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172화 (1,172/1,303)

1172화 돌림판 데이트 (3)

장강명이 겸허한 얼굴이 되어 기다리고 있는 동안, 수혁은 딱히 말이 없었다.

몰라서는 아니었다.

쉽지 않은 케이스고 사실 아직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리기엔 여러 정보가 더 필요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수혁은 바루다 덕에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었다.

‘하윤이는 어떨까.’

[지금 말하면 예측이 아니라 예언이 됩니다.]

‘하긴……. 그렇긴 하지. 그럼 어쩔까. 그냥 말해?’

[아뇨, 그래도 좀 기다려 보시죠. 오늘 진료는 데이트 느낌으로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루다의 말대로 지금은 예측이라기보다는 예언과 같은 느낌이 강했다.

몇 안 되는, 심지어 서로 조각난 채 떨어져 있는 단서들을 가지고 하나의 결론으로 도달한다는 건……

괜히 조태진이나 안대훈이 수혁을 종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야 당사자인 수혁이나 바루다로서는 황당하기만 했더랬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하윤의 시선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데이트란 둘이 하는 것이지 않나.

하나만 신나서 떠든다면…….

[뭐 그래도 되는 사람이 있긴 할 겁니다.]

‘누구, 차은우?’

[여기서 갑자기 차은우가 나온다는 게 당황스럽긴 한데……. 평소에 차은우 씨랑 라이벌 의식 불태우고 그러는 건 아니죠?]

‘아니지. 미쳤냐? 그건……. 그건 반칙이야.’

[그렇죠. 자각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아무튼, 연애에 있어 될놈될이 있는데 수혁은 절대로 해당 사항이 없으니 세심하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침 하윤도 수혁의 말을 받아먹을 준비가 만발입니다.]

‘좋아.’

잘해 줘야 되지 않겠나.

어떻게 보면 수혁은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몸이었다.

지금이야 양부모가 새로 생기고 또 삼촌에 형님에 제자들까지 생겼지만…….

원래 기억은 안 좋은 기억이 더 힘이 센 법이었다.

심지어 그 기억이 더 먼저 형성되었다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이었다.

보통 이렇게 되면 비뚤어지기도 쉽겠지만, 다행히 수혁은 천성이 워낙에 긍정적인 데다가 강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가오는 인연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볼까요. 이제 촬영도 다 끝났으니.”

해서 수혁은 하윤이 직접 진단하는 즐거움을 선물하고 싶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면 다른 것을 떠올리겠지만…….

수혁이 아는 가장 크고 오래가는 즐거움은 바로 환자를 스스로 해결할 때 오는 것이다 보니 머리가 이쪽으로만 돌았다.

조언자랍시고 있는 놈도 근본이 깡통이다 보니 제대로 된 교정을 해 주진 못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하윤도 상당히 무던한 사람일뿐더러 동시에 통합진료센터의 일원이라는 점이었다.

굳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보지 않아도, 그러니까 먼발치에서만 봐도 통합진료센터라는 곳이 만만치 않은 곳이라는 걸 알 수밖에 없는데 굳이 들어온 인간이다, 이 말이었다.

“으음.”

그렇기에 하윤은 수혁이 스크롤 내리는 동안 영상을 주의 깊게 살폈다.

머릿속으로는 그간 수혁 밑에서 보고, 듣고 또 스스로 익히고 배운 것들을 잔뜩 떠올리면서였다.

아마 안대훈이었으면 지금쯤 정수리 끝까지 빨개져서 익힌 문어처럼 되었을 터였다.

하윤도 귀 끝이 빨개져 있었다.

지금 머리로 피가 확 몰리고 있단 뜻이었다.

‘벌써 세 번째 왔다 갔다 하고 있어. 교수님이 몰라서는 아냐. 이건 나한테 보여 주기 위함이야.’

단지 의학적인 지식만 떠올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수혁에 대해서도 떠올리고 있었다.

하윤이 아는 수혁은…….

‘영상 볼 때,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면 절대 두 번 보는 법이 없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바루다가 단기간 동안이라도 해당 영상을 완전히 저장해서 다시 재생한다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천재라서 그럴 거라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당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뇌리에 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영상을 되돌리고 있다는 건 당연히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일 터였다.

‘따뜻해…….’

하윤은 감동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수혁의 배려가 헛되지 않도록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 소견이 너무 뚜렷해서 몰랐는데……. 딱 항문 직장 부위 말고는 뭐가 보이질 않네……?’

사실 CT라는 게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보니 모든 변화를 다 한 번에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긴 했다.

MRI가 그러한 면에 있어서 훨씬 낫지만 그조차 고해상도 그림자일 뿐, 실제 모습을 완전히 반영하는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영상의학적 검사는 점막 병변에 취약했다.

괜히 위나 대장을 진단할 때 있어 내시경이 필수가 되는 게 아니란 얘기였다.

‘그걸 감안해도…… 이상해.’

크론이라는 병은 다른 자가면역질환들이 다들 그러하듯 경미한 수준에서부터 아주 심각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그 증상 정도가 다양했다.

심지어 크론은 토막토막 침범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괜찮은 부위가 있다가 심각한 부위가 있다가 하기도 했고.

하지만…….

‘항문 직장 근처에는 아예 농이 차 있어. 저렇게 심한데……. 다른 곳은 막말로 깨끗한 수준이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군데만 침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니, 드물다 못해 희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없다고 하고 싶은데 세상 모든 케이스를 다 아는 건 아니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상해. 지금 세 번째 돌아가는데 보면 볼수록 국소 병변처럼 보여.’

하여간, 스크롤을 반복해서 오르내린 지도 한참이었다.

장강명은 벌써 병실로 돌아가고 있는 환자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수혁이 눈앞의 제자를 배려하기 위해 이러고 있단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고의 흐름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모르나? 아니, 아니지. 모를 리가 없지. 어떻게 봐도 크론인 거야. 이 양반……. 하긴 심심해서 본 환자가 다 특이한 환자일 리가 있나!’

처음엔 그러면 그렇지 정도였다.

그러다 오늘이 금요일인 데다가 아까 낮에 아내에게 온 톡 중에 ‘더 글X리 시즌 2가 5시에 풀리니까 최선을 다해 7시까지 집에 와서 밥 먹고 8시부터 달리면 새벽 4시 전에 다 볼 수 있다’고 했던 것이 끼어 있던 것을 떠올렸다.

‘나 괜히 잡힌 거야? 그런 거야?’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30분.

집 가면 8시 넘는다.

아내가 기다려 줄까.

보통 때라면 기다려 줄 텐데…….

연진이가 캄캄한 밤에서 담배 피우다가 하도영하고 마주친 장면에서 끝난 지도 벌써 어언 한 달이 훌쩍 넘어간 시점인데 그걸 참을까.

‘우리 아내가…… 성모 마리아는 아니시지.’

시발.

그냥 여기서 볼까?

보다가 가서 맞춰 보면 되잖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자연히 인상이 험악해지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소리도 질렀을 텐데, 수혁의 위엄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초조한 시간이 지속적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하윤이 입을 열었다.

“크론이 아니라 국소 감염병일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리 봐도 너무 국소병변……. 딱 여기만 심해요.”

수혁이 딱 기다리던 답이었다.

비록 꽤 오래 걸렸고, 그사이 장강명의 인자했던 모습이 마치 김승규처럼 변하긴 했지만 어쩌겠나.

저 사람은 김승규가 아니니 괜찮았다.

“그래, 그렇지. 그럼 뭘 봐야 할까.”

“일단 내시경도 내시경이지만 이미 시행한 검사를 본다면……. 혈액 검사요.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백혈구의 증가 폭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세포가 특히 증가했는지를 보면 세균인지 바이러스인지 혹은 다른 원인인지 알아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좋아. 아주 좋아. 역시 하윤이다.”

수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빈말로 좋다고 하는 게 아니다 보니 진짜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수혁이라 해도 타이밍의 문제일 뿐, 딱 저렇게 말했을 거라서 그랬다.

내시경이라는 말에 장강명의 얼굴이 더 험해졌지만, 수혁은 일단 혈액검사부터 보여 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수혁에게는 힌트였던 결과였다.

이제 하윤에게도 힌트가 되어 줄까?

두근거렸다.

이런 게 연애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음……. 호산구가 증가해 있어요.”

물론 수혁처럼 대번에 딱딱 추론을 이어 나가진 못했다.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일종의 진보이긴 했다.

사람이 언제 당황하나?

예측이 빗나갔을 때 주로 한다.

즉 하윤은 뭔가 예측을 했고, 그게 틀렸다는 거다.

“그래, 호산구는 언제 증가할까?”

“보통은…… 알레르기 반응이나…….”

“자가면역 아닙니까?”

“기생충?”

“아니, 크론인데 왜 자꾸.”

“좋아, 기생충. 환자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에리트레아요.”

“아 에리트레아고 나발이고!”

중간중간 장강명이 끼어들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수혁과 하윤은 둘만의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래,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야. 에디오피아랑 수단 사이에 있는 나라지. 거기서 호발하는 기생충은 뭐가 있지?”

“주혈흡충…….”

“좋아! 요새 진짜 열심히 하는구나!”

“아, 얼마 전에 안대훈 선배가 강의했어요.”

“좋아, 좋아.”

그리고 어느새부터인가는 끼어들기도 어려워졌다.

뭔가…….

뭔가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사실 아직 그런 느낌이 들어서는 안 되지만, 상대가 수혁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아마 앞으로 몇 번쯤은 완전 말도 안 되게 틀려도 그럴싸하게 들어 주지 않을까?

‘뭐야. 뭐야……?’

진짜야?

주혈흡충이라고?

이름도 낯선 그 기생충이라고?

해서 장강명은 역시나 그의 예상이 빗나간 탓에 심히 당황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버버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수혁과 하윤이 대화를 마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요.”

“들었잖아요. 내시경 해야지. 아까 나갈 때 환자 저녁 아직 먹지 말라고 했어요. 대장 내시경 합시다.”

“아니, 응급도 아니고 이런 걸 무슨 금요일 밤에…….”

“환자가 당장 넘어가는 일은 없겠죠. 하지만 이거 크론인가 아닌가 하는 상태로 주말을 보내는 게 찜찜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환자가 아픈데 치료할 수 있으면 빨리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처맞는 말!

‘와, 진짜 개때리고 싶다.’

장강명은 ‘나는 솔직히 너를 한 대 때리고 싶어’라는 가사를 떠올렸다.

하지만 진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상대의 말이 맞지 않나?

뭐…….

그래도 갑을이 명확하면 한 대 정도는 칠 수 있지 않나 싶었다.

금요일 밤을 침해당한 것도 일종의 폭력일 테니.

허나 그러기엔 이수혁이 너무 셌다.

뒤에 백이 수두룩 빽빽했다.

“자, 환자분. 주무십니다.”

“네.”

그렇게 내시경을 하게 되었다.

한숨 속에서.

“어?”

그리고 그 한숨이 경악으로 뒤바뀌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엉망진창일 거라 예상했던 직장부터 점막이 깨끗했기에 그랬다.

“역시, 그렇군. 프라지콴텔 처방하죠. 별거 아닙니다.”

“아니, 이게…… 이게? 진짜라고?”

“아, 저희는 먼저 가 볼게요. 짜장면 먹으면서 더 글X리 시즌 2 봐야 해서.”

“뭐, 뭐라고? 니들은 간다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