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3화 와 이건 모르겠다 (2)
“아…….”
레지던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원래의 그였다면 감히 교수 앞에서 이러진 않았을 텐데…….
지금은 좀 힘들었다.
생긴 걸로 이미 한번 힘들게 하지 않았나.
근데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쉬지 못하고 환자를 보고 있으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었다.
‘1시…….’
1시다, 1시!
내일 치프랑 할 회진이 7시니까…….
‘지금 가서 씻고 누우면 5시간은 잔다.’
먼저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창윤 교수님 원래 대머리래요 라는 말로 운을 띄우면 분위기가 확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밤에 뭔 환자 봤는지, 혹시 병동 환자들 중엔 별일 없었는지 그런 게 뭐가 그리 궁금하겠나.
막말로 진짜 안 좋아지는 환자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내분비내과 병동은 우창윤이 관리하는 곳이다 보니 그런 일도 잘 없었다.
“어디로 갈까…….”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6시에 나와서 환자 파악하고 우창윤 머리가 이 지경이라는 사실은 숨기려고 했다.
헌데……. 이 양반이 자꾸 선을 넘고 있지 않나.
‘나 원망하지 마십쇼.’
어차피 CCTV에도 기록이 다 남았다.
한때, 그러니까 보호자나 친지의 병동 출입이 꽤 수월하던 시절엔 병동 물건이 심심치 않게 없어지곤 하지 않았나.
세상에 아픈 사람 물건 훔쳐 가면 찝찝하지도 않나 싶을 텐데…….
죽은 사람 유품에도 손대는 인간들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뭐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CCTV가 병원 복도마다 과장 좀 보태서 즐비할 지경이었다.
아선이야 칠성, 태화와 같이 수술방에도 일찌감치 CCTV를 잔뜩 달아 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갈까?”
그렇게 CCTV를 노려보고 있던 레지던트는 우창윤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살짝 무례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을 텐데 뭐 어쩌겠나.
어려운 환자 찾기라니…….
모르겠다.
솔직히 왜 알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막말로 지가 이수혁 교수야?
그 정도면 뭐 얼마든지 갖다 바칠 수 있을 터였다.
오죽하면 수혁교가 있겠어.
그의 카리스마는…….
-만민이 우러러볼 만하다.
태화에서 떠도는 말을 종합해 보면 딱 이렇지 않던가.
“돌림판을 돌려 볼까…….”
“네?”
“아니, 아닐세. 네이버 들어가 봐.”
“아……. 네.”
아무튼, 그렇게 서 있으려니 우창윤이 뭔가 이상한 단어를 내뱉었다.
뭐냐고 했더니 대단히 부끄러워하면서 네이버를 틀었다.
대한민국 대표 정보 검색 사이트 네이버.
전용 브라우저인 웨일을 사용하면 더더욱 편리하다.
“사다리 타자.”
“사다리…… 요?”
“그래. 환자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 게다가 우리 병원이 좀 크니? 본관만 있을 때도 맘모스 병원이라고 했었는데 이젠 본관만 한 서관에 동관까지 있어. 어떻게 헤매고 다니겠어. 이 새벽에.”
그러니까 오늘은 자고 내일부터 환자 찾으러 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기조실장님이 각과 과장님들에게 연락을 돌리면 그래도 찾는 시늉은 해 봄 직할 텐데…….
뭐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레지던트는 이미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노예근성에 의해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사다리를 검색했다.
우창윤은 그렇게 뜬 사다리 게임에 하나하나 과를 넣었다.
외과, 소아과, 응급실, 중환자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참 고민하다가 내과를 넣었다.
레지던트는 내과를 각 분과별로 나누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괜히 이런저런 의견 냈다가는 흥이 더 나서 아예 밤을 지새울 것 같아서 닥치고 있었다.
“좋아, 좋아. 오늘 아주 좋은 날이야.”
지금도 봐라.
별 자극도 없이 혼자 신나 가지고 손바닥 비비면서…….
‘아니, 술을 먹고 온 건가?’
그런가?
그러고 보니 맨정신에 가발을 왜 까먹는단 말인가.
의심을 불태우려는데 우창윤이 딸깍 소리와 함께 게임을 시작했다.
과연 국내 최고를 넘어 세계 최고 IT 회사를 꿈꾸는 기업이 만든 게임이라 그런가. 사다리 타는 것도 빨랐다.
결과는 찰나의 순간에 떴다.
“내과…… 으음. 내과에 어려운 환자가 남아 있나?”
그 결과가 딱히 마음에 들어 보이진 않았다.
사실 레지던트도 그랬다.
‘없으면 관두려나……?’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마치 2차, 3차 강요하는 과장처럼 환자를 강요하고 있었다.
‘미친…….’
이거 아선 인트라넷에 올리면 어떻게 될까.
의외로 별일 없을 거 같다.
왜?
의사가 환자 보는 게 너무 힘들고 싫다고 하는 게……. 이게 사회 통념상 좀 그렇잖아.
따지고 보면 진료 행위도 일종의 직업 활동이다 보니 정도 이상을 요구하면 안 되는 것 같은데…….
사회 통념뿐만 아니라 그냥 의사들끼리도 다르게 느끼고 있는 게 한이었다.
‘힘든데 힘들다고 말도 못 하네.’
게다가 지금 레지던트는 전공의 특별법에 의해 주 88시간 이하로만 일을 시킬 수 있었다.
주 69시간도 살인적인 스케줄이라는 걸 감안하면 주 88시간이라는 건 어떤 미친놈의 발상인가 싶을 텐데, 실제로 이 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평균 100시간에서 120시간 일했다고 한다.
이비인후과 쪽은 더해서 140시간도 일해 본 적이 있다고 하는데, 레지던트는 이걸 자신이 왜 알고 있는지 깜짝 놀다가 말고 우창윤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에게는 밤새우는 게 일상이겠지.’
그보다 한참 전에 레지전트를 한 우창윤은 대체 어땠겠나.
업무 외에도 담배 심부름에 교수님 김치 담그면 김장에 각종 운전에…….
별 그지 같은 잡일에 시달렸을 터였다.
아마 그 잡일 시킬 때도 별생각이 없을 거 같은데, 환자 보자는데 힘들어서 싫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아……. 뭔가 당당히 요구해도 될 일인 거 같은데 요구하면 병신 취급당할 거 같다…….’
저는 먼저 가서 자 보겠습니다.
제 밤은 교수님의 밤보다 아무래도 험악하고 길 것 같으니까요.
라는 말 따위는 내뱉을 생각조차 못 한 채로 우창윤을 따라나섰다.
뭐라뭐라 하면서 일어난 거 같은데, 그건 못 들었다.
“감염내과로 가 보지. 칠성보다는 낫겠지만……. 우리 감염내과도 요새 좀 약하지?”
“네? 아……. 칠성하고 비교하는 건 그래도 좀…….”
“그래, 그건 실언이네. 거기 교수님들한테 얘기하진 마라.”
“네, 물론이죠.”
아까까지만 해도 댁 대머리라는 것도 비밀로 하려고 했습니다.
레지던트는 기왕 비뚤어지기로 한 김에 마음껏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속으로.
겉으로 이랬다가는 말 그대로 내과 전문의는 물 건너간 일이 되지 않겠나.
우창윤 같은 교수들이 누굴 도와주려고 한다면 그건 미심쩍어해도 되겠지만, 말 그대로 X 되게 만들려고 마음먹으면 꽤 신뢰할 만했다.
“아무튼, 여길 좀 볼까. 흐음……. 컴파트먼트 신드롬 의증?”
compartment sd.
구획증후군이라는 병인데, 근육 쪽에 염증이 생기면 드물게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었다.
염증이 생기면 그 부위가 붓지 않나?
피부만 부어도 되게 아픈데…….
안이 부으면 기능이 비슷한 근육을 묶어 주는 막에 갇힌 채 부피가 자꾸 커지다 보니 안에 있는 기관들이 싹 다 눌리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 기관 중에는 혈관도 있는데 이게 문제였다.
피가 안 통하니 다른 멀쩡했던 부위가 썩어 가기 때문이었다.
그냥 멀쩡하던 기관이 썩어도 문젠데 이건 애초에 염증, 곧 감염이 있던 부위 근처가 썩는 것이다 보니 세균 밥이 되기 일수였다.
“여자 환자고 나이가 50세입니다. 아……. 진단명만 그렇게 붙어 있고, 실제로는 감염 징후가 전혀 없는 거 같은데요?”
아무튼, 드물지만 대학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꽤나 볼 수 있는 질환이다 보니 레지던트도 흥미가 동했다.
원래 아는 게 제일 재밌는 법이었다.
우창윤처럼 아는 게 많고 모르는 게 확실히 더 적어지면 반대가 될 테지만 레지던트는 아직 아는 게 거의 없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어디 봐 봐.”
게다가 지금 이 우창윤의 끝 모를 진료 여행이 어쩐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지 않나?
케이스 찾는 게 지옥일 것 같았는데 여기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네, 여기.”
원래 의증이 붙으면 잘 모르겠단 뜻이나 매한가지였다.
레지던트는 후후 웃으며, 아, 속으로 웃으며 차트를 열었다.
“그렇네. 열도 없었어. 하지만……. 심박동수가 엄청 증가했었네. 뭐야, 외래 통해서 왔다가 응급실 경유로 입원시켰구나? 일반의가 보고……. 흠. 감이 좋네, 이 친구.”
감염 여부를 판단할 때 있어서 열은 아주 중요한 지표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열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럴 땐 다른 바이털을 보고, 이상하다 싶으면 좀 예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레지던트다 보니 겁이 나서 민감하게 움직인 것도 있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우창윤은 마음에 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혈압도 높고. 흐음……. 우측 허벅지에 통증이 주된 증상이었구나. 흐음…….”
“허벅지는 근데…….”
“그래. 구획 증후군이 호발하는 위치는 아니야.”
뭐, 생기려면야 얼마든지 생길 수 있긴 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감염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부상으로 인한 감염이 잘 발생할 수 있는 종아리나 팔뚝 부위가 훨씬 흔했다.
아니면 차라리 이물질로 인한 상처가 생길 수 있는 경부가 더 흔할 수도 있고.
“뭐 영상 안 찍었나?”
“네, 아.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내일.”
“내일?”
“아, 오늘 6시입니다. 회진 전에 찍을 예정인 듯합니다. 입원 일자가 어제입니다.”
“아하. 흐음.”
어쩐지 기록이 아주 세밀하지는 않다 싶었다.
아무튼, 우창윤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턱 밑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왜?
잘 모르겠으니까.
“환자 주무시려나?”
“아무래도……. 그러지 않을까요?”
새벽 1시 20분.
병원 아니라 밖에 사람들도 대개 잠들 만한 시간이었다.
‘내가 깨우는 게 의미가 있을까?’
가서 깨우고 잠만 방해하는 거 아닐까?
-아선 병원 진짜 이상한 병원이네요. 굳이 와서 깨우고 가서……. 아휴. 불친절합니다!
고객의 목소리가 날아오는 거 아닐까?
‘아니, 아냐. 오늘 나는…… 강하다.’
걱정은 잠시뿐이었다.
소아과에서 맞힌 거, 그래.
그건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던 질환이라고 치자.
하지만 마델룽 병은…….
암만 우창윤이라 해도 컨디션에 따라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는 병이었다.
사실 케이스 리포트로나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우창윤 또한 처음이지 않았나?
“가자.”
“네? 지금요?”
“그래, 가서 깨우자.”
“아니……. 지금. 어…….”
“환자도 빨리 진단되면 좋지 않겠어?”
“그, 그건 그렇긴 한데…….”
레지던트는 아무리 진단이 되어도 밤에 깨우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교수가 이렇게 나오는데.
아닌 게 아니라 벌써 병동 간호사 중 하나가 길 안내를 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창윤이 기조실장이라는 걸 알아서는 아닐 터였다.
그냥 새벽에 돌아다니는 시니어 교수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서일 게 뻔했다.
“이쪽입니다, 교수님.”
아니, 눈을 보니까 그것도 아니었다.
‘조, 존경하지 마……. 이 사람 그냥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신규라서 그럴까?
몇 개 남지도 않은 머리 휘날리면서 오가는 이가 멋져 보이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