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0화 총동문회 (2)
수혁의 후원자가 대체 얼마나 될까.
굵직한 사람들만 대도 한둘이 아니었다.
김다현 회장부터 해서 두바이 왕자에 싱가포르 로열패밀리는 물론이거니와 미국으로 넘어가면 파이자와 같은 초거대 제약 기업들까지 수두룩했다.
그 외에 국내외 수혁의 도움을 받은 부유층까지 더하면 사실상 일일이 열거하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조태진은 말 꺼낸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수혁이 들고 온 제안서를 보고 말을 잃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우리 남편이 좋아 죽는지 궁금했는데…….’
일을 같이 추진하는 입장이 되었다 보니, 조태진의 아내도 와 있었다.
김앤정 파트너급 변호사쯤 되면 사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이 보통이겠지만, 거기서 더 윗급으로 올라가면 중요한 일정에 대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둘은 각기 겉으로, 속으로 놀라며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아, 전에……. 그 김성진 선생 동기분인가? 그분 부탁 들어주다가 제주도 가서 한바탕했었잖아요.”
“그래, 정말 한바탕했었지.”
가서 난데없이 섬 전체를 뒤집어엎지 않았나.
제주도가 무슨 무의촌도 아니고, 대학 병원에 다른 종합 병원도 있는 곳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수혁과 이현종을 보겠다고 찾아온 환자가 물경 수천에 이르렀었다.
그때 봤던 환자 대부분은 부유하기는커녕 오히려 형편이 어려웠던 사람들이었고, 그게 취지에 맞는 일이었다지만…….
이수혁, 이현종쯤 되면 봉사를 하는 와중에도 청탁이 오가기 마련 아니겠나?
그렇다 보니 제주도지사와 골프 선수 여럿이 도움을 받았더랬다.
“그때 뭐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던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
“아……. 그래.”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이 말…….
언제 한번 밥 먹어요랑 동급 아니었던가?
사실 조태진도 대학 병원, 그것도 태화 의료원에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결코 적지는 않았더랬다.
허나 은혜을 입었다고 해서 반드시 갚으리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그 정도가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사람마저도 드문 것이 현실이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야 드물겠지만, 은혜를 은혜로 갚는 일 또한 비슷하게 드물다는 것을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법이다, 이 말이었다.
“그래서 연락을 했어?”
“네. 근데 그때랑 말 바꾸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고요. 거짓말을 한 셈인데…….”
“그…….”
조태진 아내는 자기도 모르게 끼어들려다 말았다.
‘거짓말이 아니라,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게 이상하다는 말을……. 너무 하고 싶다. 하지만…….’
남편이 노려봐서 그랬다.
모르는 놈이면 이 새끼가 미쳤나 하겠지만, 벌써 함께한 세월이 20년을 헤아리는 사람이지 않나.
-우리 수혁이는 원래 순수해. 거짓말이라고는 아예 모른다고!
눈만 봐도 뭔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알 수 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 나이 되도록 그렇게 순수한 게 말이 되나……?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게 마음이 편하니까.’
변호사인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조태진 또한 순수한 사람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생각해 보면 진짜 그랬다.
언제였더라?
가로수 치고 전화가 왔었는데, 진짜 뭐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 같은 목소리였더랬다.
그래서 혹 음주 사고인가 싶어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그저 갑자기 끼어든 사람 피하느라 갖다 박은 게 다였다.
잘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람 살린 행동이었다, 이 말인데…….
‘내가 어떤 놈들을 상대해 왔는지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
기본적으로 변호사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적성에 맞는 것을 넘어 천직이었다.
그래서 이만한 성취가 있는 것이지만…….
가끔 이 직업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저런 새끼 볼 일도 없지 않았을까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 내가 너무 타락한 거야.’
그런 놈들 때문에 머릿속이 혼탁해진 걸 거야라고 억지로 되뇌면서, 그녀는 진작에 입 다물고 경청 중인 조태진과 더불어 귀만 열었다.
“다행히 그중에 몇 명이 진짜 도와주셨는데, 덕분에 에잇브릿지라는 골프장 대관이 됐어요. 전에 대회 하던 곳인데 경관이 썩 괜찮더라고요.”
“어……. 에잇브릿지…….”
“미친…….”
뻔뻔스레 은혜 갚으라고 전화한 수혁의 패기에 지린 사람이 꽤 높은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조태진과 그의 아내는 서로의 눈을 보면서 동시에 TV에서나 보던 곳을 떠올렸다.
에잇브릿지라니…….
KPGA, KLPGA가 아니라 PGA나 LPGA가 열리는, 진또배기 최상급 골프장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감흥이 없을 수도 있는데, 미국 골프 다이제스트에서 선정한 세계 100대 골프장에서 당당히 18위를 차지한 적도 있는…….
말 그대로 국내 제일을 넘어 세계급 골프장이었다.
당연한 말인데, 이런 곳은 단순히 돈이 있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부킹해서 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라 이 말인데…….
“왜요?”
그걸 빌려 놓고 이런 표정이라니.
조태진은 기껏해야 서울 호텔이나 빌려 보려고 애를 쓰던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워졌다.
오버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뭐어어어어어? 나도 가야겠다!
이현종마저 이런 반응을 보였으니.
골프채를 들면 조폭 두목만 떠오르게 하는 김승규마저 벼르고 있단 소문이었다.
이 둘에 비하면 조태진은 상대적 일반인이고, 아내야 뭐 보편적인 상식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그 자리에서 펄쩍 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틀을 빌린 거예요?”
“네. 빌려준다던데요? 그렇지 않아도 태화 의과 대학 동문회면 어마어마한 사람들 있는 곳 아니냐고 하면서요.”
“그, 그래요……?”
태화 법과 대학 동문회도 못 열 거 같은 곳이었다.
아니, 동문회라는 단어랑 제일 먼 곳이었다.
헌데…….
의과 대학 동문회를 열어 준다고?
‘이…… 이상한데? 거기 대표를 살려 줬다고 해도 어려운 일인데…….’
의과 대학을 너무 무시하는 것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의사는 바닥이 높은 것이지, 천장이 뚫린 직업은 아니지 않나.
뭐라 해야 할까.
시간당 단가가 높은 전문 노동 인력이라고 하는 게 아마 적당할 터였다.
의사로서의 커리어가 딱히 그 바깥에서의 커리어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단적인 예로 이현종, 김승규 모두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대단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사는 건 아니지 않나.
둘 다 각자의 이유로 인해 딱히 불편함 없이 살고는 있지만…….
“뭐 다른 말은 안 하셨고요?”
“아……. 뭐 여러 친구들이 온다고는 했죠.”
“친구 누구요?”
“두바이랑 싱가폴이랑 태화 전자?”
“아…….”
그제야 조태진의 아내는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물론 수혁의 말이 이어지자마자 바로 회수되긴 했다.
그냥 빌리기만 한 게 아니라, 몇몇 골프 선수들이 와서 필드 레슨까지 해 준다는 얘기가 나와서 그랬다.
미친.
말 그대로 미친 상황이었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여기서 뭔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태화 의과 대학이라고 하면 탑 3 안에 드는 대학이라 부러워하는 사람 많았을 텐데, 이 소식 들으면 칠성, 아선 모두 태화 갈 걸 할 게 뻔했다.
“인원수가 총 300명 정도밖에 안 될 거 같아요.”
“아, 아아아. 그게 문제구나. 괜찮아. 어차피 불러야 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어. 그리고 생각보다 이틀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그래요? 그냥 다 부르는 거 아니에요?”
“일반적인 총동문회면 그렇지. 하지만……. 이건 목적이 있잖아. 내가 네 말 듣고 이미 교육 과정 개편안을 싹 생각해 봤거든.”
“오, 그래요?”
“자세한 건 차차 말해 줄 텐데……. 요약하면 학생도 교수도 모두 고통스러워질 거야.”
“고통 속에서 실력자가 탄생하는 법이죠.”
“그래, 너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어!”
개편안 속에서 학생들이 겪게 될 것을 대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조태진은 보다 나은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리였다.
고통.
그래, 이 말 말고는 적당한 말이 없었다.
듣는 사람 모두, 마누라 포함해서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수혁은 질색하기는커녕 그래, 그 정도는 해야 우리 학장이지 하는 얼굴이었다.
“근데 이렇게 되면 학부모뿐 아니라 교수들도 눌러야 되거든.”
“학생들 우수해지면 교수님들도 다 좋은 거 아니에요? 맨날 요즘 애들, 요즘 애들 하던데.”
“그 교수들도 요즘 애들이야.”
“아……. 그런가?”
“아무튼, 그렇다 보니까 힘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해 주면 많이 쉬워져.”
“그래요? 제주도라 사실 취소할까도 싶었는데…….”
“취, 취소라니!”
골프 약속은 본인상 제외하고는 필참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만큼 4명이 모여서 하는 운동이라는 게 쉽지 않은 얘기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골프에 빠진 놈들은 자기 죽기 전에는 무조건 간다는 말도 되었다.
근데 에잇브릿지?
레슨 프로가 아닌 투어 프로 중에서도 이름난 사람들이랑 같이 친다고?
-응? 내가 잘못 들었나?
-놀라시는 걸 보니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어어……. 그때 일정이 있었기는 한데, 가야겠는데. 갈게. 무조건.
-네, 회장님!
조태진은 전화를 돌리면서 예상대로의 반응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갈게.
-네, 의원님.
동문회장, 학회장, 정말이지 몇 안 되는 국회의원, 잘나가는 원장 등등.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 전부가 오기로 했다.
달리 말하면, 힘깨나 있는 사람들이 전부 온다 이 말이었다.
오기만 하면 설득할 자신은 있었다.
대의가 있으니까.
‘게다가……. 이 양반들은 막말로 남의 일이잖아?’
아무튼, 이 양반들이 오겠다고 했으니 이제 뭘 해야 할까.
“동문회……?”
“네.”
“왜……?”
딱 봐도 불만 있을 것 같은 놈들을 불러야 했다.
‘왜…… 냐고?’
불러서 패려고.
삐딱하게 나오면 나중에라도 죽일 거라고 알려 줘야 하지 않겠나?
물리적으로야 김승규가 있으니 당연히 죽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죽을 거라고 말을 해야 했다.
“에잇브릿지, 프로, 동문회장, 국회의원, 학회장, 원장님.”
“아……. 가, 갈게.”
그렇게 물망에 오른 것들은 당연하게도 교수들이었다.
아직도 수혁에게 삐딱한 마음을 품고 있는 무지몽매한 것들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평소 불만만 늘어놓는 놈들이었다.
조태진은 이참에 그냥 섬에 가둬 놓고 정신 교정에 돌입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남은 교수 방에 들어갔다.
-산부인과 홍혜리.
약간 무서웠다.
일단 외과계 교수들이 내과계 교수들에 비해 거친 거야 뭐 감수해야 할 일이니 그렇다 치는데, 그중에서도 산과 교수들은 진짜, 진짜였다.
한 번에 두 생명을 다루는 데다, 그 생명 중 하나는 산모고 다른 하나는 아기다 보니 예민할 수밖에 없어서 그랬다.
무엇보다 통합진료센터와 가장 거리가 있는 과이기도 하지 않나.
그렇다 보니 도움을 주고받은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요?”
역시 마지막 보스인 걸까?
말투부터가 스산했다.
허나…….
조태진이 누군가.
“에잇브릿지, 프로, 동문회장, 국회의원, 학회장, 원장님.”
만만찮은 또라이였다.
“응?”
“에잇브릿지, 프로, 동문회장, 국회의원, 학회장, 원장님.”
“그게 뭔…….”
“에잇브릿지, 프로, 동문회장, 국회의원, 학회장, 원장님.”
몇 번 같은 말을 반복했더니, 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지만 실은 개미지옥이라 할 수 있는 동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