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249화 (1,249/1,303)

1249화 총동문회 (1)

조태진은 그날 굉장히 당황했다.

답이 있어서 시킨 줄 알았더니만 그런 게 아니었지 않나.

미친놈들인가 싶었다.

아니, 미친놈들 맞았다.

“내가 그랬지? 미친놈들이라니까?”

집에 와서 아내와 얘기를 해 보니 더더욱 확실해졌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조태진 아내 또한 아주 일반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일단 그녀의 아버지는 5선 의원이다.

이젠 물러나서 원로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이 어디 간 건 아니다 보니 여전히 연말연시가 되면 집안이 북적거릴 정도인데…….

그 아버지 되는 사람이, 그러니까 조태진의 장인어른이 제일 총애하는 자식이 바로 조태진의 아내였다.

“좋게 미쳐서 다행이지.”

“응?”

“자기 원장 하는 게 꿈이라며. 그럼 이거 좋은 일이야. 학장……. 임상 과에서는 거의 못 하는 건데, 자기가 하게 된 거 아냐?”

“그건……. 그렇지?”

“잘 안 맡으려는 보직이지만 학교 내에서 보면 사실 학장보다 높은 보직도 없지 않아? 내가 알기론 원장 되려면 원내 입지도 입지지만 본교 입지도 중요할 텐데?”

“그…….그렇지. 맞지.”

김앤정 파트너 변호사.

그중에서도 핵심 5인방 중 하나가 바로 조태진의 아내였다.

법리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감각 또한 남다르단 건데, 거기에 더해 욕심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내 꿈이…… 원장이었나?’

그에 비해 조태진은 좋은 게 좋은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아내의 배경을 보고 결혼했다고 생각하는데, 하늘에 맹세코 아니다.

이쁘고, 착하고, 당차고 등등 이유가 갖다 붙이려면 많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제일 큰 건 그냥 만날 때마다 자기 좋다고 해 주고 깔깔 웃어 주어서 그랬다.

헌데…….

“내가 그렇지 않아도 자기 50부터는 커리어 관리해 주려고 했어.”

“어어……. 이거 뭐야? 이거 뭔데.”

“일단 봐. 내가 볼 때 자기는 다 좋은데 좀 허술한 면이 있어. 그걸 내가 채워 줄게.”

“자기……. 자기 일만 해도 바쁘지 않아?”

“바쁘지. 근데 난 천재니까.”

“아…… 그건 그렇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조태진은 아내가 자신에게 건네준 서류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50세 1월, 2월, 3월로 시작하는 문서는 70세 12월까지 쭉 적혀 있었다.

그냥 날짜만 있는 게 아니라 해당 월마다 해야 하는 일 또는 했으면 좋겠는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근데 이게…….”

“간단하게 정리해 본 거야. 한 60살쯤에 원장 하고, 연임까지 한 다음에 그 병원에서 정년 맞는 대신 다른 병원 원장으로 가야지 않겠어? 태화 원장이면 진짜 할 만해. 기사도 나오고, 개인 비서도 있고, 욕심 좀만 더 부리면 계열사 사장단으로 갈 수도 있어. 없는 얘기 하는 거 아니잖아.”

“아, 그렇지…….”

이게 레디메이드 인생인가?

통합센터 놈들이 학장 만든 건 일도 아닌 거 같았다.

실제 삶의 조종사는 집에 있었다.

평생 살을 맞대고 산 아내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이거……. 학장이 써 있는데?”

조종사가 아니라, 예언가인가?

이거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예언서인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런 생각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조태진은 워낙에 오컬트에 심취한 인간이지 않나.

그렇다 보니 절로 노스트라다무스니 뭐니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 실시간으로 조정했지. 이렇게 되면 확실히 더 빨라져. 미친놈들이긴 한데……. 역시 좋은 놈들이야. 나중에 한번 정식으로 집에 초대해야겠어.”

“아, 조정한 거구나. 난 또.”

“내가 하는 건 예측이지, 예언이 아니라고 했지?”

“어어.”

“아무튼, 학장 때 뭔가 하긴 해야 할 거야. 사실…….”

조태진은 모를 명단이, 그러니까 지금까지 태화 의료원 원장을 해 먹었던 사람들의 명단이 조태진의 아내 머릿속을 주르륵 지나갔다.

그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만만찮은 사람들뿐이었다.

일단 초대 병원장부터 해서 한 3대까지는 숫제 대한민국 의료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사람들뿐이었다.

애초에 태화쯤 되는 기업에서 병원 만드는데 그 정도도 안 할 리가 있겠나?

‘4대는……. 국회의장까지 해 먹었던 사람이고.’

의사 출신 정치인은 유니콘과 같다는 말이 있다.

거의 볼 수 없다는 말인데…….

의사라는 직업 특성 때문일 터였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의협이 마치 의사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의사는 자신이 속한 과에 따라 수십 개로 갈라진 집단일 뿐이었다.

어지간한 사안이 아니고서는 하나로 뭉치기 쉽지 않고, 뭉친 것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벌써부터 갈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정권에서 굳이 의사를 챙기려고 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어떻게 한 거야, 대체?’

그 와중에 정치를 기깔나게 해서 국회의장까지 해 먹었다니.

그녀뿐 아니라 아버지도 몇 번 이해가 안 간다고 했더랬다.

아무튼, 그다음 원장이 바로 이현종이다.

이현종…….

‘미친놈이지만, 그 업적은…….’

솔직히 말해서 이현종에 대해 들었을 땐, 국뽕이 슬금슬금 차올랐었더랬다.

k-pop으로 시작된 k-contents의 힘이야 뭐……. 다 알아주는 거 아닌가?

특히 최근에 나온 중증외상센터 드라마의 인기는 미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주연 배우는 일약 월드 스타가 되었고, 네이버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원작자는…….

원작자는 차기작을 쓰고 있다고 했다.

‘신현태도 만만한 사람이 아냐. NEJM에만 못 냈지……. 굵직굵직한 곳에 낸 논문만 해도 몇 개야……? 거기에 학회에서의 입지도 그렇고……. 일단 태화 로열이지.’

그에 비해 남편은 어떠한가.

덩치 크고, 얼굴 순둥하니 딱 취향 저격이고, 사람 착하고…….

약간 이상한 거에 심취할 때가 있긴 한데 그게 딱히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니 괜찮았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업적이었다.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아서 그런 건지 뭔지 능력은 뛰어난 거 같은데 이상하게 아웃풋은 그에 비해 좀 떨어졌다.

좀 모자란 아내 같으면 그런 남편 바가지를 긁었겠지만.

“사실?”

조태진의 아내는 원래 하려던 말 대신 건설적인 얘기를 꺼냈다.

온달이면 어떤가.

내가 평강공주보다 훨씬 똑똑한데.

사랑하는 사람 하나쯤은 얼마든지 저 드높은 천상에 떠밀어 올릴 수 있었다.

“의과 대학 바뀔 때도 됐지. 법처럼 사람이 만들어 놓고 사회 현상 따라가면서 보완하는 게 아니잖아? 원래 있던 사람 놓고 하는 학문이니까, 아무래도 우리보단 변화가 역동적이어야지.”

“그건……. 그래. 나도 그래서 좀 의욕이 있긴 한데, 너무 힘들게 하면 반발이 있을 거 같거든.”

“학생들?”

“학생? 학생들 반발이야…….”

“그래, 어차피 병원 들어오면 노예 될 애들인데 반발해 봤자지. 그리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잖아. 공부시켜 준다는데 반발하면 이상하지. 대신 인기가 좀 없어질 수도 있을 텐데 그럼…….”

“동문회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칠성, 아선에서 워낙 공격적으로 장학금 정책 펼치고 있어서 매년 수험생 수준 자체는 비등비등하거든. 근데 여기서 떨어지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학장을 목 매달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불태워 죽여라!

설마하니 이러진 않겠지만…….

실제로 그러지 않을 뿐, 속으로는 얼마든지 그럴 거다.

심지어 이 일을 직접 맡긴 신현태나 이현종 또한 그럴 공산이 크다는 것이 커다란 문제였다.

생각보다 사람들이란 유치한 법이라 우리 학교가 일등이냐 아니냐에 엄청 집착하지 않던가.

공대처럼 태화 전자랑 연계가 되어 있다면 또 모를까, 태화 의료원만으로는 압도적인 1등을 점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몇 년 정도 예상해?”

걱정을 이어 나가고 있으려니 아내가 물어 왔다.

워낙 똑똑한 사람이다 보니 대화가 좀 띄엄띄엄 이어지는 면이 있었는데, 이젠 괜찮았다.

사실 조태진도 만만찮게 똑똑한 사람인 데다가 같이 산 세월이 몇 년이란 말인가.

“글쎄……. 예1부터 굴려서 효과 보려면 6년인데…….”

“그건 너무 긴데.”

“국시랑 전공의 시험, 레지던트 우수성까지만 보고 가면 본3부터 갈궈서, 짧으면 2년. 길면 4년.”

“학장 임기가 2년인데 연임까지 하면 4년이지?”

“어, 그렇지.”

학장 4년이라.

병원 일에 학회 일…….

소속된 학회가 하나도 아니다.

내과학회, 혈액종양학회, 혈액학회, 림프종학회에…… 통합진료학회는 이사다.

거기에 학장일까지 4년 하면…….

“4년 정도면 달래 볼 수 있을 거야. 동문회 반발만 없으면 연임 가능할 텐데.”

“근데 우리 동문회……. 진짜 빡센데.”

“우리 동문회보단 나을걸.”

“아, 그건 인정.”

태화 의과 대학 동문회는 당연히 태화 의과 대학 졸업생들로 이루어져 있다.

학회 교수님, 어디 병원 교수님들이야 발에 채이고, 강남 성형외과 피부과 원장님들도 있고, 그거 아니라도 큰 병원 원장들이 수두룩했다.

끗발 장난 아니다 이건데, 아무리 그래 봐야 태화 법대 동문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여긴 그냥 뭐 국회의원, 장관, 지자체장, 판사, 검사, 변호사에 각 기업 사장 및 고문 같은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었으니까.

“자기, 내가 동문회 이사인 건 알고 있지?”

“어, 알지. 매년 가잖아, 같이.”

갈 때마다 어찌나 주눅이 드는지.

뭔가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나 기업 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동문회 식순 자체도 격식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품위가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 돈이 많아.’

동문회비가 뭐 수억은 걷히는 건지 뭔지 골프장에서 했던 적도 있었다.

태화 의과 대학 동문회는 수련원에서 하면 대박이란 소리가 나오니, 비교하는 게 실례였다.

“내가 식순이나 이런 건 싹 짜 줄게. 꼭 초대해야 할 사람 있으면 알려 줘. 설득도 내가 다 해 줄게.”

“어……. 그래 주면 나야 너무 고마운데. 나는 뭐 해?”

“자기?”

“어.”

“돈 따 와야지.”

“아. 돈.”

돈?

어디서 따 와?

연구비는 잘 따 오는 편이다.

근데 연구비는 모든 항목에 영수증 붙여서 증빙해야 한다.

그걸로 동문회를 했다고 하면 정상 참작이 될까?

안 될 거 같다…….

“어쩔까, 수혁아.”

혼자서는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같이 고민을 한다 해도 별 소용은 없었다.

-파이팅, 학장님.

-이야아……. 동문회?

-골프장에서? 난 꼭 갈게.

동료 혈종 교수들한테 얘기를 해 봤더니만 돌아오는 답이라는 게 이따위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교수가 뭐…….

돈이 어딨나.

의대 교수라 학교 월급에 병원 월급까지 있다 보니 썩 괜찮은 편이긴 해도 천 단위 후원금을 턱턱 내는 건 불가했다.

“아니, 아니야. 내가 괜한 말을.”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가, 수혁이랑 간만에 밥 먹다가 이따위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자마자 입을 틀어막았으나, 그런다고 말이 주워 담아지나?

그랬다면 강태공의 고사도 남지 않았을 것이었다.

헌데…….

“돈이요? 돈이야 어떻게든 준비할 수 있죠. 취지만 좋으면.”

돌아오는 답이 심상치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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