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244화 (1,244/1,303)

1244화 여름 (3)

“비장…… 이요?”

비장?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의료인도 아닌데 내부 장기를 다 꿰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뭐 얼마나 있겠나.

환자의 얼굴에 의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 또한 뭔 소린가 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재빨리 환자의 동의를 구한 안대훈 일당들이 대강의 질환명을 말해 줬기 때문이었다.

‘췌장암으로 왔다면서……?’

‘근데 웬 비장? 비장이 뭔데?’

‘그……. 간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왼쪽 배에 있는 거 아닌가?’

‘어떻게 알아?’

‘우리 애 책 보다가 봤지. 요새 책 잘 나오더라. 별거 다 나와.’

‘오……. 췌장은 그럼 어디에 있는 건데?’

‘명치 아냐?’

‘오 그럼 이게 췌장인가?’

아까처럼 소리 내어 수군대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뭣도 모를 때야 복도에서 진료하는 게 신기해서라도 이리저리 말을 보태었지만, 췌장암 아닌가.

의학에 완전 문외한이라 해도 췌장암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걸리면 죽는다는 말도 있지 않나.

이제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엔 긍정적인 결과도 슬슬 나오고 있지만, 이건 오히려 의학계에서나 통하는 말이었다.

세간에 박힌 편견은 대개 수십 년까지도 버티기 마련이기에 그랬다.

일례로 항암 치료하면 무조건 머리가 다 빠지고, 골수 억제가 된다는 이미지 또한 이미 거기서 몇 세대 지난 항암제가 나오고 있는데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네. 비장이라는 장기는 왼쪽에 위치한 장기인데요.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대개 쓸모가 다한 혈구 세포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혈구 세포란 혈액 내에 있는 적혈구나 백혈구와 같은 세포를 말하는 건데, 얘네들 각각마다 정해진 수명이라는 게 있거든요.”

“아……. 그럼 뭐……. 약간 무덤 같은 곳인가요?”

“오, 그 표현 좋은데요?”

환자는 뭐가 되었건 아까보다는 확실히 표정이 좋아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혁이 암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비장이 뭔진 몰라도……. 암보단 훨씬 나을 거 아닌가.

무엇보다 수혁을 비롯해서 주변에 있던 의사들의 얼굴 또한 조금 달라진 상황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걸?

꼭 짚어서 말하는 건 어렵겠지만, 아무튼, 뭔가 좋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혈구 세포의 무덤 같은 곳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피가 아주 많이 몰리는 곳이죠. 흔히 간을 핏덩이라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비장이야말로 핏덩이예요.”

그런 게 아니라면, 눈앞의 이 교수가 이처럼 여유롭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리가 없다고, 환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믿었다.

그의 바람대로 수혁의 사고는 이미 행복의 나라로 빠진 지 오래였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상황이라 그랬다.

왜냐?

췌장암이 아무리 이전보다 좋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최악의 고형암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않은가.

근데 그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보다 확실한 건 조직검사를 해 봐야 하겠지만…….

아까 픽셀 단위로 판독을 해 본 결과, 지금 이 영상에 뜬 종양 비슷한 조직은 절대 췌장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도 과혈관종으로 보입니다. 일단 췌장에서 기인하는 암 중에서도 이렇게 보일 수 있는 게 있긴 한데……. 아주 드물고, 그중에서도 이렇게 구분이 되어 보이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조직검사를 해 보면 나올 텐데,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아……. 그럼 정말……?”

“네. 부비장이라고 해서 비장의 일부가 엉뚱한 부분에 가 있는 경우가 있어요. 증상이 없으면 제거할 필요가 없는데, 췌장 꼬리 쪽에 있으니 사실 증상을 나타낼 확률도 거의 없긴 해요.”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네, 그럼 저희는 이만.”

“네! 바쁘실 텐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구원이 별건가?

죽다 살아났다면 그게 결국, 구원일 터였다.

그리고 지금 환자는 말 그대로 구원을 얻은 기분이었다.

-췌장암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이 말을 꺼낸 의사는,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다.

차라리 무심하게 툭 던졌더라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을 텐데…….

-아, 나는 끝났구나.

순간 무언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40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지인들의 부고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 시작했었으니까.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가, 선배가 심지어 후배가 죽었다더라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어딘지 모르게 현실감이 없었더랬다.

헌데 이번엔 나라니.

‘다행이다……. 딸아이 결혼식에 갈 수 있겠어.’

인생 계획을 짜는 게 20, 30대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나이 들었기 때문에 짜야만 하는 계획도 있는 법이었다.

마무리에 해당하는 계획인 만큼 이쪽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암만 잘해 왔더라도 마지막에 개판 치면 좀 그렇지 않나?

헌데 그 계획이 이번에 한번 다 끊겼더랬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절망?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이 세상의 부정적인 감정을 한데 뒤섞은 듯한, 그런 감정이었더랬다.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그때 수혁의 말이 탁 들어왔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

환자는 수혁 일행이 복도를 지나쳐 이제 뒤꽁지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에도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끊어졌던 절망이 희망으로 이어지는 느낌 때문이었다.

과장 조금 더 보태면, 정말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 할 수 있었다.

“와아아…….”

“미쳤네.”

“진짜 대단하긴 하다.”

“난 뭐 예수님 보는 줄 알았어.”

깊은 감정의 수렁에 빠진 건 환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이들 또한 그랬다.

여운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 지나간 다음에야 박수가 나왔다.

그래 봐야 뭐 공연장처럼 짝짝 치는 사람들은 없긴 했지만.

아무튼, 환자가 눈앞에서 환자가 아니게 되는 걸 직관하는 경험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흐음……. 저긴가.”

정작 그 기적을 행한 주인공인 수혁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식전 운동 가볍게 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덤덤한 얼굴로 초음파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

“이수혁 교수님……?”

영상의학과 사람들이라고 해서 수혁을 모르진 않았다.

노상 돌아다니면서 환자 보는 사람 아닌가.

게다가 김진실 교수와는 같이 논문도 썼다.

이후로도 친분을 이어 나가고 있었고.

그 때문에 복부 진단에 있어서는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다.

그 외에 다른 분과들도 당연하겠지만, 수혁과의 교류는 활발히 있었다.

허나 초음파실로 찾아온 적은 단연코 없었더랬다.

“웬일…… 웬일이에요?”

“환자 보러 왔죠.”

“환자…… 요? 아, 여기 환자 내리셨나? 아니면 의뢰가 들어왔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보러 온 거예요.”

“그냥……?”

대화를 나누던 직원은 대체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상대를 이상하다 매도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수혁은 그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이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천재니까.

제길.

내가 뭔가 잘못 알아듣고 있는 건가 해서 뒤를 돌아보았고, 그제야 안심했다.

다들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자, 그럼 좀 보겠습니다아.”

그래 봐야 별 소용은 없었다.

상대의 반응 따위 뭔 필요란 말인가.

다들 그냥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선두에 선 안대훈은 그야말로 어디 접수하러 온 깡패라도 된 양 이미 안에 있었다.

초음파실 내부에 들어가 있다, 이 말인데…….

생각보단 환자들이 꽤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긴 태화 의료원이고, 어지간하면 초음파 정도는 봐 주는 편이니까.

“흐음……. 어디 보자.”

수혁은 안대훈의 안내에 따라 안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검사실만 해도 열 개는 족히 넘었다.

그중 몇몇은 유방이었고, 몇몇은 복부였다.

그냥 열고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복부 쪽이라면…….

환자가 좋아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유방은 좀 그렇지 않나?

실제로 엄청나게 예민하게 생각하다 보니 문도 밖에서 함부로 열 수도 없었다.

“여기 내려온 환자 목록 없나?”

“여기 있습니다.”

“어어. 그거 저희…….”

“좋아.”

“이미 다 틀어 놨습니다.”

“아니, 그거.”

해서 수혁은 일단 어떤 환자들이 내려와 있는지부터 살폈다.

다 입원 환자도 아니고, 외래 환자들도 꽤 있었다.

평소라면 일단 입원 환자들부터 봤을 터였다.

아무래도 외래 쪽은……. 그리 심각한 환자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허나 수혁도 초음파실에 오는 건 또 처음이었다 보니, 관행을 깨기로 했다.

무엇보다 지금 컨디션이 너무 좋다 보니 대강 살피는 것만으로는 딱히 피로해질 것 같지도 않을 듯했다.

“흐음…….”

[일단 새로 진단받는 환자들부터 보죠. 그럼 거부감이 덜할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네, 그렇죠. 우리도 보기에 기분이 좋고요.]

‘그래……. 확실히 그렇긴 해.’

수혁은 방금 봤던 췌장 미부의 부비장 환자를 떠올렸다.

췌장암이라고 알고 있다가, 바뀐 진단명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모든 케이스가 이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암인 줄 알았던 환자들이 죄 아니라고 진단된다면 거기가 천국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두 발을 디디고 선 땅은 천국이 아니고, 그냥 현실이었다.

수혁이 관여하는 대개의 케이스 또한 안 좋은 병이 다른 안 좋은 병으로 치환되거나 오히려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심각한 질환인 경우가 더 많았다.

“이 환자.”

허나 사람은 아닌 줄 알면서도 희망을 품어 보는 동물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새로이 진단받는 환자는 다소 불편한 과정을 거친다 해도 대개는 받아 주는 편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그러한 희망을 품고 싶은 게 그 환자라서 그랬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암 소리를 듣자마자 아, 나 암이구나 하고 납득을 하겠나.

머리로는 이해할는지 몰라도 가슴으로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법이었다.

“아……. 외래에서 보낸 환자네요. 유방외과에서 우측 유방 신생물로…… 흐음.”

수혁이 가리킨 환자에 끼어들게 된 것은 하윤이었다.

뭐 진료함에 있어 남녀가 유별하지 않긴 하지만…….

아무래도 접근성이 다르긴 하지 않은가.

상대가 암만 나이가 많다 해도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욱이 정해진 진료실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난입 진료를 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크기가 상당히 커. 환자가 인지한 게 6개월 전이라고 해도 꽤 크지.”

“네. 뭐……. 원래 유방암이 그렇게 자랄 수 있는 거긴 한데…….”

“일단 한번 보지. 이번엔 하윤이만 따라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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