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화 다음은 조태진 너다 (1)
이현종의 설명은 간결하고도 명확했다.
뭐, 요약하면 에베롤리무스가 열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걸 아무도 모른다는 내용이 거의 다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래도 말하는 사람이 이현종이라는 희대의 걸물이다 보니 받아들이는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대단한 시간으로만 느껴지긴 했겠지만…….
아무튼, 환자가 살아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간 이식받아서 몸이 힘든데 거기에다 대고 항생제 맞으면 어떻게 되겠나.
게다가 약물 거부 반응이 있는 건데 그 약물을 안 끊고 계속 맞으면 뭐…….
죽음이 눈앞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드물디드문 부작용,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 그 부작용을 아는 이가 몇 없는 부작용이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좋아.”
“이것으로 감염내과……. 할 일이 없겠군요.”
거기에 더해 수혁과 이현종은 서로 힘을 합쳐 두 건의 불명열을 더 해결해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들의 처방까지 다 내 버렸다.
적어도 오늘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는 할 일이 거의 없을 터였다.
주치의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처방만 낸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진단 및 치료 계획까지 다 세워 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후.”
“후후후후후.”
수혁과 이현종은 서로를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게…… 즐거운 일인가?’
그에 비해 이민정은 조금씩 헷갈리고 있었다.
남들 일할 거 다 없애 버린 게…… 나쁜 일인가?
‘왜 이렇게 악당처럼 웃고 계시지?’
뭐 정말 좋은 마음으로, 힘들어하는 레지던트, 교수 일을 줄여 줘서 웃고 있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같이 힘든 대학 병원에서 그런 마음을 품게 된다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긴 한데…….
그래도 뭐 납득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이 사람들…….
‘환자 못 보게 되면 슬퍼할 거란 생각을…….’
뭐, 평생 환자를 못 보게 되는 거라면 슬플 것 같긴 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좋지 않나?
“이민정 선생, 다 자네 덕분이야!”
“그러니까! 나중에 센터 올 거야?”
“아, 아아. 네네네!”
고민하고 있는데 둘 다 살짝 가 버린 눈으로 이민정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어쩌나.
동의를 구하는 두 사람이 암만 미친놈들이라고 해도 높은 미친놈들인데.
심지어 더 높은 사람들도 이 둘의 똘끼를 무척이나 지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말 그대로 앞날이 창창한 또라이들이다 이건데…….
‘어려운 일도 아니지.’
이민정 선생은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잘사는 집안 출신은 아니지만, 교수를 꿈꾸고 있었다.
이전엔 솔직히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사실 의대 교수가 그나마 제일 공정한 과정을 거쳐 교수에 임용되는 곳이긴 했다.
우수성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 더없이 객관적이어서 그랬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교수가 되기까지 버틸 수 있는 의지가 있냐, 이건데…….
보통 그 의지를 만들어 주는 것은 본인의 재능과 열정이라고 해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재력이기에 끝까지 버티는 사람 태반은 소위 말하는 있는 집 자식인 경우가 많았다.
교수야 모양 빠지니 그런 소리 안 한다 해도 어설프게 펠로우 하고 있거나 레지던트 고연차인 사람들은 서슴없이 너네 집은 여유 있는 편이 아니니 포기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곤 했다.
‘이수혁 교수님…….’
그걸 뒤집어엎은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사내였다.
딱 봐서는 별로 특출난 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키가 크지도, 얼굴이 유별나게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귀티가 좔좔 흐르는 것도 아닌 평범에서 좀 나은 수준의 사람이다.
그것도 교수가 되면서 아우라가 뿜어 나와 생긴 멋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럼에도 실력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이민정이야 수혁도 아니고, 바루다도 없으니 저기까지 가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교수…… 태화 의료원 아니더라도 다른 곳의 교수 정도는…….
“가자!”
“조태진 타도하러 가자!”
“네!”
그런 생각을 하고 났더니 어쩐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점점 더 즐거워지고 있었다.
이 정도로 돌아 버려야 교수가 될 수 있고, 또 한 획을 남길 수 있단 생각도 들고…….
또 두 명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 난리 법석을 떨고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어린 사람인 이민정으로서는 영향을 안 받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덩달아 신난 이민정 선생까지 해서 세 명이 룰루랄라 들이닥친 곳은 당연하게도 혈액종양내과였다.
“어…….”
“무슨…….”
혈액종양내과.
이름이 좀 낯설 텐데, 알고 보면 내과의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다른 질환도 아니고 암을 다루는 곳이지 않나.
현대 의학에 대표적인 화두라 하면 노화, 치매 등도 있기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암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질환이라고 봐야 할 터였다.
실제로 암센터가 따로 존재하는 병원도 엄청 많지 않나.
태화 의료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렇다 보니 당연히 교수 수도 가장 많은 과가 바로 혈액종양내과였다.
감염내과처럼 모든 교수를 ‘배제’할 수 없었다는 얘기가 되었다.
“여긴 어쩐 일…….”
“우리 뭐 부른 거 있어?”
“병동 투어 중이신가?”
그렇다 보니 병동에도 회진 준비 중이던 교수가 둘이나 있었다.
그 뒤로 레지던트들이 줄줄이 서 있었고.
물론 그렇게까지 놀라진 않았다.
원래 통합센터 놈들이야 이런저런 이유로 왔다 갔다 하는 놈들이지 않나.
그중에서도 특히 혈종은 뭐……. 맛집 취급을 받고 있었다.
말이 좀 그렇긴 한데 이 두 놈의 타깃이 되는 환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담당 교수들도 딱히 꺼려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암이 아니라 다른 질환이었던 경우가 왕왕 있어서 그랬다.
-가,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걸 구원이란 말 외에 달리 무슨 말을 쓸 수 있을까.
암…….
일평생 암을 정복하겠노라, 또는 암 환자들의 곁을 지키겠노라는 선언과 함께 들어온 혈액종양내과 교수들에게 암이란 역설적으로 가장 무서운 질환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사실 너무 오래 살게 되어서 생기는 병이다 보니 아직까지는 정복은커녕 당하고만 있기에 그랬다.
그런 와중에 암이 아니었던 환자들이 나오는 건 정말이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흐음. 이민정 선생?”
“네. 모두 파악하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 환자가 한둘인가, 여기.”
혈액종양내과에는 입원 환자만 해도 바야흐로 수백에 달했다.
태화 의료원이 개원한 이래 지속적으로 병동을 늘려 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입원 필요한 암 환자들 중 절반이 집에서 지냈을 거란 말이 있을 정도로, 암 환자는 정말 많았다.
그렇다 보니 이민정 혼자 환자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면 됐다.
“같이 보고 다 털자고.”
“네!”
“아예 처방까지 다 내야지. 흐흐.”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아무튼, 일행은 턴다느니, 처방을 다 낸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놈들이었다면 이런 대화를 듣자마자 뭐라고 했을 텐데.
통합진료센터 놈들 이상한 거야 뭐 하루 이틀 된 일은 아니지 않나.
그렇다 보니 바로 옆에서 들은 사람들마저 뭐라 하기는커녕 그냥 오늘도 재밌게 사는구나,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뭐 이딴 말이나 하면서 각자 할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덕분이라고 해도 될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일행은 컴퓨터 하나씩 잡고 환자 파악에 돌입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사실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 교수님. 방금 처방 내신 거…….”
“네네. 그거 맞아요.”
“아…….”
“따로 말할 필요 없어요. 저 이수혁입니다.”
“아, 네. 교수님.”
파악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진짜로 처방도 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환자 얼굴도 안 보고 처방 낼 수 있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가능한 것이 현대 의학이었다.
당연히 봐야 하는 경우가 더 많긴 한데, 태화 의료원은 내부 기준이 보건복지부나 국제 의료 평가 기관인 JCI 기준보다 빡세기 때문에 기록이 진짜 미친 수준이었다.
거기에 더해 과거력도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에 그냥 기록만으로도 파악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특히 수혁과 이현종이라면 뭐…….
“어……. 교수님?”
“뭐.”
“아닙니다.”
둘은 깡패처럼 입원 환자의 대략 절반 정도 되는 환자들의 처방을 내려 버렸다.
다음 날 처방까지 내렸는데,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다음 날 처방은 보류 단계에 머물러 있게 만들어 두긴 했다.
그렇다 해도 놀랄 노 자라 할 수 있었다.
혈종은 암 환자들을 보고, 암 환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상태가 변하는 환자들이 많아 당일 추가 처방이 밤에도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이놈들이 그걸 다 내리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죠?”
보다 못한 신규가 물었고, 시니어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
그리고 뒤에 있던 수간호사는 숫제 미소를 지었다.
“잘된 거 아냐? 처방 빨리 확정되면 좋지. 일 빨리 끝내 버리고 쉬면 좋잖아.”
“그래도 저분들…….”
“아, 너 신규지. 저분들 천재야. 그냥 믿으면 돼. 오늘은 좀 심한 거 같긴 한데…….”
그렇게 신규 간호사를 안심시킨 수간호사는 수혁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정말이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 환자 파악을 하고 처방을 내는가 싶더니 이제는 다들 한군데 모여 있었다.
뭐 하나 하고 엿들어 보니 직접 보러 갈 만한 환자에 대한 토의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일단 암 환자인데 불명열이 있는 환자들이 6명이나 있어요.”
“어휴. 그럼 안 되지. 다 봐야겠네.”
“그리고…… 신규 진단된 환자들이 20명이 넘어요.”
“대개는 진짜 그 암이겠지만, 알 수 없는 일이지. 다 봐야겠어.”
“그리고……. 재발 의심되어서 입원한 환자도 10명…… 아이고. 뭔 환자가 이렇게 많지?”
“그게 혈종이지. 괜히 내과의 꽃이겠어? 아무튼, 그분들도 다 봐야지. 재발 아닌데 삽질하고 있는 거면 어쩌냐.”
수혁은 이현종의 답을 들으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이미 본 환자가 절반이 넘고 또 여기서 거른 환자도 남은 환자의 절반이 넘는데도 직접 봐야 할 환자가 수십이다.
어지간한 병동 전체 환자 수와 비슷하다 이 말이었다.
그만큼, 한 층에 다 있지도 않았다.
“찢어질까.”
“네.”
“저는…….”
“넌 여기 있어.”
“어, 그래. 여기 있다가 전화하면 오든지 처방 넣든지 해라.”
“아……. 네, 교수님!”
해서 수혁과 이현종은 각기 위치를 정해 이동했다.
이민정은 방금 말했던 것처럼 메인 병동에 남았다.
나름 짜임새 있게 움직이고 있다, 이 뜻인데…….
수혁이 일단 발길을 들인 병실은 이번에 새로 진단받은 환자가 있는 곳이었다.
‘어떠려나……. 암이 아닌 걸로 판별이 되면 좋겠는데.’
[그럴 때마다 수혁의 엔돌핀이 펑펑 솟죠. 저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