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2화 헬프 (5)
“아예 VNG를 보여 드릴까요?”
“좋죠.”
VNG, Video-NystagmoGraphy (VNG).
쉽게 말해 비디오로 안구진탕을 보여 준다는 건데, 비디오라고 하면 흔히 눈동자 튀는 걸 직접 보여 주나 싶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안구진탕을 시간에 따라 왼쪽, 오른쪽으로 튀는 것을 그래프로 나타내서 출력한 검사였다.
당연하게도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아닌 사람에게는 대체 이게 뭔가 싶을 만한 요상한 그림이었다.
허나 수혁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그냥 천재니까.
“흐음……. 이거 아직 고개를 돌리기 전에도 있네요. 자발 안진이 꽤 심한데…….”
“네. 우측을 바라보거나, 좌측 바라보거나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네요. 이건 두부 충동 검사 이후에 나타난 소견이죠?”
“아.”
“왜요?”
“아닙니다.”
이 VNG는 두부 충동 검사 시점이 나타나 있지 않은……. 아직 날것 그대로의 그래프였다.
헌데 그냥 보기만 하고 두부 충동 검사의 시점을 알아맞히다니…….
‘이과 펠로우들 눈 감아.’
장담컨대 지금 이비인후과 4년 차?
아니, 펠로우들도 당장 잡아내지는 못할 것이었다.
단순 어렵네 마네 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라 그랬다.
헌데…….
이 인간은 그냥 보자마자 알았다.
과연 이것이 신이 내린 재능이라는 뜻일까?
-아니, 우리 수혁이는 천재 따위가 아니란다.
목포고 출신 선배 조태진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조태진을 둘러싼 소문은 상당히 무성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컬트에 빠져 살았다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단지 그뿐이었다면 교수가 될 수 있었겠나?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화 의료원의 교수가 되었다는 건 순전히 그의 실력 때문이라고 봐야 했다.
-수혁이는 신의 사자야. 본인은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원래 선지자들은 그럴 수 있는 법이지.
그런 인간이 하는 소리는 아무리 이상해도 한 번쯤 귀를 기울이는 게 좋았다.
‘진짜……. 신의 사자인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있는 데다가 선배에게 들은 말도 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해야 할 일을 완전히 놓치진 않았다.
조영상도 어찌 되었건 간에 태화 의료원의 교수이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독종이 아니고서는 이 자리를 꿰차고 앉을 수 없는 법이었다.
“충동 검사에서 더 심해지는군요. 하지만……. 주시 안진에서 우측, 좌측 모두에서 방향 전환성 주시 유발 안진을 보이고 있어요. 이건 말초성 병변이 아닐 것이라는 걸 시사하는데…….”
“네. 이상합니다. 근데 일단 CT상에서는 출혈이나 전이 소견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 Brain CT를 찍었어요?”
“네. 그쪽에서도 환자가 암이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불안했나 봐요.”
“하긴……. 전이가 있을 수 있지.”
난소암.
여성암 중 하나로 유방암에 상대적으로 밀려 있지만…….
임상적인 중요도는 오히려 더하다 할 수 있었다.
예후가 그리 좋지 못해서 그랬다.
특히 전이가 흔했다.
뭐……. 유방암도 전이가 흔한 거로 치면 어디 가서 밀리진 않겠지만, 난소암은 완치 판정을 받았다가 재발을 다발성 전이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환자와 의사의 마음부터 꺾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튼, 전이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말초성 병변일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네, 그…….”
“보시면 수평 방향으로 두부 충동 검사를 했을 때, 양측으로 교정성 단속 운동이 관찰되지 않습니까?”
“아……. 네.”
수혁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조영상은 그저 놀라고만 있었다.
이건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아니라 이과 전문의……. 그중에서도 몇 년 구른 사람하고나 나눌 수 있는 대화이지 않나.
세상에 양측 교정성 단속 운동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라리 외계어라고 느낄 만한 단어라 할 수 있었다.
풀어서 설명하고자 해도 아마 전문 용어 동원해서 수 분간 떠들어야 할 터였다.
해서 협진 낼 때는 그냥 비정상입니다, 라고 퉁쳤더랬다.
“그에 반해 수평과 수직 신속 안구 운동(saccade)이나 원활 추종 안구 운동(smooth pursuit)은 정상이군요. 말초성 병변이라면……. 이 중에 어느 하나라도 맞는 게 없어요. 게다가 증상도 자세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되는 어지럼증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확실히……. 근데 감이 잡히질 않아서요.”
수혁은 조영상이 탄식하듯 내뱉은 말을 무시한 채, 뒤에 도열해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우선 하윤.
‘하나도 모르네.’
[알아듣겠습니까?]
안대훈?
‘얘까지?’
[이건 좀 그렇죠……. 너무 지엽적인 용어입니다.]
김성진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셋 다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집중해서 눈앞에 뜬 그래프를 바라보고는 있는데……. 그래 봐야 뭔 소용이 있겠나.
하나도 모르는 상황에서 보면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실제로 안대훈은 정수리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서 보기가 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뭐……. 천천히 설명하도록 하지. 아니……. 사실 그럴 필요도 없어.’
[네. 어지럼증에서 지엽적인 진단할 거 아니면……. 이거 너무 가성비가 안 남는 공부입니다.]
‘나니까 했다, 진짜. 아빠도 잘 모르지?’
[하나도 몰라요. 생각보다 이현종, 마이너 과 질환에는 딱히 관심이 없습니다. 뭐……. 이기자 교수가 어지럼증을 앓게 되면 또 모르겠는데…….]
‘그럼 이비인후과 전문의 딸 듯.’
[팔불출이니까요.]
제자들의 보기 드물게 쩔쩔매는 꼴을 보고 있자니 좀 그렇긴 한데…….
이걸로는 혼내거나 다그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했듯 가성비가 똥망인 공부라서 그랬다.
모르긴 해도 이비인후과 전문의 중에서도 나는 이석증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은 10% 내외일 터였다.
단순 외반고리나 후반고리에 그치지 않고 전반고리까지 고려하게 된다면, 어쩌면 더 떨어질 수도 있었다.
“환자는 어디 있죠?”
하여간, 수혁은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 동시에 걷고 있었다.
나머지도 다 따라온 상황이었다.
따지고 보면 통합진료센터 왕복을 한 셈인데…….
헛고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 이 센터에서 하는 일이 이렇지 않나.
좀 없어 보이게 표현하자면 장돌뱅이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어려운 환자 있으면 주워다 고치는 그런 게 센터였다.
“아, 저기요. 제가 불러 놨습니다.”
물론 환자는 아직 이비인후과로 전과 되진 않았다.
산부인과 입원이었고, 혈액종양내과와 이비인후과 협진 중인 환자였다.
아마 이비인후과 쪽 원인의 어지럼증인 게 확실해져도 전과는 안 할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기저질환이 너무 많은 환자는 마이너 서저리 과에서 보기가 좀 그래서 그랬다.
단지 의사들만 문제도 아니었다.
병동 간호사들도 이비인후과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이런 환자에게 필요한 조치가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잘하셨네요. 흐음…….”
그런 연고로 인해 환자는 침대째로 이송되어 온 채 병동 치료실에 대기 중이었다.
외래처럼 내시경이나 프렌젤 글래스와 같은 검사 장비가 다 구비되어 있고, 동시에 외래와는 달리 왔다 갔다 하는 환자들이 적다 보니 협진은 이렇게 보는 게 보통이었다.
“환자분, 안녕하세요.”
“어, 이수혁 교수님.”
다가가 인사를 하니, 보호자가 수혁을 알아보았다.
김다현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홍보가 차츰 결실을 이루고 있는 덕이었다.
길거리에서도 수혁을 보면서 어?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니 뭐 말 다 한 셈이었다.
“왜, 아는 분이야?”
“엄청 유명해. 완전 천재.”
“다행이구나.”
아들의 말에 환자도 조금 안심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물론 말이 미소지 아주 힘들어 보였다.
드문드문 보이는 안구진탕으로 미루어 보건대 여전히 어지럼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어느 정도 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 지경이라면…….
‘말초성 병변은 확실히 아니지.’
[그러나 중추성 병변 중에 출혈과 전이는 배제가 되었죠.]
‘그래, 출혈 조기이거나 해서 영상에서 보이지 않은 건 아니야.’
[그렇죠.]
‘그보다는……. 환자의 영양 결핍과 연관이 있어 보이네.’
[흐음……. 베팅입니까?]
‘약간 그렇지. MRI 찍으면, 내 생각은 이거 진단 바로 나온다. 네 생각은 어때.’
바루다는 수혁의 말에 밖으로 드러나고 있는 수혁의 표정을 점검했다.
[잘난 척하고 싶어서 안달 났구나, 지금.]
‘응. 난 늘 그래.’
자랑인가 싶지만…….
어쩌겠나.
몸은 솔직한 법이었다.
이제 수혁과 한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된 바루다도 몸이 달아 있었다.
[제 판단에 따르면 97% 이상 지금 수혁이 예측하고 있는 질환이 맞습니다.]
‘좋아.’
고다.
틀리면?
그때 가서 수습하면 된다.
수혁은 말을 잘하고 바루다도 최선을 다해 체면 깎이는 일 없게 만들 테니.
게다가 바루다도 97%라고 하지 않나.
거기에 수혁의 촉을 더하면 100%다.
“환자분, 잠시 검사를 좀 해 보겠습니다.”
“아, 또 뭐 돌리고 하나요? 그건 좀…….”
“아뇨. 간단한 검사예요. 여기서 바로 할 겁니다.”
“아……. 그럼 다행입니다.”
검사에 시달렸는지 검사 얘기를 꺼내자마자 환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원래 대학 병원에 입원하는 건 그 자체로 쉬운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환자는 딱 봐도 오랜 시간 병마에 시달린 몸을 하고 있었다.
암액질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지 몇 년은 되었을 거라는 걸, 딱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팔 들어 보시고…….”
그렇다 해서 검사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사는 점쟁이가 아니니까.
소견을 모으고 모아서 정답으로 다가가야 했다.
물론 남들이 볼 때 수혁은 살짝 점쟁이 빤스라도 훔쳐 입었나 싶을 만큼의 추론 도약을 하는 편이지만, 그것도 다 나름의 치열한 추론 과정을 거쳐서 도달하는 것이었다.
“다리 들어 보시고.”
“네.”
다행히 지금 수혁이 시행하는 검사는 이비인후과에서 시행하던 이리저리 돌리던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에 비해 수혁이 습득하고 있는 정보는 적지 않았다.
‘근력 자체가 떨어져 있는 것이지……. 신경의 문제는 아냐. 역시…….’
[심부 건바사도 완전히 정상입니다. 소견이 점점 그쪽 질환으로 가는데요?]
‘재빨리 입을 털어야겠군…….’
[MRI 찍기 전이니까요, 하하.]
‘후하하.’
환자 힘든데 웃으면 너무 사이코패스 같을 테니, 간신히 속으로만 웃었다.
입가가 살짝 씰룩거렸지만 이 상황에서 이게 감히 웃는 거라고 판단할 수 있는 건 하윤이나 대훈 정도였다.
그리고 그 둘은 수혁이 언제 어느 때 무엇을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당연하게도 수혁은 자연스럽게 입을 열 수 있었다.
“다행히 심각한 건 아닌 거 같군요.”
환자를 향해서였다.
조영상은 좀 당황했다.
‘네? 말초성 병변이 아니라고……. 그럼 중추인데?’
귀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중추의 병변이라는 건 머리 문제라는 거고.
다들 알다시피 머리는…….
심각하지 않나?
출혈이나 전이가 보이지 않았으니 남은 후보는 경색…….
어떻게 봐도 심각하다.
“간단한 보충 치료로 해결이 될 거예요. 그동안 너무 힘들어서 이러신 겁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나 하는 걱정에 손발이 벌벌 떨려 오는데, 수혁은 천하태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