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200화 (1,200/1,303)

1200화 나 왜 똑똑하지 (2)

나이가 들면 쉽게 흥분하게 되지 않는 법이다.

또 흥분한다 해도 쉬이 가라앉는 법이기도 했다.

우창윤이 그랬다.

아마 평소보다 머리가 훨씬 시원한 상태인 것 또한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겠지만, 거기까진 아직까지도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확실히…… 선천성 갑상샘 기능 저하다, 저건. 이유식으로 넘어가면서 증상이 심해진 것도 있지만……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이 더 심해진 것도 있다고 봐야 해.’

우창윤은 이제 스테이션에 앉아 아까 봤던 아이가 있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다고 뭐가 딱히 보이는 건 아니었다.

아선 병원 소아과는 병실 문이 중앙 쪽으로 뚫린 채 쭉 나열된, 전형적인 병원 형태를 띠고 있어서 그랬다.

아니, 소아과뿐만이 아니라 아선 병원 전체가 그냥 그런 구조였다.

-너네는…… 좀 너무 촌스러워.

태화나 칠성 쪽 사람들이 이런 말 하는 것도 괜한 일은 아니었다.

이름도 서관, 본관, 동관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나.

나누는 것도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다 붙어 있으니까.

그에 비해 빅3의 다른 병원들은 참 세련됐다.

특히 태화의 암센터는 어디서 상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래 봐야 통유리 건물 특성상 관리비가 너무 많이 들다 보니 다시는 그딴 식으로 건물을 짓지 않기로 했다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내가 맞다. 하아.’

잠시 잡생각이 끼어들긴 했지만, 뭐가 되었건 우창윤은 환자의 진단명을 점검하고 또 점검한 끝에 자신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온 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기조실장의 위엄이 지엄하다 한들 12시가 가까워 오는 시각에 검사 결과가 띡띡 튀어나올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일단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우창윤의 머릿속에는 지금껏 봐 왔던 환자들의 모습이 잔뜩 담겨 있었다.

“흐음.”

그렇게 맞혔으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왜?

어려운 케이스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거든.

‘이거 그냥 들이밀면 어떻게 될까?’

5분 컷이다.

아니, 5분도 안 걸릴 수도 있다.

우창윤이 제아무리 천재면 뭐 하나?

수혁은 괴물인데.

그조차 진단해 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수혁이라면 뭐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교수님? 왜 한숨을 쉬세요?”

그런 우창윤을 보면서, 내과 레지던트는 걱정이 됐다.

아닌 게 아니라 사방에 위치한 모니터나 유리나 하여간, 뭐가 되었건 반사시키는 물건들을 잘 보고 있으면 우창윤의 머리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 양반이 이제야 자신의 상황을 알아차린 건가 싶었다.

절규하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조용히 절망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고.

“이것보다 어려운 케이스가 필요한데…….”

“네?”

헌데 튀어나오는 답은 그의 예상과는 너무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여기서 더 어려운 케이스를 원하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레지던트는 저도 모르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12시다.

이제부터는 빈말로도 이른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늦어 봐야 7시, 이르면 5시에 일과가 시작되는 대학 병원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당장 자러 간다고 해도 씻고 어쩌고 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최대 6시간, 적게는 4시간밖에 못 잔다.

심지어 레지던트는 당직…….

“아, 넌 가서 쉬어라.”

“아, 그게. 저는.”

그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낯빛이 어두워졌던 모양이었다.

우창윤도 눈치가 비상한 사람이다 보니 대번에 가 보라고 손짓했다.

‘어쩔까…….’

레지던트는 잠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내일에 대한 염려는 치워 두었다.

어차피 대학 병원이라는 곳은 우당탕탕 돌아가는 곳이지 않나.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다.

당장 이렇게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응급실에서 전화 와서 잠자러 가기는커녕 환자 보러 가야 할 수도 있었다.

‘난 개원이 꿈이지.’

그래서 다른 레지던트들이 모두 그러하듯, 행복을 수년 뒤로 유예하고 있는 그는 당연하다는 듯 의식을 저 멀리…….

대략 5년쯤 후로 보내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만큼 험악한 나날이 태반이다 보니 지나치다 싶을 만큼이나 반복해 온 과정이었다.

해서 이미 구체적인 상상을 끝마친 공간에서, 심지어 얼굴까지 어렴풋이 떠오르는 간호사와 페이 닥터들과 함께 잠깐이나마 진료를 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 꿈에 우창윤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일본이었다면, 그러니까 대학교수가 쇼군처럼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면 조심해야겠지만 대한민국은 그런 문화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개원하면 사실상 그걸로 끝이다.

일부 교수들이 개원한 선배한테도 자기가 무슨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함부로 대할 때도 있지만, 그걸 받아 주는 이유는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냥 찝찝해서라는 걸 교수를 제외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대 춤을 추는 나무 같아요.

-그 안에 투박한 음악은 나예요.

해서 인사를 건네고 딱 돌아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카더가든의 나무.

되게 좋아했던 노래인데……

응급실 콜을 받고부터는 이 대목만 들리면 머리가 아파 왔다.

“네, 당직입니다.”

지금도 그랬다.

헐레벌떡 뛰어가서 대강 씻고, 수술복 갈아입고 자려 했는데 전화가 온 마당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전화가 왔는데.

올 것이 왔는데.

“아……. 네. 볼게요. 어?”

해서 보겠다고 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돌아보니 우창윤이었다.

평소처럼 참으로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봐야 머리가 없다 보니, 진중한 상황도 종결된 상황이다 보니 그저 우습기만 했다.

‘읍.’

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입술 틈새가 조금이라도 벌어지면 눈치 없게 웃음만 새어 나올 것 같아서였다.

“같이 보지.”

“왜 말이 없어.”

“왜 그러나. 같이 보자니까? 응급실 가자구.”

스턴에서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시간이 지나서는 결코 아니었다.

더 큰 충격이 와서 그랬다.

‘응급실?’

안 될 말이다.

안 된다, 이건.

이런 몰골로 데려가는 건…….

아무리 내 미래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놈이라 해도 안 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 법이지 않겠나.

“화, 환자를 부르시죠.”

“응? 뭐 하러? 올 수 있는 컨디션이긴 해?”

“네, 네! 올 수 있습니다.”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우창윤의 대머리를 환자만 보는 게 어찌 되었건 옳은 일 아닐까?

“에이, 그래도…… 내려가는 게 낫지. 환자를 뭐 하러.”

“아니, 아닙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게……. 초음파도 바로 되고요.”

“초음파는 응급실에도 있어.”

레지던트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사람이 쓸데없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명의병 환자라는 걸 알았다.

이상하게 교수들 중 한 절반쯤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면 이렇게 되었다.

망할 놈들.

“으, 응급실 요새도 너무 혼잡하지 않습니까. 내분비내과 환자분이 계시기에는 좀…… 차라리 병동 처치실에 누워 계시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아…… 그건 그럴 수 있지. 뭐 나도 있으니, 그래. 그럼 부르자.”

“네!”

다행히 레지던트 생활하면서 이리저리 둘러대는 능력이 늘어서 그런가. 되는 대로 지껄였는데 그럴싸한 말을 할 수 있었다.

하여간, 환자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괜히 빅3라 불리겠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한데, 일단 병원부터 어마어마하게 거대했다.

그중에서도 아선은 제일 큰 병원이다 보니 자칫 위치 잘못 걸리면 몇십 분씩 걸릴 수도 있었다.

“일단 차트 열어 볼래?”

“네.”

그 시간을 그대로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나.

규모가 있는 병원이다 보니 응급실에서도 당연히 환자에 대한 대강의 진료는 하게끔 되어 있었다.

애초에 내과 당직의 하나가 응급실에 상주해 있기도 하고.

뭐…… 응급실이니만큼 정말 급한 환자들에게 힘을 쏟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본은 한다 이 말이었다.

“우리 병원 원래 다니던 환자는 아니네?”

“네, 그런 거 같습니다. 흐음…….”

“호흡곤란과 삼킴곤란이 있다……. 근데 왜 우리 과로 연락이 온 거야?”

“이비인후과에서 봤는데 기도 생긴 건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근데 환자가 과도한 비만으로 보인다고…….”

“비만이라 우리 과에 보냈어?”

우창윤은 잠시 어이가 없어서 하늘을 봤다.

아선 병원의 이비인후과……

태화에 줘 터지는 분야 중 하나이긴 했다.

내과도 같이 터지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기도 할 텐데, 같이 묶이는 건 좀 억울했다.

왜?

이수혁은 규격 외잖아.

그에 비해 이비인후과가 태화에 밀리고 있는 건 그냥 교수들이 자기 라인 형성해서 끌어 주고 밀어준 탓이었다.

딴 데가 너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이쪽이 병원 규모에 비해 역량이 딸린다는 얘기였다.

‘언제 한번 박살 내야지.’

레지던트는 우창윤 이마에 돋아난 핏줄을 향해 무심결에 손을 뻗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곤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 경직과 두통도 심하다고 하는데…….”

“다 우리 과랑 크게 상관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맞습니다.”

“과거력 더 봐 봐. 아…… 술을 좀 많이 드시네. 으음……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거 같은데.”

병원에 오면 기본적으로 술, 담배를 얼마나 하는지 묻지 않던가?

환자는 무려 매일 소주 두 병가량을 먹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최근 들어 복통 등으로 다른 병원 응급실에 내원한 적도 있다고 진술했다.

‘으음.’

우창윤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머리가 아파 와서 그랬다.

알코올…….

이런 정도로 남용하고 있다면 가능한 질환이 정말이지 몇 배는 늘어나게 되기에 그랬다.

‘아니, 잘된 건가? 이수혁에게 쏘기 딱 좋은 케이스인가?’

하지만 더 생각을 해 보니 굳이 그렇게 기분 나빠할 만한 일은 또 아닌 듯했다.

너무 어려우면 수혁을 부를 수 있지 않겠나.

“응? 자네는 왜 얼굴이 그래.”

해서 좀 표정을 풀고 레지던트를 바라보았더니 더없이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한 건가?’

레지던트는 그가 마침내 머리에 손을 댔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는데, 우창윤의 반응이 너무 일상적이다 보니 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쯤 되면 내 잘못은 아냐.’

아닌 게 아니라 처치실에도 유리는 있지 않나.

살짝만 봐도 어?

다 비쳐 보이는데 아직도 모른다면…….

아니, 어쩌면 오늘부터 그냥 대머리 개방하고 살려고 결심했을 수도 있었다.

원래 스스로 당당하게 되면 그건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레지던트는 저도 모르게 얼마 전 들었던 대머리라서 좋은 점 30가지를 흥얼거리며 환자 검사 결과를 띄웠다.

“약간 빈혈이 있고…… 간 수치는 높네. 간염보다는 그냥 지방간 때문인 거 같고.”

“네네.”

우창윤은 빠르게 결과를 훑었다.

그렇게 보고 있으려니 드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환자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창윤이나 레지던트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환자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와……. 거대하다.’

같은 환자를 마주한 참이었지만 레지던트가 할 수 있는 생각은 이 정도가 다였다.

그럼 우창윤은 달랐냐?

아주 달랐다.

‘아씨…….’

왠지 또 알 것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