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247화 (1,247/1,303)

1247화 학장 (1)

의과 대학.

예과 2년에 본과 4년.

총 6년 동안이나 다녀야 하는 학과다.

너무 긴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여길 졸업한 사람들이 결국엔 사람 몸을 어떤 식으로든 다루게 된다는 걸 감안하면 쏙 들어갈 만한 생각이다.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돌팔이가 나올 수도, ‘의사’라는 직함에 걸맞은 전문인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올해를 끝으로 임기를 마치게 된 박인선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태화 의과 대학의 교육을 책임지는 차기 학장을 뽑는 날이었다.

아직 현직 학장이 물러나려면 반년도 더 남았지만, 어차피 2학기까지는 학기 편제가 다 끝난 상황인 데다가 내년 1학기부터 어찌 가르칠지 준비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도 들 만한 시점이었다.

‘조태진을 끌어올리자, 이거지?’

신현태는 해부학교실 주임 교수인 박인선 교수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조태진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본인은 여기 왜 끌려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 게 뻔했다.

각과 과장만 오는 자린데 그냥 대타로 온 줄로 알고 있을 테니까.

학장이면 그래도 굉장히 중요한 자린데 과장씩이나 되어서 소홀히 해도 되나 싶을 수도 있는데, 사실 학장이 중요한 자리라서 임상 과 과장들이 별 관심이 없다고 보면 되었다.

이번 학장은 해부학 교수였고, 저번엔 약리학, 저저번엔 생리학이었다.

기초 의학 교수들이 많이 맡는 자리다, 이 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병원 일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보니 교육 자체에는 시간을 많이 쓸 수 없으니까.

‘하지만……. 너무 고인 것도 사실이긴 해.’

아마 다른 교수들이 들으면 펄쩍 뛸 것이 분명했다.

고인 게 아니라 보수적인 것이라 여기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의과 대학 교육은 좀 보수적인 게 맞긴 했다.

사람 생명 다루는 사람들이 너무 진보적이면 대개 사고를 친다는 걸 역사를 통해 배워 온 몸들이기에,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분과 교육……. 이게 너무 심화되고 있어.’

과의 개수는 점점 더 늘어 가기만 하고 있다.

현대 의학이 너무 발전을 하다 보니 한 사람의 의사가 숙지할 수 있는 지식의 양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져서이기는 한데…….

그래서 각과 전문의로도 모자라 분과 전문의로까지 더더욱 세세하게 갈려 나가고 있는 것이고, 이건 비단 대한민국만의 일이 아닌 세계적인 추세기도 했다.

근데 뭐 남들 다 한다고, 선진국이 한다고 해서 다 옳은 일이라던가?

뭐 개발도상국보다야 낫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제는 다 알고 있다.

‘애초에 뭐……. 그쪽에서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있고…….’

지금까지 해 왔던 말하고 좀 충돌하는데, 사실 미국에서부터 이걸 문제 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신현태가 젊었던 시절에만 해도 주변에서 병에 대해 물어보면 대강 다 알았더랬다.

아는 척을 했던 게 아니라 그때만 해도 다른 과 지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라고 해서 전문 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교육의 방향성 차이가 아닌가, 하는 게 신현태의 생각이었다.

-삼촌. 이제 우리 센터만 이럴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익혀야 해요. 근데 그러려면 애초에 많은 과의 지식을 다 배워야 해요.

뭐, 신현태만의 생각이라기보다는 통합진료센터의 입김이 많이 들어가 있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신현태가 어떤 특정 집단의 이익에 치중하고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통합진료센터가 생기고, 학회가 생길 때만 해도 그런 짓을 왜 하냐는 외부 의견들이 있었지만…….

이젠 오히려 이쪽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가고 있는 실정이지 않나.

임상 현장에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었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질환인데, 전문 과에 맞지 않는 환자라는 이유로 진단이 안 되거나 터무니없이 지연되는 경우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차기 학장님 선출 선거가 있을 예정인데……. 혹시 혹시 박인선 교수님, 마음에 두신 분이 계십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신현태는 일단 회의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서두르고 있었다.

기초의학교실 교수들과는 달리 임상과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지루함이 꽃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아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제가 추천할 분은 생리학교실의 차정숙 교수님입니다.”

“아……. 네. 다른 분은 혹시 없습니까?”

“네?”

기초의학교실 사람들도 하품만 하고 있지 않을 뿐, 딱히 눈을 빛내고 있진 않았다.

내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약간……. 돌아가면서 하는 느낌이랄까?

어차피 정해진 대로 가르칠 예정이었다.

사람마다 세세한 면에서는 달라지겠지만, 대폭 다르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서 그랬다.

만약 내과학 강의를 바꾸려고 한다고 치자.

가뜩이나 환자 보고 연구하고 레지던트 가르치느라 바쁜 임상과 교수들을 어찌 설득할 건가.

명색이 교수면서 학생 가르치는 건 잡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상황에서 신현태가 갑자기 다른 사람 운운하니까, 박인선도 차정숙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다 놀랐다.

‘뭐야.’

‘이런 일은 없었는데?’

‘누가 한다고, 이걸……?’

학장은 보직 교수고, 그중에서도 높은 교수다 보니 보직 수당이 꽤 큰 편에 속하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일을 어마어마하게 해야 했다.

원래 하던 일이 적었으면 모를까…….

바쁘던 사람에게 일이 더해지는 건 달가울 수 없는 일이다.

지금 호명된 차정숙 교수의 얼굴이 그리 밝지만은 못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제가 추천하겠습니다.”

그때 이현종이 몸을 일으켰다.

‘뭐지……?’

‘뭐야……?’

이현종.

태화 의료원이 낳은 불세출의 기인.

그의 이름값은 단지 임상과 영역에서만 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 다 통했다.

막 대단하기만 한 사람으로라기보다는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내용도 있긴 한데…….

아무튼, 예정에 없던 일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었다.

“조태진 교수를 추천합니다.”

“네?”

물론 제일 놀란 것은 대타로 와서 졸고 있던 조태진이었다.

세상에 학장이라니?

자신과는 아예 연이 없는 자리라 여기고 있었다.

일단 엄청 높은 자리지 않나?

분과장보다야 당연히 높았고, 내과 전체 과장보다도 높았다.

따지고 보면 사실 원장단의 일원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란 말이었다.

애초에 박인선 교수도 차정숙 교수도 50대 후반이기도 하고.

“조태진 교수는 평소 학생 교육에 관심이 많은 데다가……. 레지던트 교육 평가에서도 늘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아니, 아니. 잠깐만요.”

거기에 더해 학장은 임상과에서는 거의 터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뭐요?

갑자기?

혹 늘 그렇듯 이현종 혼자만의 돌발 행동인가 해서 눈치를 살펴보니 신현태가 너무 조용했다.

거기에 더해 이현종과 같이 와 앉아 있는 수혁이도 딱히 말리는 기색이 없었다.

‘뭐야.’

본능적으로 잠깐만요를 외친 조태진은 그제야 뭔가 짚이는 일이 있었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태진아.

-네.

-요새 애들……. 교육이 좀 미흡한 거 같지 않냐?

-그렇긴 하죠. 다들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저희 때만 해도 의사라고 하면 희생정신도 있고……. 무엇보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요.

술자리가 있었다.

특별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냥……. 응?

워낙 친하다 보니 종종 모이는 그런 자리였다.

딱히 건설적인 얘기만 오갔던 것도 아니고, 대개 신변잡기적인 얘기였다.

‘시발?’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게 교육 얘기를 많이 하긴 했었다.

-뭔가 좀 바꿔야 되겠다, 이런 생각은 없나?

-왜 없겠어요. 예과 때부터 싹 갈아야죠. 저희 때야 타과생들도 1, 2학년 때는 다 놀았다지만 요새 어디 그렇습니까? 태화 애들……. 경영이나, 공대 이런 애들은 진짜 장난 아닙니다. 근데 우리는 예과 1학년이라고 하면 아직도 좀 놀잖아요. 타이트하게 잡아서 더 배워야죠.

-그래, 그게 맞지? 아무래도 교과서 두께도 두꺼워졌으니까.

-제 말이요! 배울 게 많아졌다고 뭐 6년제를 8년제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배워야죠.

-학장이 조태진 같으면 좋겠구만.

-제가 학장이라도 되면 뭐……. 태화 의과 대학 애들은 최정예가 되겠죠.

진취적인 답을 하긴 했지만…….

조태진이 그럴 수 있었던 건 오히려 남의 일이라서 그랬다.

원래 그렇지 않나.

총대 멘 사람은 마음부터가 무겁다 보니 입을 열기 쉽지 않은 법인 데 반해 아무것도 안 하는 놈들은 마음이 가벼운 만큼 입도 가벼이 열 수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묻는 사람이 신현태 아니면 이현종인데 그럼 거기서 저는 아닌데요? 라고 분위기 박살 낼 일 있나?

“조태진 교수가 얼마나 평소에 교육에 관심이 많고 진심이냐면…….”

헌데 그 날 했던 소리가 교묘히 질문만 잘라 낸 채로 지금 이 자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걸 녹음을 했어……?’

미친놈들인가?

또라이들이야?

‘수혁아! 넌…… 넌 아니지!’

조태진은 다른 것보다도 배반당한 것 같다는 생각에 수혁이를 바라보았고, 그저 웃고만 있는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수혁아…… 너마저…….’

사실 이 일을 제일 처음에 계획한 것이 수혁인데, 그거까지 알게 되었다면 아마 지금쯤 옷을 찢고 울부짖었을 텐데 아직 그건 아니다 보니 그냥 있었다.

사실 별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이야……. 이렇게까지?”

“학회 일도 바쁠 텐데…….”

“정말 열심이네.”

“이거 이쯤 되면…….”

분위기가 이상해서 그랬다.

심지어 원래 학장으로 내정되어 있던 차정숙 교수 또한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유, 이거 제가 한다고 하면 이상해지겠는데요. 젊은 교수가 이렇게까지 나서 주면 뭐 너무 좋죠.”

안 그래도…….

당장 내년에 PBL이니 뭐니 하면서 교육 방침이 바뀌는 것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교육 방침이 바뀐다는 것은 그만큼 할 일이 늘어난다는 얘기였다.

할 일이 는다고 밑에 사람을 늘려 주던가?

아니다.

대학은……. 사람 뽑는 데 있어서 정말 인색한 집단이다.

‘개꿀이네, 이거?’

그 생각만 하면 잘 오던 잠도 달아나곤 했더랬다.

헌데 그걸 들고 가 주겠다고?

너무 좋잖아.

차정숙 교수는 언짢아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정숙 교수와 잘 아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기분이 되게 좋구나라는 걸, 등 움직임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자, 그럼 조태진 교수님을 일단 후보로 놓고……. 차정숙 교수님은 후보 사임입니까?”

“네.”

“다른 분 없으신가요? 빼지 마시고. 아……. 없는 거 같은데. 그럼 선거할 필요가 없겠네요?”

“아니.”

“자, 그럼 박수. 차기 학장님에 조태진 교수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