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9화 뒤지게 굴린다 (3)
-사실 아빠 논문 다 봐서 아는데……. 모르는 척해 드린 거예요. 아시죠?
이현종은 손가락을 굴리면서 아까 수혁이 집에 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놈이 이딴 소리 했다면 구라 치지 말라고 했을 터였다.
아니…….
그전에 뒤통수 날렸을 거다.
그 논문 그거 제약사 로비 때문에 좋은 데 실리지도 못하지 않았나?
거기에 더해 이후로 단 한 번도 동일한 케이스가 보고되지 않아 거의 사장될 뻔한 논문이기도 했다.
역으로 너 어디서 돈 받고 이런 사기를 치냐는 둥 하면서 지랄을 하더라니까?
‘내가 이현종이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후에 이현종이 순환기내과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명성을 얻게 되고 나서야 재조명이 되긴 했는데, 그때는 이미 떡밥 한 바퀴 수준이 아니라 돌고 또 돌리고 한 상황이었다 보니 약전에 한 줄 추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더랬다.
그런 논문을 어디서 찾아서 보겠나, 보통 사람이.
하지만 수혁은 보통 놈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들이다, 아들.
‘녀석이……. 그 훌륭한 몸이 거의 20년 가까이 된, 내가 낸 논문을 다 찾아서 봤어.’
거참…….
아는 사람은 다 알 텐데, 이현종은 의학과 결혼한 사람이다.
이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의학의 역사에 의미 있는 문장이나 단어 하나 더 덧붙이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허나 나이가 들다 보니 이런 아쉬움이 생겼다.
내 이 우수한 성질을 이을 아이가 하나 없다는 거…….
따지고 보면 본능의 영역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성이 개입할 여지가 적은 문제 아닌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이현종은 가정 대신 의학을 택해서 얻은 것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기회비용을 지불한 대가를 톡톡히 얻어 내고 있다는 건데,
세계 최고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합리적인 인간조차 가끔 찾아오는 본능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조금 괴로웠다.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은 수혁이다.’
그걸 채워 준 것이 수혁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수한 제자 정도였다.
사실 지금까지 이현종이 키워 낸 제자들이 뭐 한둘은 아니지 않나?
그중 하나였다가, 우수한 축에 속하는 녀석이 되었다가, 가장 우수한 녀석이 되었다가…….
언제였더라.
‘그래, 그때.’
다른 병원 놈들이 갑자기 수혁이에게 들러붙어서 꼬시기 시작했을 때.
우창윤, 박국진 그리고 되도 않는 것들…….
그때 알았다.
수혁이를 향한 마음이 단순히 스승이 제자를 바라보는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순간에 부모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걸.
냉정히 판단하건대, 그 저변에는 아마 수혁이 고아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있을 것이고, 그 와중에 사고를 당한 것이 딱해서도 있었을 터였다.
-내 아들, 내가 내 손으로 교수 만들 거야!
허나 이 선언을 했을 때야 비로소 수혁이를 진짜 아들로 바라보게 되었더랬다.
이후, 이현종이 혼자 지새우던 밤에 나이가 들어 갈수록 빈도를 높여 가며 찾아오던 허무함과 어떤 괴로움이 부쩍 줄었다.
물론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현종의 머리는 너무 우수해서, 제아무리 수혁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라고 해도 실은 친아들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기에 그랬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헌데…….
‘내 논문을……. 어린 시절 썼던 보잘것없던 논문까지 다 찾아서 읽는 아들이 있다.’
이건 순전히 느낌일 뿐이다.
이성으로 살아왔고, 또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계 최고의 명의란 말이 실로 아깝지 않을 이현종이 할 만한 말은 아니다.
허나 어쩌나.
마치 날 때부터 품고 있던 생각처럼 뇌리에 박혀 버렸는데.
‘친아들보다 더 소중한 아들…….’
그놈이 아프다.
뭐, 기껏해야 편도염이긴 하다.
아까 미친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호들갑 떨 이유는 없다, 이 말이다.
하지만 뭐가 되었건 마음이 아프다.
뭐라도 해야 될 것 같다.
“아.”
그런 생각 때문일까?
그건 아닐 거다.
무슨 만화도 아니고, 열정 하나로 모르던 걸 알게 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실제로 이현종은 최근 더 공부를 열심히, 다양하게 하고 있었고 이번 것도 그 결과라 봐야 할 터였다.
‘조태진……. 이 새끼도 많이 늘었네.’
딱 듣자마자 알아차릴 줄이야.
원래도 열심히 하던 놈이긴 한데…….
아무래도 수혁이랑 친해지면서 더 열심히 하는 듯했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과가 바로 나지는 않는 분야 중 하나라는 걸 감안하면, 교수가 된 후로 연구가 아닌 임상 쪽으로 꾸준히 열심을 내는 게 정말이지 쉬운 일인데…….
‘수혁이가 우리 모두의 기폭제로구만그래.’
이현종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의자를 휙 돌려 뒤에 서 있던 이들을 돌아보았다.
펠로우, 임상 강사, 레지던트 그리고 김승규가 보였다.
‘이 새낀 왜 안 가?’
덕분에 살짝 움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심장이 뛰고 죽을 것 같진 않았다.
김승규의 얼굴이 호감상으로 변해서는 아니었다.
그럴 일이 있겠나?
‘절대’라는 말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지만 김승규의 얼굴에 대해서만큼은 써도 된다.
그보다는 피붙이보다 더한 이수혁이라는 아들이 있다는 든든함이 더 클 터였다.
“자……. 이 환자의 주된 증세가 뭐지?”
“저림 증세입니다!”
“그래. 한쪽 팔만 저려. 그렇지만 팔 전체가 저리고, 모터도 영향을 받고 있어. 그럼 어디에 문제가 일어났다고 봐야 하지?”
“디스크 쪽이나, 상완 신경총 쪽입니다. 적어도 팔 자체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이현종의 질문에 펠로우, 임상 강사들이 돌아가면서 답하고 있었다.
이현종은 그런 녀석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는데, 아쉽게도 지금 당장 답을 아는 듯한 놈은 없었다.
안대훈마저 그랬다.
우하윤?
유망주지만……. 아직은 확실히 달린다.
“그래, 그럼 영상에서 거길 열심히 봐야지. 어때?”
“그렇지 않아도 이상했습니다. 재발이라고 하면…… 종양이 보여야 하는데, 확실히 우측 신경 상완총 쪽으로 PET CT에서 업테이크가 증가해 있긴 하지만, 뚜렷한 종양이라기보다는…….”
뭐, 그래도 유망주는 유망주였다.
PET CT를 보면 아마 태반은 ‘아, 여기 재발했구나’ 할 게 분명했다.
노련한 의사들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긴 할 거다.
핵의학과 전문의, 곧 이걸 판독할 사람들도 다르긴 할 것이고.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종양이 아닌 다른 것을 떠올린다는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보이지?”
“염증……? 근데 잘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종양이 있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핵의학 검사들은 흐음……. 좀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요.”
“그렇긴 하지.”
CT나 MRI와 같은 영상의학 검사들도 사실 어떤 장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기보다는 그림자를 보여 주는 거 아닌가.
물론 두 검사 모두 처음 나왔을 때보다 하드웨어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거쳐 왔고, 프로토콜과 같은 소프트웨어 쪽으로도 많은 발전을 거쳐 온 덕에 이전보다는 훨씬 더 실제에 가까운 이미지를 잡아내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모자라다.
근데 핵의학?
영상의학에서 못 보는 걸 볼 수 있는 검사긴 하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해상도를 희생했기 때문에, 해당과 전문의가 아닌 사람에게는 애매해 보이는 부분이 크다.
“그럼 네 의견은 뭐지?”
하윤은 음……. 하고 턱을 두드리다가 이내 답했다.
‘오빠라면…….’
수혁을 생각하면서였다.
진짜 신이라면 이럴 때 뭔가 딱 떠오르는 게 있을 텐데.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그저 아까 수혁이 먹다가 뭐 흘린 것뿐이었다.
‘에이…….’
미소가 나오려다가, 말았다.
이현종이 비로소 눈에 들어와서였다.
“모르겠어요. 일단 영상을 좀 더 봐야…….”
“그래, 뭐……. 1년 차니까.”
거기에 더해 이현종의 실망한 듯한 말투가 표정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뭔가 더 떠오르는 건 없었다.
원래 그렇다.
간절하게 바랄 때 뭐라도 이루어지는 건, 그 찰나의 간절함 덕이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작은 간절함 덕분이니까.
“2년 차들. 니네는 뭐 없어?”
“으음……. 저도 하윤이 생각에 동의합니다.”
“넌.”
“저도…….”
“너, 대머리. 너는?”
“크윽……. 소인도……. 전혀…….”
기분이 좀 나아진 것은 2년 차들조차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다른 분과면 좀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전문의를 딴 마당이다 보니 1년 차, 2년 차의 차이가 아주 크진 않을 수도 있어서 그랬다.
하지만…….
여긴 아니다.
미친 곳이니까.
안대훈, 김인수 아니라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지는 장종원도 막상 만나서 얘기해 보면 미친놈이었다.
“에이, 그럼 성진이. 너는?”
“으음……. 저도 이게. 죄송합니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그럼 레지던트들. 니네 중에는 뭐 없어?”
김성진마저 침몰했다.
센터 햇수로는 2년 차로 안대훈 등과 동급이지만, 그 전에 감염내과 펠로우를 몇 년 더 하지 않았나.
그렇다 보니 다른 분야에서는 평범한 2년 차 수준이라 해도, 감염 쪽은 상당했다.
허나 그도 모른다.
이쯤 되니 우하윤은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 질문을 받은 레지던트들 또한 그랬다.
아니, 윗사람들도 지금 하나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아나?
덕분에 다소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있었다.
이현종은 그런 꼴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하나도 모르네. 그래, 역시 오늘처럼 많이 배워야겠어. 불만 있는 사람 있나?”
“아닙니다! 없습니다!”
이현종이 지금이야 대가고 권위자지만 원래는 언더독이지 않았나.
위기를 기회로 바꿀 줄 안다, 이 말이었다.
“그래, 자식들. 자, 이건 케이스를 잘 봐야 해. 지금 무슨 약을 쓰고 있지?”
“Nivolumab(니볼루맙)입니다!”
“그래. mab 시리즈니까, 표적 치료제지? 그러니 아무래도 이전 것들보다는 부작용이 적겠지?”
“네, 확실히…….”
검사 결과만 봐도 알겠다.
전처럼 면역 팍 죽이는 일은 없었다.
뭐, 그래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여전히 부작용은 있어. 그중에서도 이렇게 상대적으로 오래 써 버리면 더하지.”
“그럼 설마?”
“그래. 간혹 길랭바레를 일으킨다는 보고가 있어. 뭐……. 이렇게 상완 신경총을 건드렸다는 케이스 리포트는 없지만, 기전을 보면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부분이 있지.”
“이거……. 탈수초성 신경병증을 일으키는군요?”
지금 답하는 건 안대훈이다.
미친놈이다, 역시.
아직 핵심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딱딱 알아맞히고 있다.
‘이놈을 중심으로 잘만 하면 진짜 센터는 딱 자리가 잡을 것 같은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군필이 아니라는 점이다.
군대를 가야 한다 이건데…….
그나마 가까운 곳, 수도 병원으로 가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여기 같이 있는 거랑 같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 맞아. 그럼 해결책은?”
“약 교체하고, 스테로이드 치료 시작합니다.”
“그래, 그렇지. 그렇게 의견 줘.”
“네!”
그러한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군대 가야 할 사람인 안대훈은 씩씩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