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9화 불명열 (3)
“아, 여기.”
“여기도요.”
상행 대동맥을 포함해 복부 등 여기저기 비대해진 임파선이 보였다.
너무 많다 보니 굳이 어디에 있는지를 짚는 것이 의미가 있나 싶어질 지경이었다.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뭐가 되었건 간에 전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되면 CT 리뷰는 그저 원발성 병변, 즉 심장만 보면 될 터였다.
전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 된 이상, 이제부터 그건 PET CT를 찍어야만 할 테니까.
“PET CT 예약 걸자.”
“네, 네!”
레지던트?
아까까지만 해도 조금의 불만은 있던 그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갔다.
아니, 넋이 나갔다는 표현은 사실 적절하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빠릿빠릿해졌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해져서 그랬다.
의사는 아무래도 환자를 위해 무언가 하게 될 때 제일 마음이 편한 법 아니겠나.
-얘, 뭐 하니.
그렇게 된 이상 뭐 원장이고 나발이고 중요하겠나.
폰이 지속적으로 울리고 있었지만 일단 들여다볼 정신이 없었다.
당직이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랬다면 애초에 진동 모드로 걸어 놓지도 않았을 거다.
세상 시끄러운 소리가 사방팔방 울려 퍼지도록 해 놨겠지.
-나…… 간다? 환자 뭐 어떻게 된 거 아니지? 스테이션은 죄 통화 중이고…… 방송은 없었던 거 같은데.
그런 와중에 신현태는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회의도 중요한 회의였다.
내년에 병원 설비를 과연 무엇을 들여놓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였다.
대회의는 아니고 각 과에서 올라온 기안을 정리하는 느낌의 회의이긴 했지만……
하여간, 돈이 섞인 회의는 늘 그렇듯 분위기가 좋지만은 않았다.
-원장님! 신경외과만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닙니까?
-3D 현미경 저희도 좀 사 주십쇼! 네?
-와…… 니네가 그거 사 봐야 어따 쓴다고!
-뭐? 우리 과 무시해? 무시하냐?
-저기…… 소아과 말도 좀.
-돈 못 버는 과는 조용히 해!
-뭐, 뭐라고 했어 너.
-왜 산부인과가 발작을 하고 그래.
아니, 좋게 말해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지……
‘오늘도 깔끔하게 개판이었다.’
신현태는 아까 벌어졌던 수라장을 생각하다가 이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른세수를 부리나케 하면서 또 다른 답답한 일을 떠올렸다.
‘아니, 이 새끼는 왜 연락이 없어.’
레지던트…….
이 새끼가 설마 날 무시하나?
뭐 이런 생각이 들진 않았다.
피해 의식이 생길 만큼 신현태의 자존감이 낮지는 않아서 그랬다.
사실 그런 게 생기면 너무 이상한 상황 아닌가.
신현태는 누가 보더라도 의사가 바랄 수 있는 삶의 정점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원장이 아니더라도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한 편이었다.
‘진짜 뭔 일 났나……?’
그렇다 보니 오히려 불안감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게 뭐 환자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아니고서야 이러겠나?
두두두.
그렇다 보니 신현태는 이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원장 체면에 달리는 게 말이나 되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대학 병원 의사는 원래 나이와 관계없이 뛸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몸이었다.
환자 때문에 뛰었다고 하면 지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실은 점심 먹으러 뛰었다고 해도 말은 그렇게 하는 게 의사들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도착했을 때 신현태가 마주하게 된 것은 환자가 침대째로 빠져나가 텅 비게 된 병실뿐이었다.
“뭐야.”
어디 갔어.
비싼 검사…… 하면 말해 달라고 했는데.
황당한 얼굴로 서 있으려니 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가 다가왔다.
다름 아닌 얼떨결에 CT실까지 따라갔다 왔던 환자 담당 간호사였다.
“저, 원장님.”
“아, 네네. 환자 어떻게 됐어요?”
“PET CT 찍으러 핵의학과 갔습니다.”
“PET……?”
“네.”
PET CT.
자세히 말하면 F18-플루오로데옥시글루코아제 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
이건 암이 의심될 때만 찍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검사였다.
주로 당을 섭취하는 부위를 표시하기 위한 검사인데, 찍어 보면 암이야말로 에너지를 어마어마하게 소모하는 놈들이기 때문에 암이 있는 곳이 번쩍번쩍거린다.
“그게 바로 된다고?”
“아……. 네. 마침 취소된 자리가 있다고 해서요.”
“거참……. 취소도 잘 나지. 이상한 일이야, 진짜.”
PET CT?
그거 아니라 MRI도 원래 같으면 찍기 진짜 힘든 검사다.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기술적으로 까다롭기 때문에 예약 검사가 기본이다, 이 말이다.
특히 태화처럼 전국에 있는 환자들이 몰리는 병원인 경우에는 더했다.
안 그래도 큰 병원 쏠림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데 지금은 수혁과 이현종 듀오 때문에 그런가, 빅 5도 아니고 원탑과 나머지 네 개 수준으로 구분이 되고 있었다.
원장 입장에서야 너무 잘된 일인데…….
‘왜 수혁이랑 형만 나서면 검사들이 딱딱 타이밍 좋게 취소가 되냐고.’
돌이켜 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이를 두고 안대훈과 조태진은 신의 이적이라 칭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지랄 말라고 타박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확실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
아무튼, 신현태는 회의실에서 병실까지 뛰었다가 다시 핵의학 검사실까지 뛰었다.
헉헉거리며 달려갔더니 과연 거기에 이현종 일당들이 있었다.
‘조폭도 아니고 열 명이 몰려다녀?’
그중에는 자신에게 미리미리 연락을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주치의도 끼어 있었다.
보아하니 자신과의 약속은 까맣게 잊은 듯 보였다.
화가 나진 않았다.
여기가 PET CT 찍는 곳이니까.
다시 말하면 암이란 얘기 아닌가.
‘불명열로 더 깔아 두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신현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이 일로 이현종이 이제 또 얼마나 난리를 칠까 걱정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오. 온다.”
“와…… 이거…….”
“너무 심한데요?”
그렇게 무려 원장이 다가가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모여든 인원 중에서는 그 누구도 뒤를 돌아보거나 하지 않았다.
마침 영상이 넘어오고 있는 와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로로 길쭉한 모니터에는 흑백 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엑스레이는 아니고, 이것도 PET CT의 전신 결과물 중 하나였다.
여기서는 까맣게 표시되는 것이 양성 소견이라고 보면 되었다.
‘이런 망할. 뭐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봤어도 충격적이었을 터였다.
하물며 신현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는 상황 아닌가.
그 상태에서 영상을 보니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경부, 흉부, 겨드랑이, 복부, 서혜부에 모두 병변이 확인되었다.
뭐 이거야 전이가 있는 암에서는 흔하게는 아니더라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소견이기는 했다.
“여기, 대동맥 주변하고 심장으로 병변이 상당히 심하지. 주변에 덕지덕지 붙어 있단 얘기야.”
“아…….”
문제는 방금 이현종이 말한 병변이었다.
대동맥에서 심장으로 뻗어 나가는…… 관상동맥을 비롯해서 그냥 심장 전반에 걸쳐 병변이 보였다.
나름 대학 병원에서 의사 생활 수십 년을 해 온 몸인데 이런 것은 처음 봤다.
“어? 현태 왔네.”
그렇게 놀라고 있으려니 이현종이 드디어 신현태를 발견했다.
“어, 어어. 내 환자야. 어때?”
“보면 모르냐. 심장 종양이야.”
“아니…… 심장에 종양이 왜 있어, 갑자기. 원발성이야? 설마?”
“그렇게 보이긴 하는데…… 점액종은 아닌 거 같아.”
“내가 봐도 그렇긴 한데…… 아니, 이게 뭔…… 뭐야? 대체?”
신현태는 마냥 놀라고 있었다.
이 일로 나중에 이현종이 놀릴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어차피 반평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여기서 좀 더 놀림 받는다고 얼마나 차이가 있겠나.
그것보다는 당장 설명을 듣는 게 더 급했다.
“이거 누가 찍을래?”
“그건 안 되고.”
물론 동의받지 않은 상태의 촬영은 막았다.
안대훈 같은 미친놈이 있었다면야 원장의 말도 거역하고 찍었겠지만, 다행히 여기 있는 놈들은 그 정도로 돌아 버리진 않은 상황이었다.
이현종은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100% 확신한 상태에서 진행한 건 아니지.’
지금?
지금도 100%는 아니다.
당연했다.
조직검사를 한 것도 아닌데 뭔 놈의 확신을 하겠나.
다만 이현종은 지금까지 심장에 대해서만큼은 수혁에게조차 지지 않을 거라 단언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해 온 사람이었다.
그에 더해 경험 또한 만만치 않게 쌓아 왔다.
태화 의료원의 간판스타로 살아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은 추정이야. 추정인데, 그래도 가능성이 아주 높은 추정이지.”
“어어. 듣고 있어.”
“자, 니들도 잘 들어라.”
“네, 교수님.”
이현종은 신현태뿐만 아니라 제자들 그리고 따라 도는 전공의들까지 집중하도록 하고, 말을 이었다.
“일단 심장의 원발성 종양은 진짜 드물어. 전체 종양의 1%도 채 안 된다고 생각하면 돼. 근육 조직이라는 게 원래 종양이 잘 안 생기기도 하고…… 심장근육은 그 특성상 내구도가 어마어마하거든.”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딱히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설명은 아니었기 떄문에 이현종은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중에서 그나마 흔한 것이 점액종인데 얘는 양성이야. 근데 여기서는 전신에 걸친 전이가 있지? 게다가 모양을 보면 전형적인 악성 소견을 띄는 놈들도 많아. 다른 거라고 봐야 할 텐데…… 이때 우리가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사실 심장의 원발성 종양이 아니라 림프종이야.”
“아, 림프종…… 논 호치킨?”
“그래. 역시 원장 짬밥이 어디 가진 않네.”
이현종은 용케 그럴싸한 진단명을 떠올린 신현태를 치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그리 쉬운 추론은 아니라서 그랬다.
“림프종의 심장 침범은 드물지만…… 심장 종양만 따지고 보면 그중에서는 제일 흔한 편이야. 대부분이 논 호치킨이고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DLBCL이지. 뭐 외부에서의 침범이기 때문에 사실 심장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는데, 주로는 우심방으로 와. 심방이 아니더라도 우측으로 오지. 여기서도 보면, 우측에 병변이 몰려 있지? 초음파 상에서 확인했던 심낭 병변도 우측이었고.”
“아…….”
“그렇다고 해도 이것만으로 진단이 되진 않아. 조직검사는 해 봐야 해.”
“심장을?”
“아니……. 현태야. 심장 조직검사 하려면 가슴 열어야 되는데 그게 되겠냐? 양성 종양이라 떼면 끝나는 병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조직검사 때문에 심장 부분 절제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아니, 나도 아닌 거 같아서 물은 거야.”
“어, 그랬길 바란다.”
이현종은 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 동시에 영상의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켰다.
환자의 겨드랑이 부위였다.
다른 부위에도 임파선 비대가 많긴 했지만 여기가 제일 많았다.
“여기서 절제 생검을 해 보도록 하자고. 나온 결과에 따라 항암 방사선 치료를 하도록 하고.”
“아……. 그럼 혈종으로 보내야겠네?”
“그렇지. 근데 이런 식으로 심장 내부에 종양 생겼을 때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이 심부전이야. 그거 예방하려면 우리도 같이 봐야 해.”
“아, 그건 봐 줘야지. 봐 줘.”
“어……. 맡겨 놨어?”
“어. 환자 보라고 돈 주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지. 아무튼, 잘 볼게. 이게 사실 항암 치료하면서 암 조직이 파괴되면 그때도 잘 봐야 되거든. 어디 이상한 데 암 조각이 날아가서 틀어막기도 해서.”
“아……. 골 아픈 병이구나.”
“그렇지. 나 아니었으면 환자 아마 어려웠을걸.”
이현종은 수혁의 표정을 흉내 내며 후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