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3화 돌림판 데이트 (4)
“보통 드라마 볼 거면 집에 안 가나……?”
“그러니까. 아니, 집 없는 놈도 아니잖아.”
“집이 없긴요. 그 오피스텔이 그게 말이 오피스텔이지……. 장난 아니지 않습니까.”
신현태, 이현종, 조태진은 순서대로 연구실로 들어가고 있는 수혁과 하윤을 보면서 조잘거렸다.
다 들었다.
더 글X리 볼 거라는 말.
뭐…….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의학 중독자에 해당하는 이현종조차 그건 보고 있으니까.
알게 된 건 이기자 교수 때문이었지만, 정작 지금은 이현종이 더 재밌게 보고 있었다.
‘흐아아아…….’
그 재밌는 것을 나온 날 못 보고 대장 내시경 뒷정리나 하고 있다니.
셋의 고개는 어느새 엘리베이터, 그러니까 거기 타 버린 수혁에게서 장강명에게로 돌아갔다.
사실 지금 당장 더 글X리를 못 보고 있다는 건 이 셋 또한 마찬가지지만, 여긴 어찌 되었건 그에 준할 만큼 재밌는 장면을 보지 않았나?
수혁과 하윤의 데이트라니.
남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흥미진진했다.
그에 비해 우리 불쌍한 장강명 선생이 본 것은 환자의 항문과 직장 그리고 대장이다.
그것도 관장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상서롭지 못한 무언가도 많이 봤다.
“시발.”
때문에 셋은 장강명이 욕설 내뱉은 것 정도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옆에 있던 간호사도 장강명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아까 낮부터 들떠 계시더니, 빨리 가세요.”
“아니, 아냐. 이미 늦었어. 삼각김밥 먹으면서 가서…… 앞부분은 물어봐야지.”
“교수님 넷X릭스…… 배속 재생되는 거 아시죠?”
“응? 그게 뭔데?”
“1.5배속으로 보면 가서 따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오……. 이게. 와, 요새는 이런 것도 있구나.”
슬프게도 꽤나 빨리 위로가 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사람이 독하지가 못하다 보니 그랬다.
애초에 수혁에게 뭔가 할 생각도 없었고.
어쩌겠나.
저건 그냥 재해 같은 건데.
악의가 있어서 저런다면야 당연히 복수할 생각이 들기도 할 터였다.
하지만…….
‘이상한 거지.’
악의가 있겠나?
오히려 와서 도와준 거 아닌가.
더 글X리 제때 못 보게 되었다고 대학 병원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이 복수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이상하다.
심지어 크론이라고 오진하고 있던 환자를 기생충으로 정정해 준 사람에게…….
“갈까?”
“응. 뭐 나 너무 신나 수혁아, 이 지랄 하면 모르겠는데 그냥 묵묵히 잘 있네.”
“그랬으면 제가 수혁이의 주여정이 되겠습니다. 좀 닮았다는 소리도 듣고 있으니까.”
그 꼴을 보고 있던 셋은 이내 자리를 떴다.
신현태나 이현종은 나름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조태진이 에러였다.
주여정?
그 잘생긴 성형외과 의사 말하는 건가?
신현태와 이현종의 눈이 그를 향하게 되었다.
“으응……. 그 너무 느낌이 다르지 않냐?”
“그러니까. 내가 그 배우 이름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알아내서 고소하라고 하고 싶어지네?”
“왜요. 저 바둑도 잘 둬요. 따지고 보면 제가 수혁이 선배이기도 하고.”
“필사적으로 닮은 점을 찾지 말고, 다른 점을 찾아봐. 거울만 봐도 인마. 주여정?”
“돌았네, 진짜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 자유잖아요?”
어휴.
둘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뭐라고 하진 않았다.
‘빨리 가서 봐야지.’
‘기자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나는 어떻게 될까? 내 안의 지옥을 보여 주게 될까?’
각자 빨리 집에 갈 생각뿐이라 그랬다.
물론 연구실에서 수혁이 하윤과 과연 진도가 더 나가게 될지 아닐지도 궁금했지만…….
어쩐단 말인가.
문동은이 너무 신난다는데!
이제 막 복수가 시작될 참이다 보니,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으로 갔다.
두둥.
그 시각 수혁의 연구실에서도 더 글X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9화.
본격적으로 흥미진진해지는 회차.
아니, 사실 1화부터 그냥 지금까지 내내 흥미진진하긴 했더랬다.
허나 수혁은 드라마 내용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윤이 손잡아도 되려나.’
[분석 중입니다.]
‘뭔 놈의 분석을 새꺄 수십 시간을 해.’
[한 대 맞았잖아요. 그러게 주여정처럼 생겼으면 문제가 없지.]
‘뭐…….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
[생각해 보십쇼. 응급실에서 마주쳤다고 따라와서 바둑 가르쳐 주는 놈이 수혁처럼 생겼다면 그게 로맨스의 시작일까요 아니면 스릴러의 시작일까요.]
‘스, 스릴러.’
[양심이 아직 남아 있어 다행이군. 그러니까 지랄 말고 기다리십쇼. 어차피 8시간 붙박이로 있을 수도 있으니.]
‘오케이.’
그래, 더 글X리라 다행이다.
1부도 그러지 않았나.
안대훈이 와서 말할 때만 해도 어이가 없었다.
-교수님. 이건 진짜 한번 보십쇼.
-뭐……. 논문 정리한 거야? 더 글X리? 새로 나온 학술지 이름인가?
-그런 게 아니라…… 드라마입니다.
-으음.
아니, 어이가 없는 게 아니라 화가 났다.
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병이 있는데 그거 공부할 시간에 드라마?
미쳤나?
-그러지 마시고 1화만요.
예전의 수혁이었다면 얼씨구나 하고 봤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수혁은 어찌 보면 바루다보다도 더 깡통처럼 되어 버린 마당이다 보니 공부 말고는 딱히 흥미 있는 게 없었다.
아, 하나 있긴 했다.
우하윤.
그게 둘이 된 날이 그 날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다 봤지?’
[네, 말릴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럼 너도 보고 있는 거야? 분석 안 하고?’
[양심 어디 갔어요? 그럼 난 분석만 하라고? 뇌 속에 개 한 마리 풀어?]
‘아니, 아니야. 그래. 알았다.’
바루다까지 재미를 느낄 지경이니, 작가, 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가히 신들린 수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여간, 그렇게 9화가 10화가 되고 11화가 되고 12화가 되니 어느덧 새벽이었다.
“으음.”
“으으음.”
더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딱히 그렇게까지 피곤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심리적인 게 중요했다.
12시가 넘어가지 않았나.
서른 살도 넘은 사람들이 통금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오늘이 더 글X리 나온 날이라는 게 중요했다.
-왜 안 들어와. 우리끼리 봐?
우창윤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당직 아니라 일찍 끝난다며.
뭐라고 해야 할까.
수혁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하윤은 큼지막한 눈을 굴리다가, 이내 답했다.
“난 보고 있어.”
-보고 있어? 어디…… 어디서? 폰으로 보면 눈 나빠져.
“티비로.”
-티비? 설마.
우창윤은…….
머리카락 다 날아간 지금이야 믿기지 않겠지만 좀 놀지 않았나.
딸은 마침 수혁과 연애 중이고.
아무리 의학에 미친 놈이라지만 서른도 훌쩍 넘은 놈이지 않나.
-너 이수혁 교수랑 같이 있어?
“어…… 어.”
-허어.
이놈이 내 딸을 기어코…….
아니,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고 멀쩡한 놈이니 좋아해야 하나?
딸 가진 부모 마음이라는 게 참 그렇다고 하더니 진짜 복잡 미묘해지고 있었다.
저거 저러다 정말 연애 한번 못 해 보면 어쩌나 싶다가도 막상 연애한다고 하면 질투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 바쁘…… 바쁘겠네.
“아니, 그냥 보고 있어.”
-이건 또 뭔 소리야. 드라마만 보고 있어?
“응.”
-그…….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기분이.
다른 짓도 했을 거라 확신했을 때도 별로였지만 지금은 확실히 더 별로다.
‘설마 이수혁 교수 이거……. 병신인가?’
12시 넘었다.
둘이 티비 보고 있다면 오피스텔이겠지?
근데 아무것도?
“에이 설마 아무것도 안 했을라고. 손은 잡았겠지. 하윤이의 기준이 높은 거 아냐?”
“아, 그런가.”
옆에서 대화 다 듣고 있던 아내가 끼어들었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럴싸했다.
-그, 손은 잡았지?
해서 물어보니 답이 없다.
하윤이 생각에 잠겨서 그랬다.
‘손……. 마주친 적 말고는 없는 거 같은데.’
그것도 걸을 때 손등 부딪친 게 다다.
아, 영화관에서 팝콘 먹을 때 가끔 겹친 거?
보통은 그렇게 한번 겹치면 그냥 붙잡게 된다던데, 이수혁 이 새끼는 팝콘에 대체 얼마나 진심인 건지는 모르겠는데 바로 놓고 그것만 처먹었더랬다.
뭐…….
갈릭 팝콘이 맛있긴 했다.
영화보다 팝콘에 주력하는 듯한 상영관들이 있지 않던가.
-설마 안 잡았니.
“어, 그런데.”
-너…… 일단 집에 와 봐라. 그놈 이상한 거 같은데.
“아, 뭘 이상해.”
-이상한 거야……. 지금까지 모쏠이었던 것도 이상하고.
“나도 모쏠이었어.”
-너, 넌 멀쩡한데 판타지가 있어서 그런 거고.
“교수님도 그랬겠지.”
-아냐, 아닌 거 같다…….
“암튼, 끊어. 알아서 갈게.”
과년한 딸이 남자 놈이랑 단둘이 있겠다고 전화 끊는데 왜 불안하지가 않지.
왜 손도 못 잡을 거 같지.
애초에 둘이 사귀게 된 것도 이거 다 신현태 때문 아닌가.
그런 계기가 없었으면 이수혁 저거 아무것도 못 했을 거다.
‘이게…… 이게 뭐야?’
왜 딸 가진 부모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냐.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네놈은.
우창윤 교수가 이렇게 혼돈에 빠진 사이, 하윤도 대충 비슷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새끼 이거 손도 안 잡고 드라마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수혁?
수혁은 오히려 명쾌해진 마당이었다.
[잡죠. 손은 잡아도 될 듯.]
‘그래? 근거는?’
[솔직히…… 없습니다.]
‘이 새끼……?’
[자만추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내가 자만추잖아.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요새는 자고 만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아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런 세상에 사귀는 사이에 손도 못 잡습니까?]
‘사귀는 건 맞나.’
[아, 얘기 안 했나? 그럼 오늘부터 1일이라고 하면서 잡아 봐요. 맞으면 뭐 또 한 몇 년 뒤에 다시 해 보지.]
‘시발…….’
남의 일이라고 이렇게 해도 되나 싶었지만, 뭐 어쩌겠나.
바루다도 근거를 찾지 못했다면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기다려?
아무리 기다리는 데 도가 튼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그렇다.
해서 수혁은 슬쩍 하윤에게로 붙었다.
회의용으로 가져다 놓은 2인용 소파다 보니 애초에 그리 넓은 것도 아니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바짝 붙게 되었다.
“어.”
“하윤아.”
이제 막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자동으로 다음 화가 재생되기 시작한 마당이었다.
익숙한 오프닝이 나오고 있다 이 말인데…….
하윤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수혁의 얼굴이 어쩐지 진지해서 그랬다.
“네?”
“나 너 좋아하는 거 알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손을 잡았다.
이건 바루다의 조언에 따라서 했다.
너무 막 무섭게 잡지 말고 대강 스리슬쩍 잡으라는 말에 따라 그렇게 했다.
혹시 반대편 손이 날아오면 막아야 되니까 잔뜩 긴장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 오늘부터 1일로 할까?”
[그게 최선입니까?]
“저도 좋아요. 그래요.”
[이게 된다고?]
“내가 진짜 행복하게 해 줄게.”
“이미 행복해요.”
[마음대로 해라……. 니들 마음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