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171화 (1,171/1,303)

1171화 돌림판 데이트 (2)

‘이게……. 마케팅의 힘이로구만…….’

의사가 환자를 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아무래도 실력이긴 하다.

인성도 그렇고.

허나 그런 의사 개인이 갖추어야 할 소양을 제외한다고 하면, 역시 환자와의 관계를 꼽을 수 있을 터였다.

전문 용어로 라포라고 하는데 이게 용어로까지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보면 되었다.

병원을 가 보지 않았거나 아주 가벼운 질환으로만 찾아본 사람들은 진료라는 게 그 순간 끝난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생각보다 많은 질환에서 치료란 지리한 과정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요새 이게 진짜 어려운데 말이지…….’

공부도 그렇지 않나?

노력했더니 바로바로 결과가 보이는 친구들도 있긴 하다.

그런 애들이 이제 공부 머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쭉쭉 위로 치고 올라가는 애들, 즉 재능러다.

허나 그렇지 못한 애들이라고 해서 공부를 포기해야 하나?

아니다.

왜?

그나마 공부하는 게 사회에서 먹고사는 데 있어 제일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이걸 포기하는 순간 남게 되는 선택지가 확 줄어들어 버리니까.

그렇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법인데, 이전에 라포를 쌓을 땐 외적인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의사라고 하면 디폴트 값으로 선생님이라는 말이 뒤따라 붙던 시절.

이때는 그냥 진료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다들 믿고 따라와 줬다.

‘요새는 진짜 사회성 뛰어난 사람 아니면……. 특히 큰 병원 아니면……. 아휴…….’

그나마 장강명은 대학 병원에 있다 보니 여기에 기댈 수 있었다.

하지만 동기들 중 나가 있는 친구들은 그러질 못하지 않나.

개인적으로 자신보다 훨씬 인격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녀석들조차 환자들이 믿어 주지 않아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가 더 어린 후배들로 가면 사정은 더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전문가의 권위는 살짝 나이가 있을수록 올라가기에 그러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수혁은 대학 병원에 있는 거 말고는 거의 최악의 상황이다 이건데…….

“좋아요. 흠.”

“네네, 교수님!”

눈앞의 환자는 그저 충성충성이었다.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수혁의 모습 덕분일 터였다.

‘사실 그게 왜곡이 아니라 진실이다 보니 더 힘이 있긴 했겠지.’

수혁처럼 살고 싶냐고 하면, 장강명은 언제고 고개를 내저을 자신이 있었다.

저렇게는 못 산다.

맨날맨날 병원에 있으면 그게 인생인가?

교수에 부센터장까지 했으면 나가서 그 힘과 권위를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갑질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으스댈 수는 있는 거잖아?

‘환자……. 입장에서는 최고지.’

언제까지 저게 유지가 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수혁은 실력만이 아니라 열정도 최고다.

어느 정도냐고?

지금도 봐라.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와서 환자 보고 있잖아.

심지어 저 환자…… 장강명이 볼 때는 무조건 크론이었다.

만약 수혁이 지금 당장 눈깔 돌아가서 정말 그런지 아닌지 내기하자고 하면 깨갱할 수도 있긴 했다.

그건 좀 무섭지 않겠나?

상대는 당대 최고의 천재인데.

“여기서 혈액 검사한 거 보니까, 상당히 빈혈이 심하시네요.”

“아……. 네. 가끔 좀 아플 때가 있었거든요? 똥 쌀 때.”

“배변할 때요.”

“아, 네. 죄송합니다. 배변할 때.”

“배변 시 통증이 있다라…….”

뭐, 여러 가지 원인이 있기는 할 터였다.

변비라 변이 너무 딱딱해졌다든지 아니면 기왕에 항문 주변에 난 상처가 있었다든지 혹은 너무 자주 봐서 쓸렸다든지 하는 원인 등등을 찾아볼 수 있었다.

확실히 크론과 비슷한 양상이긴 했다.

하지만 에리트레아라는 나라 그리고 두바이라는 지명이 수혁의 마음에 들어와 박힌 지 오래였다.

생각보다 서아프리카 그리고 중동 주변엔 그쪽에서만 자주 보이는 질환들이 꽤 많아서 그랬다.

이전에야 그 지역 의사 말고는 딱히 알 필요가 없던 질환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젠 아니지 않나.

글로벌 시대라는 말 자체가 식상해졌을 정도로 국경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시대였다.

“혹시 직장수지검사를 했나요?”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항문에 손가락.”

“아. 그거. 아, 씨…….”

환자는 수혁의 이어지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병원에서, 그것도 나이 지긋한 의사가 진중한 얼굴로 한 거니까 당연히 필요해서 한 짓이긴 할 터였다.

하지만 그게……. 딱히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했군.’

[그렇네요.]

수혁은 자연스레 찌푸려지는 환자의 얼굴을 보면서, 이내 장강명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강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해 주었다.

그 또한 살짝 인상을 쓰고 있었다.

소화기내과, 그중에서도 대장 내시경 하는 사람에게 항문 보는 건 사실 일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예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건 아니었다.

“그……. 치질이 좀 있었습니다. 외부 치질이요.”

“그 외에 치루나 치열은요?”

“그건 보이지 않았어요.”

물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과 의사들이 했을 때에 비하면 확인 가능한 소견이 많았다.

더 정확히 하려면 바루다를 탑재한 수혁이 나서는 것이 맞겠지만…….

‘장강명을 믿자.’

[소화기내과 내시경 센터장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그렇지?’

[그럼요.]

바루다조차 꺼리게 되는 검사였다.

게다가 환자도 싫어하는 검사이지 않나.

이미 입원을 했으니 다른 많은 검사들이 대기하고 있는데 벌써부터 기분 잡치게 하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흐음. 크론에서 제일 흔한 합병증이 보이지 않는다라.”

“아, 그렇긴 한데, 반드시 항문 질환이 있어야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다만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은 거죠.”

“뭐……. 그건…….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네네. CT는 찍었나요?”

“지금 막 찍으려고 하던 참입니다.”

사실 장강명은 집에 갈 생각이었다.

금요일이잖아.

아내랑 데이트를 하건 아니면 그냥 집에서 뭘 보건 간에 하여간, 이 병원에서 벗어나고 싶었더랬다.

어차피 영상을 찍어서 이상한 게 보이거나 하면 당직의가 알려 줄 터이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수혁의 기습적인 방문에 의해 그의 움직임은 봉쇄되었고, 그 결과 CT 찍는 것도 직관하게 되어 버렸다.

“오, 마침 왔네요.”

“같이…… 가실 거죠?”

사실 이것도 늘상 그렇게 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뭐 하러 CT실까지 가나?

여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딱딱 업데이트가 될 텐데.

하지만 수혁이 온 이상 대기하는 건 절대 무리였다.

이미 하윤이 두두두 달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장강명도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당연하죠.”

“네에.”

해서 셋은 곧장 CT실로 향하게 되었다.

환자는 이미 병실에서 라인을 잡아 두었기 때문에 딱히 걸리는 거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불만은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내과 주치의에 장강명에 수혁에 하윤까지 무려 의사가 넷이나 동행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마 시야가 보다 넓은 사람이었다면 동행인이 더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는지도 몰랐다.

“즐거워 보이네.”

“근데 너무 말을 수혁이만 하는데? 저래서야 데이트라고 할 수 있나.”

“하긴 그렇긴 하네. 원래 들어 줘야 하는 법인데…….”

신현태, 이현종, 조태진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안대훈, 김성진도였다.

나머지 놈들도 오겠다고 하는 걸 당직이라 남겨 놔서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우글우글했을 터였다.

위이잉.

외국인이라 좀 당황했지만 곧 촬영이 시작되었다.

환자의 한국어 실력이 워낙 유창한 데다가 처음 했던 얘기와 달리 수혁과 장강명까지 왔다 보니 부리나케 서두르고 있었다.

윙윙.

CT 기기가 돌아감에 따라 영상이 빠르게 넘어오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평소와 달리 수혁이 아니라 장강명이었다.

“여기. 항문 직장 부위로 연조직 부종이 있네요.”

다음으로는 하윤이었다.

“밖으로 가스도 차 있고……. 체액도 있어요. 누공이 있는 걸까요?”

외부에서 보기엔 항문 질환이 없어 보였는데, 그 옆으로는 상당한 진행이 벌어진 상황이란 뜻이었다.

생긴 것만 보면 딱 크론에 의한 누공이었다.

적어도 장강명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하윤도 그런가 했는데, 좀 더 기다려 보니 아주 그런 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하윤은 수혁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의견을 보탰다.

“그런데 이상한 게……. 외부가 깨끗했다면, 음. 크론으로 인해 CT 영상에서 이 정도로 변이가 일어났다면 반드시 바깥에서도 치루나 치열이 있었어야 할 거 같은데.”

“아니, 내가 볼 땐 없었어.”

“장강명 교수님이 봤을 때 없었다면 없다고 봐야겠죠. 그렇다면 더 이상합니다. 크론이 이 정도로 진행했다면, 바깥도 엉망이 되어야 할 텐데요. 환자 진술상 피 섞인 배변도 1년 이상 되었다고 하고……. 그럼 내부와 외부 소견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게 이상해요.”

“으음……. 이상한가……?”

장강명은 확신을 갖고 말하다가 이상하다는 말이 반복되자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장강명이 권력욕이 있고 실제로 속물근성이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좋은 의사가 아닌 건 아니라서 그랬다.

의학적으로 타당해 보이는 의견이 있다면, 당연히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합리성 또한 갖추고 있었다.

물론 옆에 수혁이 없었다면 고집을 좀 더 부려 볼 수 있겠지만…….

‘이수혁 교수가 우하윤 선생 말에 웃었어. 뭐……. 자기 제자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수혁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팩트에 기반한 소문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천재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소문이 태반이었다.

‘저 냉철한 놈이…….’

장강명은 수혁의 반응을 힌트 삼아 의견을 재빨리 바꾸었다.

“아닐 수도 있겠네. 흐음.”

이유?

그건 잘 모르겠다.

여전히 크론 아닌가 싶었다.

솔직한 심정은 그렇지만 여태까지 보아 온 것들이 있지 않나.

잘 모르겠으면 수혁을 보고 따라 하라는 오래되지 않은 격언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래요. 이상하네요. 게다가 환자의 고향인 에리트레아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래요. 나이를 고려하면 확실히 크론일 가능성은 이제 10% 미만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10% 미만은 좀 선 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영상 소견과 바깥 소견이 맞지 않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영상만 보면 저거 크론이네 할 정도는 되어서 그랬다.

게다가 증상도 크론이다.

아무리 점검하고 또 점검해도 떠오르는 진단명은 크론이다, 이 말이었다.

뭐 결핵일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지만 글쎄.

큰 회사 지사장으로 온 사람이 결핵을 앓는다?

매년 건강검진만 제대로 했어도 가능성이 크게 떨어졌다.

헌데 10%라니.

‘그래도 닥치고 있자.’

옛날 같았으면 에에? 하면서 반응을 보였을 것이고 어김없이 팩트로 맞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장강명은 조용히 수혁의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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