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248화 (1,248/1,303)

1248화 학장 (2)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학장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직함이었다.

아니, 정말……. 이게 대체…….

“그……. 정말, 정말 영광…….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을 열면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말 자체는 사리에 맞았는데, 이유가 뻔했다.

이미 오랜 세월 병원에서 일하고 하면서 단련이 되지 않았나.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텐데, 의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적어도 겉으로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

그리고 대학 병원은 수많은 상황이 매일같이, 쉬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었고.

-이러다 우리 풍 왔는데도 말은 멀쩡히 하면 어쩌냐?

오죽하면 회식 자리에서 이런 얘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아주 황당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뭐 풍이 온 건 아니지 않나.

그렇다 보니 뭐, 말이 아주 그냥 청산유수였다.

“제가 학장이 되면 많은 것을 개선해서……. 학생들이 현대 의학 체계에서 요구하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설은 회의에 같이 들어와 있던 홍보팀 직원에 의해 다 찍혔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사진만 몇 장 찍고 말았을 테지만, 세상이 많이 좋아진 까닭에 영상으로 남게 되었다.

-제가 학장이 되면 많은 것을 개선해서……. 학생들이 현대 의학 체계에서 요구하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조태진은 회식에 끌려갔다.

축하를 빌미로 열린 모임이었지만…….

분위기부터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야……. 진짜 하고 싶었나 봐?”

“그러니까. 우리가 말 안 꺼냈으면, 어? 섭섭해서 어쩔 뻔했어.”

원장 주제에 시간이 남아도는지 벌써 녹화본을 떠 와서 틀어 놓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조태진의 연설 장면을 보면서 이현종은 깔깔 웃어 댔다.

“형, 축하해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수혁은 축하의 인사까지 건넸다.

최근에 위스키 좀 먹는가 싶더니 건네는 술도 위스키였다.

‘발렌타인 30년…….’

어지간한 술이었으면 집어치우라고 했을 텐데, 비싼 술이었다.

면세점에서 사도 한 병에 50만 원을 넘어가는, 그냥 리퀴어 샵에서 사면 100만 원을 넘어가고, 고급 바에서 까면 200 홀랑 까지는 그런 술이었다.

“그……. 이게 대체 뭔 일이니.”

게다가 건네는 사람도 수혁이지 않나.

이현종, 신현태와 같은 잡놈이 아니라 수혁이다, 이 말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슬금슬금 매너리즘에 빠지려는 대학 병원 생활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준…….

그런 존재였다.

내 삶의 이유라고 할까.

이딴 말 어디 가서 함부로 했다간 일단 아내에게 살해당하겠지만…….

적어도 병원에서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솔직히 형. 요새 애들……. 만족해요?”

그걸 신현태나 이현종이 모르겠나?

신현태는 대놓고 정치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고, 이현종은 아닌 척하면서 원장까지 해 먹은 양반인데?

그래서 수혁이를 앞세웠다.

최근 조태진이 어느 회식 자리에서 몽키 숄더를 먹다가 나도 발렌타인 먹고 싶다고 했단 제보에 30년산 또한 앞세웠고.

거기에 더해…….

“으음.”

조태진은 이현종이 좋은 데 있다면서 데려온 이곳을 잠시 둘러보았다.

내부 인테리어만 놓고 보면 뭐 흔한 호텔식 인테리어였다.

바닥에 대리석 좀 깔고, 벽에 칙칙한 색깔의 책장 두고, 안에는 대비되게끔 조금 쨍한 색의 두꺼운 책 꽂아 두고, 조명 애매하게 틀어 놔서 좀 더럽거나 해도 티 안 나게 하고.

‘들어올 땐……. 진짜 놀랬다.’

강남에 웬 공중전화 부스가 있나 했다.

헌데 이현종이 거기 안에 다 같이 들어가자고 했더랬다.

심기도 불편하겠다,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기도 하겠다 싶어서 오늘따라 지랄이 심하시네요, 했다가 한 대 맞고 들어가긴 했다.

그때였다.

이현종이 번호를 띡띡 누른 것은.

우우웅.

그와 함께 공중전화 부스가 아래로 향했는데, 눈앞엔 작은 바가 있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

조태진은 솔직히 말해서 좀 쉬운 남자라는 게 보편적인 상식이었다.

오죽하면 조태진의 아내조차 우리 그이는 아무리 화가 나도 스킨십만 좀 하면 풀린다고 떠들겠나.

물론 화 푸는 방법이 오직 스킨십뿐이었다면 어려운 남자로 통했을 터였다.

허나 이놈은 그냥 신기한 것만 좀 보여 줘도 헤헤 웃기 마련이었다.

‘오늘은 확실히 화가 많이 났었나 보네.’

‘아직도 웃진 않네요.’

‘하지만 괜찮아. 확실히 얼굴 풀렸어.’

‘그러니까요. 얘는 진짜…….’

‘호구 새끼지.’

‘진짜.’

몇 가지 정성이 겹치자 조태진은 차분히 대화를 할 상태로 되돌아왔다.

해서 수혁은 후후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안대훈이나 하윤이나……. 지금 레지던트 중에 정민이같이 열심히 하는 애들이 있긴 해요. 하지만 그걸로는 안 되죠. 사실 이과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애들이 다 의과 대학으로 오고 그중에서 최고가 태화인데, 우리가 그걸 전혀 체감하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있는 일이에요.”

“그것도 맞는 말이네. 하긴. 수혁이 너야 뭐……. 지금이랑 비슷했을 테지만, 우리 땐 태화 공과 대학도 되게 높았거든.”

“그렇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요새 애들은 진짜 공부 열심히 해서 들어온다고 하잖아요? 다큐 보면 뭐……. 초등 의대반도 있던데. 그렇게까지 의사를! 사람 살리는 일을 하려는 애들이 왜 의과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딱 빛을 잃겠습니까?”

“아……?”

조태진은 쉬운 남자답게 수혁의 말에 감탄했다.

아니, 숫제 감동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반응이었다.

온당한 반응이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의대 열풍이 일고 있는 건…….

이과의 다른 분야 아웃풋에 비해 의사가 월등한 면이 있어서 아니었나?

사람을 살리려고, 혹은 신체의 불편함을 개선해 주려고 오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작금의 열풍 뒤엔 아무래도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래, 이건 우리 잘못이야! 비전을 제시해야 해. 세상에 10살 때부터 의대가 꿈이었던 애들이 내과가 아닌 다른……. 아니, 전문과도 아니고 일반의로 나가서 레이저 쏘는 게 꿈이 된다는 게 말이 되냐!”

신현태?

이현종 옆에 있으니까 나름 정상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아니다.

애초에 대학 병원에서 일정 시간 이상 남아 있는 인간들이 일반적일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았다.

순수하게 사람 살리는 일에 미쳐 버렸거나 아니면 그런 나를 사랑하거나, 혹은 그로 인해 따라오는 명예를 사랑하거나…….

하여간 결코 돈이 최우선은 아닌 인간들이 태반이었다.

“차라리 저기 칼 쓰는 외과나, 애들 보는 소아과나……. 산부인과 같은 메이저 과로 가면 내가 이해가 되지. 근데 미용은……. 응? 내가 미용을 폄훼하는 건 아냐! 근데 열 살 때부터 꿈이었다는 놈들이 그게…….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분골쇄신해서 제대로 가르쳐야 해!”

이현종?

이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는 거야 뭐 굳이 더 떠들 필요가 있겠나.

“으음. 확실히……. 그렇군요. 우리가 꿈을……. 꿈을 저버리게 하고 있었어요. 그래, 맞아.”

조태진은 좀 의외일 수 있을 텐데, 생각해 보면 이 양반이야말로 미친놈이라 할 수 있었다.

세상 바뀌었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말 많이 듣지 않는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몸이 힘든데 그에 대한 보상이 적절치 않다고 여겨지는 과는 비인기과 직행이었다.

그리고 비인기과는 미달 수준이 아니라 소멸 수준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전 같으면 그로 인해 다른 인기과가 박이 터지게 될 텐데, 이젠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전문의 비율이 떨어지고 있다.

일반의도 의사 아니겠나 하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의사 면허만 따고 나간 사람 태반이 미용에 뛰어들고 있단 점이었다.

“제가 듣기로……. 애들도 공부를 새벽까지 한다더군요.”

전반적으로 의사가 가라앉고 있다는 반증인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직업들에 비해서는 여전히 우위에 서는 부분이 있다 보니 인기는 여전하다 못해 위로 치솟고 있다.

그럼 이걸 사회 병리 현상으로 보고 접근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이 안에서는 그럴 만한 인간이 없었다.

“그럼 대학생은 왜 새벽까지 하지 못할까요.”

그중에서도 특히 수혁이 제일 문제였다.

‘내가 해 보니까……. 공부라는 거, 그거 많이 한다고 죽는 게 아니더라.’

[그렇죠. 제가 시켜 보니까 알겠습니다.]

바루다에 의해 해 보지 않았나.

처음엔 바루다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개 레지던트였지만,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 아니라 바루다조차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모두의 머리통에 바루다를 꾸겨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 어느 정도 감안은 해야겠지만…….

“게다가 원래 그렇게 열심히 했던 친구들이고, 안타깝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 태화 의과 대학에 올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머리가 좋아야 결과가 나오는 게 맞지.”

“그래……. 어느 정도 하는 게 아니라 전교 1등급으로 하려면 지능이 높긴 해야 해.”

적어도 태화 의과대학에 들어온 인재들이라면 거르고 거른 인재들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자의건 타의건 간에 뒤지게 열심히 했고, 그 결과 잘한 녀석들이니 머리도 어지간히 좋을 거란 말이다.

그렇다면…….

‘대학생 때도 그렇게 굴리면……. 걔들이 의사가 될 땐 어떻게 될까.’

[미쳤다……. 나 방금 짜릿했습니다.]

‘어, 전기 통한 거 같어.’

[진짜 그런 느낌입니다.]

‘아니, 진짜 통했어.’

[아.]

수혁은 잠시 휴대용 전등에서 비죽 튀어나온 구리선을 과일로 대강 가린 후, 말을 이었다.

“굴리면 됩니다. 문제는……. 이게 제가 보니까 대학 입시 준비는 사교육 업체들이 미쳤더라고요. 잠깐 봐도 엄청 효율적으로 굴리는구나 싶었어요.”

“하긴……. 그렇겠지. 괜히 수백억대 강사가 있겠나? 잘하니까 그렇겠지.”

“우리가 그렇게 돼야 합니다. 다른 의과 대학 출신, 다른 나라 출신 의사들보다 우리 의과 대학 출신 의사가 월등히 뛰어나야 한다, 이 말이에요.”

“어어. 그렇게 되면 너무 좋을 거 같은데…….”

다들 술을 좀 마신 참이었다.

수혁은 애초에 술이 약한 편이고.

그렇다 보니 말이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럼에도 신현태의 감동은 흩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진해지고만 있었다.

일단 그도 좀 취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수혁의 말에 울림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나만 최고가 돼야지 하는 놈들도 수두룩 빽빽인데, 우리 과만, 우리 센터만을 넘어 아예 우리 학교라지 않나?

듣다 보니까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세상 사람들이 우수한 학생들이 다 의과 대학 가서 문제라는데, 기왕 문제 발생한 거 이놈들 가지고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닌가.

‘만약……. 내가 학장 하고서 수혁이 같은 애가 하나, 둘 아니, 열 명 나오면……? 시발 이거 미쳤는데?’

의료 선진국이 별건가?

다른 나라 같으면 죽을 사람 죄 살리면 그게 선진국이지.

지금 수혁이 하나 때문에도 외국인 환자가 팍팍 느는데 만약에 여럿이 돼?

미쳤다, 이건.

다른 게 애국이 아니라 이게 애국이다.

‘애국 학장이다!’

조태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나는 뭘 하면 돼?”

늘 그러하듯 수혁은 답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였다.

수혁은 그런 조태진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학장님이 알아서 잘 하셔야죠.”

기대했던 말이 아닌 영 엉뚱한 말을 하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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