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1화 본진 학회 (4)
“나는 IT 종사자도 아닌데 혹하네.”
“앰디 앤더슨도 이제 이런 거 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러니까 말야. 뭐 하는 거야? 시대에 뒤처졌네.”
“아무튼, 펠로우 인사이트는 아니겠죠?”
“아니지. 이수혁 교수라는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언제 접근하죠?”
앰디 앤더슨 스카우터들은 일단 다른 병원 스카우터들부터 살폈다.
건수가 건수다 보니 이번 일만 성사시키면 떨어지는 성과금이 꽤 크지 않겠나?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잠깐…… 저 새끼들 못 참고 간다.”
“어디, 아 존스 홉킨스. 쟤네도 종이호랑이 다 됐죠?”
“어. 미국 3등이지. 인마, 그게 종이호랑이냐? 우린 5등이야…….”
“아, 그랬죠.”
“응?”
“왜…… 어?”
존스 홉킨스.
언제나 1등 자리를 놓치지 않던 전통의 강호.
허나 허드슨 강의 흐름은 도도하기 짝이 없어서, 아차 하는 순간 순위가 뒤로 밀리기 마련이었다.
의료계도 마찬가지다 보니 위기의식을 잔뜩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해서 수혁에게 접근하고 있었는데, 웬 놈들인지 툭툭 부딪쳤다.
“뭐지?”
“우연…… 이겠죠?”
“모르겠는데. 전문 꾼 같아 보이기도 하고.”
“어…… 이수혁 교수.”
“뭐야, 어디 갔어.”
“모르…… 아, 저기.”
“이런 망할. 저 새끼들 뭐지?”
“이현종…… 신현태. 이수혁 교수 최측근들입니다.”
“아씨…… 뭐 이런 우연이 다 있어.”
“그러니까요.”
말도 걸기 전에 다 컷당했다.
그사이 수혁은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취를 감췄고.
모르는 얼굴이었다면, 아마 다른 병원 놈들의 농간인가 했을 터였다.
하지만 다 아는 얼굴이다.
이수혁 꼬시려고 하면서 저놈들 모르면 안 될 정도로 붙어 다니지 않던가?
그렇다 보니 지독한 우연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뭐지?”
그 우연히 벌써 세 번이다.
첫날만 그런 게 아니라 다음 날도 그랬다.
계속 비껴 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이게 다른 병원 얘기가 아니라 앰디 앤더스만 세었는데 세 번이다.
“술수 부리고 있는 거야.”
“어디서요?”
“어디긴. 태화지. 생각해 보니까 당연해. 저기 핵심이잖아, 이수혁이. 모르는 놈들이나 시스템, 시스템 거리는 거지, 저렇게 압도적인 놈이 있으면 다 필요 없다고.”
“하긴……. 내부에서는 모를 리가 없겠네요. 게다가 전직 원장, 현직 원장이 지금 수혁을 발굴한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이상…… 네가 희생해라.”
“네? 어.”
앰디 앤더슨 측이 먼저 용단을 내렸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팀장이 그랬다.
그는 팀원 둘을 차례로 밀어 넣어 지금까지 컷하던 인원들을 소모하고는, 본인은 그대로 달려 수혁을 잡았다.
“뭡니까?”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안대훈을 비롯한 보디가드들이 있어서 그랬다.
다행인 것은 이 중에서 제일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이 수혁이라는 점이었다.
아니, 생각은 있었다.
잘난 척하고 싶다는 생각.
[3시 방향 외국인 출현.]
‘굿, 좋아. 역시 자랑은 양놈이지.’
학회야말로 잘난 척의 향연이라 해도 좋은 곳이지 않나.
특히 이번 학회는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외국인이 참으로 많았더랬다.
당연히 영어로 씨불거리면서 자랑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마주치질 않았다.
아직 내 명성이 외국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구나 싶을 지경이었다.
뭐, 그럴 수 있는 사안이긴 했다.
암만 임상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이현종처럼 충격의 데뷔를 한 건 아니니까.
근데 마지막 날 외국인 하나가 숫제 돌진하듯 다가왔다.
이걸 놓쳐?
“대훈아, 잠시.”
“네? 교수님?”
대훈이 평소보다 예민하게 나선 이유가 없겠나.
-너 수혁이 외국 가 버리면 어쩔래.
-따라가얍죠. 구걸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 군대 가, 내년에.
-아.
군대……
군의관은 3년 2개월이나 가지 않나.
개월 수로 따지면 38개월…….
기나긴 시간이다.
레지던트 시절보다 더 기니 뭐 말 다 한 셈이지 않나.
그 시간 동안 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건 그래, 뭐 그럴 수 있다 쳤다.
하지만 그 때문에 수혁의 용안을 못 보게 된다?
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외국 분이시잖아. 자, 이쪽으로. 뭐 궁금한 게 있나요?”
하지만은 무슨 놈의 하지만이겠나.
수혁이 비키라는데.
지엄한 명령에 대훈은 바로 옆으로 섰다.
이현종이 입술로 저 병신이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하여간, 그렇게 스카우터 팀장은 비로소 수혁 앞에 설 수 있었다.
‘천금 같은 기회다…….’
팀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앰딘 앤더슨? 아, 암 주로 보시겠네.”
“네? 아, 네.”
수혁이 먼저 열지만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텐데……
귀한 고객이 먼저 말하고 있지 않나.
그러니 장단부터 맞춰야지 별수 있나, 뭐.
“암이라…… 최근에 제가 본 케이스가 이런 것이 있었죠. 들어 보시겠습니까?”
이미 수혁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하필 지하에서 연결되는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쪽이었다 보니 의자가 많아서 탈이었다.
“아, 네.”
안 들으면 당장 일어날 거 같았다.
‘차라리 잘됐지.’
마지막 날만 아니었으면 다음 기회를 노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지 않나?
아닌 게 아니라 다른 병원 놈들이 모두 부러워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해서 팀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하하. 외과 측에서는 전혀 다른 병을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그, 그렇군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의사가 아니거든.
아니, 의사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강의 듣는 게 쉬울 리는 없었다.
일단 쉬운 케이스도 아니고 헷갈리는 케이스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참자, 참자……. 20억이야. 거기에 집 렌트에 차까지 나온다…….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앰디 앤더슨.
택사스 휴스턴에 위치한 세계 유수의 병원.
사실 오기 전에는 휴스턴이 서울보다 큰 줄 알고 이것도 장점으로 넣으려 했다가, 서울의 어마어마한 위용에 눌려 이 생각은 접었다.
하지만 날씨는 어떤가?
좀 덥긴 해도 일 년 내내 온화한 날씨가 지속되는 휴스턴에 비해 이곳 서울은 위도가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닌데 꽃샘추위인지 지랄인지 때문에 얼어 뒤지는 줄 알았다.
‘집도 휴스턴에서 거의 제일 좋은 곳이야.’
거기에 더해 대한민국은 1인 거주 형태에 대해서는 럭셔리 주거 공간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그에 비해 미국은 흔하디흔하다.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 나쁘진 않다고 해도…….
-집중 안 하는데?
“저기, 듣고 있어요?”
“네? 아, 네. 그럼요.”
-구라 까는데?
“잘 들으셔야죠. 배워야 할 거 아닙니까. 저랑 이렇게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요.”
“네네.”
잠시 딴생각.
딴생각이라고는 해도 실은 업무에 관련한 생각이었더랬다.
하지만 갑이 그렇다면 그런 거 아니겠나.
팀장은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척을 했다.
바루다가 잠시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해서 다행이었다.
-양놈이라 그런가……. 표정 읽기가 좀 어렵네.
데이터가 덜 쌓여서 그랬다.
“자, 또 할까요?”
그렇게 20분가량이 흐르고 나서야 첫 번째 케이스가 끝났다.
그러고 나서도 수혁은 아쉬운 얼굴이었고, 그걸 본 이현종, 신현태는 좀 안심하게 되었다.
설마하니 어쌔신의 후손들의 마크를 뚫고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긴장했다가, 역시 수혁이가 생각보다 또라이이긴 하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랬다.
이대로 그냥 꺼지게 될 가능성도 엿보였다.
“그…… 시간 때문에 하나만.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하. 네. 저도 바쁩니다.”
첫 번째 듣는 것도 힘겨워 보였는데 두 번째까지?
버틸 수 있을까?
딱 보니까 의사도 아닌데.
이거까지 견디고 나면 뭐 얘기 정도 꺼내는 건 참아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지금 수혁이 떠들어 대고 있는 내용이 워낙에 빡센 내용이어서 더더욱 그랬다.
그쪽 전공하고 있는 의사라 해도 쉽지 않을 만한 내용을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고 있지 않나.
아마 상대가 의사가 아니라 일반인이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훨씬 들을 만하게 각색해서 떠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다 보니 아마 죽을 맛일 터였다.
‘살려 줘…….’
과연 그랬다.
팀장은 속으로 기도를 올리는 심정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정신 놓으면……
“CEA가 올라가 있었어요. 그러니 colon cancer로 인한 meta나 mass effect로 의심하는 것도 완전 우연은 아니죠?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camouflage라는 걸 알 수 있어요. cd 20이나 4 염색에서도 양성 소견은 없었고…….”
이 넘치는 전문 용어의 향연에 휩쓸려 갈 거 같아서 그랬다.
이게 고문이지 다른 게 고문인가 싶을 때쯤, 드디어 수혁이 설명을 마쳤다.
“어때요? 신기하죠?”
하도 당하다 보니 긍정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티칭 마인드가 좋다면, 교수로서도 훌륭해. 말 그대로 올라운더…….’
정신 승리에 불과하겠지만 원래 사람 상대하는 직업을 하려면 이런 종류의 정신 승리에 능해야 하는 법이었다.
해서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웃으며 입을 열 수 있었다.
“네, 정말 신기합니다.”
“자, 근데 어쩐 일이죠?”
그걸 참 빨리도 묻는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앰디 앤더슨 헤드헌터……?”
“네, 이수혁 교수님의 명성이 이제 북미 대륙에서도 자자합니다. 듣자니 태화 의료원 연봉이…… 부센터장 수당까지 다 해도 1.5억 정도 된다더군요. 저희가 제시할 연봉은 이렇습니다.”
대신 재빨리 종이부터 내밀었다.
종이엔 150만 달러에 성과금은 따로라고 적혀 있었다.
“허…….”
“거기에 더해 집과 차까지 다 나옵니다. 근무하시는 동안 무상으로 제공되고, 비자 발급부터 해서 정부 기관과 상대하는 일 모두 저희가 부담합니다.”
“아하…….”
이렇게까지 빠르게 말을 꺼내 나갈 줄은 몰랐던지라, 신현태, 이현종, 안대훈 그리고 하윤 등은 닭 쫓던 개처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봐도 조건이 좋긴 하다…….’
‘앰디 앤더슨…… 좋은 곳이지. 아들 생각하면 놔주는 게 맞을지도.’
‘교수님……. 저를 버리시나이까…….’
‘오빠……?’
뭐 구체적인 생각이야 다 다르겠지만 퉁치면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나같이 수혁을 보내기 싫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놈이지만 좋은 놈이니까.
“제일 중요한 조건이 빠졌는데요.”
그때 수혁이 말했고 주변인들은 가족? 친구? 애국? 사랑 등을 떠올렸다.
“네? 어떤? 애들 교육이요? 그것도 휴스턴 사립 학교…….”
“환자.”
“네?”
“어려운 케이스가 몇 갭니까.”
“아……. 그건, 그건 제가 잘 파악을.”
“허! 제일 중요한 것도 모르면서 나를 불러? 이곳 태화는 말입니다……. 전국에서 환자를 불러 모으고, 국제적으로도 환자를 불러 모으는 성의를 보이고 있어요!”
“아니, 그건…… 그건 일…… 일이잖아요.”
“일? 아니, 내겐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돌아가시죠. 불합격입니다.”
그리고 떠올렸다.
수혁이 진짜 또라이이긴 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