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2화 이제 나이가 있어요 (1)
이현종.
30대 후반에 이미 심혈관 중재 시술에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된 입지전적인 의사.
보통 그쯤 되면 이후로는 그냥저냥 지내도 되었을 테지만, 이현종은 오히려 그 후로 임상 의사로서 더더욱 위력을 발휘해 왔다.
어디 그뿐이랴?
그 이후로 낸 굵직한 논문의 수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었다.
의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그 분야가 뭐가 되었건 간에 이현종에 대해서만큼은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었다.
“교수님 샷이 어째…….”
“그러니까. 아까는 그래도 흉내 좀 내시더니.”
“하하……. 그만하십시오들. 어디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 같겠습니까? 센터장까지 하고 있는데…… 골프까지 잘할 수가 있나?”
“하하하하! 하긴.”
허나 지금 이 자리에선…….
논문이고 나발이고 간에 별 소용이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란 말이 있듯, 골프장에서는 골프 잘 치는 놈이 왕이었다.
심지어 지금 이현종이 속한 팀에서는 딱히 이현종이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대단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강남역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커다란 성형외과 원장에, 지금은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3선 국회의원에, 지방 2차 병원장에 동문회장까지 해 먹고 있는 양반들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 다리가 아파서 그래요. 나 원래 좀 잘 치는데.”
“아, 하하. 다리가?”
“이거야 원. 나 40쯤 먹었을 땐 그런 핑계도 대고 그랬었는데, 이제 보니 교수님이 마음이 젊으시네.”
“그러니까요. 승부욕이 아주…… 하하.”
패악질을 부려도 별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라면야 학문으로 부술 수 있겠지만…….
돈, 권력, 명예에 뜻을 둔 사람 앞에서 이현종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그의 삶에서 저 세 가지만큼 거리를 둔 게 없었는데.
해서 억울함을 토로해 봤으나 그것조차 소용은 없었다.
‘망할……. 아니, 근데 다리가 진짜…… 너무 아픈데?’
이현종은 자기만 남겨 놓고 카트로 향하는 셋을 보다가, 이내 빗맞는 바람에 요 앞에 굴러가 있는 공을 바라보았다.
연신 다리를 살피면서였다.
의학적인 의미에서 살피려면 당연히 옷부터 벗어야겠지만…….
제아무리 이현종이라 해도 사람들 다 왔다 갔다 하는데, 그것도 야외에서 옷을 벗을 수는 없었다.
‘으음……. 근육이 뭉쳤나? 스트레칭이라도 할 것을……. 제길.’
골프 하면서 무슨 근육이 뭉치고, 스트레칭을 하나 싶을 수도 있을 거다.
골프채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무겁지 않은 데다가, 공도 작고, 휘둘러 친 다음에 하는 것이라고 해 봐야 걷는 게 다인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뚝딱거리는 명랑 골프 레벨이 아니라 그 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몸을 혹사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우선 왼쪽 다리를 말뚝 박은 것처럼 단단히 고정해야 했고, 그 와중에 허리를 비틀어 꼬았다가 풀어 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람은 흔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괜히 동문회에서 흉부외과 의사를 준비해 둔 게 아니라, 이 말이었다.
‘근데 평소에 아픈 거랑은…… 좀 다른데……?’
그렇다 보니 하체의 통증도 수반되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특히 이현종처럼 나이가 많거나 평소 근육 운동을 게을리했던 사람들인데 괜히 필드 나왔다가 꽂혀서 오바하는 경우에 그랬다.
주로 좌측 허벅지나 우측의 발목 주변이 타겟이 되기 마련인데…….
오늘은 이상했다.
‘왜…… 양측 허벅지 앞쪽이 이렇게 아프지?’
양측 허벅지가 거의 동일하게 아팠다.
마치 뭔가가 허벅지를 둘러싸고 꽉 누르는 것처럼.
“아유, 교수님. 뭐 그리 심각하게 서 있어요. 골프라는 게 인생 같지 않습니까. 잘 맞을 때가 있으면 또 안 맞을 때도 있고 그런 거지.”
해서 양측 다리를 쥐고 있으려니 카트에서 국회의원 하던 양반이 내려서 다가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딱히 위로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했다.
‘아……. 오늘 밀리는 날이지.’
스케줄을 무리해서 때려 박아 둔 상황이지 않은가.
고민하지 말고 대충 치라 이 말이었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잘 쳐지는 것도 아니라는 책망도 담겨 있었다.
화가 났지만, 터무니없는 말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맞는 말이라서였다.
‘망할! 이 천하의 이현종이……!’
이현종은 후 하고 한숨을 쉬고는 심기일전한 상태로 다시 한번 샷을 날렸다.
팅-
제발 쭉 뻗어 날아가라! 하고 기도하면서였다.
허나 신이 있다면 엄청 바쁘지 않겠나.
고작해야 골프 샷에 응답하리라 바라는 건 좀 지나친 감이 있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니 이현종의 공은 아예 옆으로 튕겨 나가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풉.”
“응?”
“아, 아니. 이거야 원. 오비네요. 저기서 치시죠.”
전직 국회의원의 놀라운 평정심조차 뒤흔들어 버린 샷에 제일 실망한 것은 이현종이었다.
그는 화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숨을 쉬다가…….
“아, 다리가.”
“하하하. 알겠습니다, 알겠어.”
통증을 호소했다.
사실 전직 국회의원도 의사는 의사였다.
아니, 의사는 의사라고 할 정도도 아니고 전문의였다.
나름 필드에서 10년도 넘게 구른 사람이었고, 지금도 병원에 있었다.
임상은 안 하고 경영에만 관여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일단 이리로 오시죠. 아이구, 근육이 많이 뭉쳤네.”
“으…… 아프…… 아픈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개무시를 했던 건 골프라는 운동 특성 때문이었다.
샷을 직접 때릴 때 말고는 사실…… 몸을 움직일 일이 거의 없지 않던가.
움직인다고 해 봐야 걷는 게 다고, 그마저도 실력이 늘면 늘수록 카트 타는 시간이 태반이었다.
그러다 보면 아가리 파이터가 하나둘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전직 국회의원이야 뭐 아무래도 골프장 나갈 일이 엄청 많지 않겠나.
‘이 양반 소문도 그렇고…… 거짓말인 줄 알았지.’
게다가 이현종을 둘러싼 소문 중, 학문적인 것을 제외하면 사실 좋은 게 거의 없었다.
특히 성품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당한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말투가 좀 달라지긴 해도 전반적으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란 말이 많았다.
제자들은 또 다르게 말하겠지만, 아쉽게도 아직 이현종의 제자들은 직접 이 전직 국회의원쯤 되는 사람을 대면할 만큼 크지 못했다.
“단단한데요?”
“그, 그러니까.”
해서 오해를 하고 있었다가, 이현종이 진땀까지 흘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진지한 얼굴로 다리를 매만져 보았다.
그랬더니만 땅땅했다.
‘뭐지?’
뭔가 이상했다.
근육이 뭉쳐도 단단해지긴 하지만…….
이런 식의 땅땅한 느낌은 아니지 않던가.
‘뭐지?’
이상하단 생각은 드는데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임상에서 손을 뗀 지가 오래기도 하지만, 사실 진단검사의학과 의사다 보니 딱히 환자를 직접 본 적은 없어서이기도 했다.
임상과 의사가 이런저런 것을 물어본다면야 얼마든지 답변과 토론이 가능하겠지만…….
“잠시. 아버지는 제가 보겠습니다. 먼저 가시죠.”
“어? 대회는……?”
“제가 아까부터 봤는데 대회 나갈 수 있는 정도의 병은 아닌 거 같아요.”
“아……. 근데, 자네는…… 아, 아! 설마 이수혁 교수?”
“네.”
“그, 그럼 틀림없겠지. 알겠어요. 이따…… 이따 보죠. 하하. 얘기 많이 들었었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황에서 괜히 인상만 쓰고 있었다.
그래야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캐디나 비서들이 볼 때 그래도 우리 의원님이 의사는 의사이시구나 할 거 아닌가.
물론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딱 걸릴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수혁이 때맞춰 나타났다.
‘이수혁…… 천재라지?’
몇몇 정계 후배들에게서조차 들을 수 있던 이름이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k-pop을 선두로 한 문화적 친근감을 무기로 기업 활동과 외교 활동을 해 왔다면, 이제부터는 k-의료를 활용해 봐야 할 수도 있겠단 아이디어까지 주었다고 하는 걸 보면 보통 똑똑한 사람은 아닐 게 분명했다.
실제로 몽골이나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같은 주변국 부호들과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이 대한민국 병원으로 오게 되었던가.
다들 일 중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인 만큼, 치료만 받는 게 아니라 작은 미팅 한두 개라도 하게 되기 마련인데…….
그러다 보면 치료해 주는 의료진에 대한 이미지가 덧씌워져 일반적인 미팅보다 훨씬 성사율이 높았다.
“아빠.”
전직 국회의원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멀어지는 사이, 수혁은 이제 이현종에게 다가가 있었다.
이현종은…….
“크흠.”
아프기도 했지만, 이젠 쪽팔렸다.
왜냐면, 방금 가까이 온 사람이 수혁만은 아니어서 그랬다.
“그러게 왜 대회는 나가서…….”
원장 신현태가 뒤에 있었다.
“그렇게 골프가 탐이 났어요?”
차기 학장 조태진도 있었다.
둘은 이때 아니면 또 언제 이현종을 갈굴 수 있을까 싶어서 최선을 다해 주절거리고 있었다.
수혁이 나서긴 했지만 그래 봐야 다리에 쥐 난 것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사실 이현종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다리 아플 일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심지어 이현종은 딱히 만성 질환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운동도 게을리하는 편도 아니고, 먹는 것도 제법 조심하는 편이었다.
이 좋은 세상 될 수 있으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어서 그랬다.
“아빠. 옷 벗어 봐요.”
“응? 아니…… 이걸 왜. 여기서?”
“빨리. 아빠 쥐 난 거 아닌 거 같아요.”
“어…… 그래?”
“그래요. 이거 봐요.”
“아, 아니. 대체 언제.”
그랬던 이현종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더 심각해진 것은, 수혁이 어느새 신발을 벗기고, 양말까지 벗긴 다음이었다.
발이…… 창백했다.
“아직 맥박은 느껴져요. 근데 약해요. 확실히…… 아빠 혈압 정상이잖아요. 아니지, 지금은 운동했으니 살짝 더 높겠죠.”
“어…….”
그리고 발등 동맥을 촉진하고 나서는 얼굴도 창백해졌다.
확실히 수혁의 말대로였다.
맥이 약했다.
이게 시사하는 건…….
“그리고.”
“어어.”
“벗기라잖아. 수혁이가.”
“아니, 이 새끼들이. 구, 구획 증후군이잖아!”
“그걸 어떻게 그냥 알아. 만져 봐야지.”
“만진다고 진단이 되냐? 그게?”
“그러니까 만져라도 봐야지!”
“아니…… 이 미친.”
그의 추론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평소 이현종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놈들이 나서서 바지를 홀랑 벗겨서였다.
스케줄이 빡빡한 상황이다 보니 다음 팀 아니라 다다음 팀까지 그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캐디도 함께였다.
구경하던 동문들도 함께였고.
“아니…… 뭐 하는 거래?”
“소변?”
“아니……. 알 만한 양반이…….”
“아픈 겁니다, 아픈 거!”
“전립선이 아픈가……?”
별의별 소문이 생성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현종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개판이었으니까.
“구획이 단단하죠. 전외측이에요. 양측 모두…….”
“이거 뭐 병이라도 있나?”
그사이 어느새 진중해진 신현태와 조태진은 수혁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랑은 달리 직접 보고 나니 과연 보통 일은 아니라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