 여전히 개무시하는 언동을 해 가면서, 그렇지만 몸은 또 솔직해서 화면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채 기록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네. 이분 맞아요. 52세 여자분.”
“52세라……. 어리네?”
“그…… 이비인후과에서는 이 정도면 고령이라고 하더라고요.”
“아, 거기는 그렇지. 수술 때문에 입원해도 이틀, 삼일이면 그냥 집에 간다며.”
“아, 맞아요. 근데…… 이분은 그런 수술은 아닌 거 같아요.”
“뭔 수술인데?”
“귀 수술인데……. 사실 저도 이비인후과는 아니라…… 불렀거든요? 아, 저기 오네요.”
하윤은 공부를 아주 잘하고 또 열심히 하는 사람이지 않나?
외과만 해도 꽤 아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비인후과는…….
괜히 마이너 과가 아니었다.
일단 학생 때 배우는 지식이 굉장히 적었다.
수박 겉핥기도 그것보단 맛을 더 많이 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이너 과에 대해서는 대강 배우고 넘어간다고 보면 되었다.
해서 이런 과에 있어서는 해당과 전문의가 반드시 있어야 설명이 가능했다.
지금 오고 있는 놈은 전문의가 아니라 전공의긴 했지만, 아무튼.
“아, 안녕하십니까. 이비인후과 4년 차 장규선입니다.”
“어, 그래.”
“어서 설명 좀 해 줘 봐요, 무슨 환잔지.”
이현종은 떨떠름했고, 수혁은 눈을 빛냈다.
“어, 해 봐. 여기 앉아.”
“아, 네. 그…… 노티 드리겠습니다. 여자 56세 환자 어지럼증을 주소로 응급실로 내원했습니다. 당직의가 봤을 때 프렌젤 검사에서 우측과 좌측에서 모두…… 안진이 관찰되었습니다.”
“양측에서……? 그럼 이석증 같은 건 아닌 거 같은데.”
“네, 그래서 백당직에게 노티가 됐고 2년 차가 검진했을 때도 동일한 소견이 관찰되었습니다.”
“흐음.”
“눈알 튀는 게 그렇게 큰일인가?”
이현종이 부적절한 타이밍에 부적절한 말로 끼어들었지만, 괜찮았다.
아, 장규선은 당황했다.
익숙지 않으니까.
하지만 수혁은 이미 이현종의 말을 바루다를 이용해 완전히 필터링이 가능하게 된 사람이다 보니 그냥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양측 모두…… 안진의 양상은 어땠죠?”
“아……. 일단 응급실에서 시행했을 땐 양측 모두 외측 이석증처럼 나왔습니다.”
“응급실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요?”
“그, 제가 순서대로 좀. 저도 이게 너무 복잡해서요.”
“아아, 그래요. 더 해 봐요.”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