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0화 동문회의 밤 (2)
이현종이 힘 있는 사람들에게 구라 치고 있을 무렵, 신현태와 조태진은 자신들의 끗발이 먹히는 이들 앞에 있었다.
“아니……. 이게 뭐예요.”
“꿈인가?”
“뭔 말도 안 되는…….”
끗발 먹힌다고 하면 낮은 사람들일 것 같지만…….
다들 과장급이었다.
애초에 직급이나 짬밤 안 되는 사람들은 오늘 여기에 오지도 못했다.
보통 총동문회 참가 요청서 같은 게 날아오면 다들 짬 때리기 일쑤였지만 에잇브릿지 아닌가.
그것도 두어 달 전에 요청이 온 거다 보니 높은 사람들은 연초에 냈던 휴가 계획서를 싹 갈아엎으면서까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왔더랬다.
그리고 신현태와 조태진은 자신의 과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이들 앞에서 살인적인 스케줄을 보여 주었다.
“저는 이 주에는 그럼…… 월, 수, 금 7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이에요?”
“그렇죠.”
“말이 되나? 원장님?”
다들 과장이지만 뭐가 되었건 태화 의과 대학 동문이다 보니 그중에서도 제일 선배가 있지 않겠나.
여기선 신경외과 과장 최낙필이 그랬다.
몇 번인가 신세도 졌고, 실수도 했기 떄문에 쭈구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라지만, 그래도 성질깨나 괄괄한 사람 아닌가.
애초에 신경외과를 택할 수 있는 깡다구가 있는 사람이 마냥 착할 거라 여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뇌에 칼 대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만만하겠나?
‘탄핵당하고 싶으신가?’
머릿속으로 바로 원장 탄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그러한 뜻을 숨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양반이 이 뜻을 못 알아먹으면 어쩌나 하면서 노골적으로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후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현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웃어요? 지금 농담 같습니까?”
“자네는 내 말이 농담 같아 보이는 모양이지.”
쌔한 느낌의 말도 했다.
신현태는…… 대외적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말을 던질 때 상대로 하여금 움찔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뭐지?’
최낙필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뒤에 있는 과장만 벌써 열 명이 넘었다.
각 과마다 맡은 일정이 최소 4주…….
이런 얘기를 돌아가서 하면 어떻게 될까?
-어, 우리 과 교수들이 월, 수, 금 이렇게…… 4주 정도 7시부터 10시까지 학생 강의를 해야 하는데…… 케이스 위주로, 문제 내듯이 하면 돼. 자료는 지금부터 만들면 되고, 검수는 이수혁, 이현종 교수님이랑 조태진 교수님이 하신대!
-원장 하고 싶어서 꿍짝이 맞으셨구나!
-죽어라!
반란 일어난다…….
실제로 과장들 중 차후 원장단의 일원이 되는 것을 꿈꾸며, 과에 떨어지는 잡일 등을 막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마구잡이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낙필이 그러했다.
원장단에서야 과장이 알아서 기어 주면 좋으니 앞에서야 차기 원장단이네 어쩌네 해 주니까 진짠 줄 알고 그러는 건데…….
사실 위에 잘 보이겠답시고 자기 조직 고생시키는 놈을 뭘 믿고 원장단 시켜 주겠나 하는 생각을 원장단이 되면 다들 하게 되는 법인데, 권력에 눈이 돌아가면 보이지 않기 마련이어서 생기는 일이었다.
‘이건…… 진짜 죽어…….’
허나 그렇게 자기 조직을 팔아넘기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진료 좀 더 보고, 당일 외래 욱여넣고, 수술 무리하는 건…….
이것도 시키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의사로서 감수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허나 강의는…….
교수라면 원래 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대학 병원 교수는, 그러니까 임상과 교수가 해야 할 일을 열거해 보면 당연히 해야 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할 터였다.
일단 논문 써야지, 외래 봐야지, 수술해야지, 레지던트 교육해야지, 학회 가서 공부도 해야지, 그 와중에 틈틈이 학생 강의도 해야지.
이러니 학생 강의는 잡일 취급받기 일쑤인데…….
“그건 아니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병원의 목적이 뭐지?”
“네?”
“목적이 뭐냐고.”
해서 들이받으려 했는데, 신현태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원래 사람이란 예상치 못한 순간이 오면 다른 감정보다도 당황이 제일 먼저 찾아오기 마련 아니겠나.
아니, 지금은 황당했다.
그래서 묻는 말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어…….”
뭐더라.
병원 설립 이념 같은 게 로비 어딘가에 쓰여 있던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따위 것 알 게 뭐란 말인가.
아마 신현태도 모를 게 확실했다.
그렇지만 기왕 질문이 들어왔는데 원장님도 모르잖아요 라는 없어 보이는 말을 어찌 하나.
해서 눈만 껌뻑이고 있으려니, 신현태가 여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태화의 사회 환원 및…… 국내 최고를 넘어 세계 제일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 되는 것이 목적이지.”
“아, 네. 그렇죠.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원장님. 그러려면 의료진이 진료에만 신경 쓸 수 있는…….”
“후학 양성은 안 하고?”
“지금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야.”
“우리……?”
우리?
설마하니 그 우리가 신현태, 조태진만을 지칭하는 건 아니지 않겠나 싶었다.
대화의 흐름만 봐도 그렇지만, 일단 신현태가 말을 하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봐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우리. 태화 경영진의 판단이야.”
“아…….”
이런 시발.
경영진이 나오네.
사립이 이래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립도 뭐…… 이사회 입김이 장난이 아니고, 또 그 이사회는 정권의 입김에 휘둘려서 짜증 나기는 매한가지라고 듣기는 했지만…….
“자네도 알겠지만 작년 말…… 코비드 사태 이후로 우리 병원이 칠성과 아선을 완전히 따돌렸지?”
“그건…… 그렇죠.”
“자네가 잘해서 그랬나?”
“아니…….”
“아니면 뒤에 우르르 서 있는 자네들이 잘해서 그런가?”
어느새 신현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이렇게 말할 거라고 미리 합을 짜 둔 참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걸 다 알고 있는 조태진조차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원래 친절하던 사람이 얼굴 굳히면 더 무서운 법 아니던가.
신현태처럼 수십 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효과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이현종이 갑자기 벼락 맞은 사람처럼 원로 교수다운 말을 할 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효과였다.
“아니지. 사실상 통합진료센터 혼자 만들어 낸 성과야. 그걸 보고 태화 경영진에서 생각이 많아졌네. 지금까지는 돈 쓸 때만 반짝하고, 저쪽에서 돈 쓰면 다시 밀리고 했는데…… 이젠 아니잖아.”
“근데 그건…….”
“인재. 결국, 의료에서도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우리는 지금 타이밍이 아주 좋아.”
“네? 무슨 소리이신지.”
게다가 하는 말도 강경하다 보니, 최낙필 이하 모든 과장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었다.
조태진도 덩달아 그러고 있다가 아, 나는 신현태 편이지 하고 나서야 다시 편한 자세를 취했을 정도로 공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냉막한 분위기 가운데, 신현태의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작년에 그 성과 때문에 올해 우리 신입생들…… 우리가 다 채우고 나서야 칠성, 아선으로 나뉘어 들어갔어. 셋 중엔 과마다 다를 뿐, 딱히 더 좋은 학교가 없다는 세간의 인식이 완전히 뒤집어진 거지.”
“그…… 그건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올해 신입생은 진짜 전국 1등부터 쭉 줄세운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뭐…….’
그렇긴 한데…….
사실 의대 인기 많아진 게 요즘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지 않나.
20년 전에도, 그러니까 03, 04학번 때도 의대 다 돌고 나서야 제일 높은 공대가 채워지고 그랬다.
그럼 그만큼 의사들의 질도 올라갔나?
‘조금이야 올라겠겠지만…… 오히려 전문의 비율은 더 떨어지고…… 미용 의사들이나 많아지고 있지 않나……?’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사회가 변하면서 의사들도 변했다는 사실을.
이젠 예전처럼 어떤 뜻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원래도 적었지만 이제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것을.
“그런 친구들을 낭비할 수는 없어. 의과 대학에서 제대로 가르쳐야지.”
“그…… 그래서 이렇게 하신다고요?”
“그래. 수혁이 같은 사람을 바라는 건 아냐. 안대훈 정도 되는 놈들이 매년 한두 명씩 나온다고 생각해 봐. 우리 병원이 전세계 일등…… 못 하겠나?”
“으음…….”
말은 좋다.
그리고 사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시스템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수혁 정도 되는 괴물이 건재한 이상, 그 밑에 안대훈급 되는 놈들이 채워 준다면 세계 최고가 꿈이 아니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떨어지는 게…… 있나?
“전세계 일등이 되면 각 선진국에 병원이 더 생길 거야. 그럼 자네들에게도 기회가 가겠지.”
기회 운운해도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나이 들 만큼 들었는데 뭔 기회?
가 봐야 우리 과에 젊은 애들이나 가겠지.
해서 뭔데 이거 하고 있으려니, 진짜가 나왔다.
훅.
칼처럼.
“거기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판단이 드는 놈들은…… 기회는커녕 불이익이 가해질 거야.”
“네?”
가진 게 없을 때는 상이 크게 느껴지지만 이미 가진 게 많은 상황에서는 벌이 훨씬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신현태는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지 오래였고, 그 윗줄인 김다현은 더 깊이 깨달은 지 한참이었다.
“일단 그룹 차원에서 불이익이 있을 거야. 절대 원장단에 끼지 못하지.”
“그건…… 그렇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동문회…… 여기서 공론화 일으켜야죠?”
“아……. 저기 보이나?”
신현태는 이현종 쪽을 가리켰다.
그 앞에 있는 동문회장과 전직 국회의원, 그리고 동문회 쩐주인 성형외과 원장까지 셋이 핵심이었다.
“어…….”
“저분들은 태화의 영원한 집권이라는 우리의 목표에 이미 깊이 공감하고 끝까지 함께하기로 했어.”
“아니…….”
경영진도, 동문회도 한마음 한뜻으로 교수 조지기에 진심이라고?
최낙필은 너무 놀라서 말을 더듬거렸다.
“게다가 오늘 사고가 좀 있었던 거 알지? 그분들 누가 치료했지?”
“아……. 설마 그걸 노리고 골프를?”
“미쳤나. 골프 하면서 그렇게 아플 걸 대체 누가 예상해. 그냥 우연이지. 이로써 하늘도 우리를 돕는다는 게 증명된 셈이야.”
미친 소리 하면서 미쳤냐고 하다니.
뭐?
하늘이 도와?
조태진인가?
최낙필은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뒤에 있던 다른 과장들의 마음이 이미 꺾였다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할 수 없죠…….”
아니,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고 하는 게 옳을 터였다.
최낙필은 비뇨기과 과장을 돌아보았다.
진심으로 탄복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도 그럼 동참…… 하겠습니다.”
이비인후과 과장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동화책도 아니고 감복을 하나.
‘설마…….’
바람잡이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제야 생각났다.
소위 수혁교라는 사조직이 태화 의료원 내부에 아주 깊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슨 교 붙은 집단치고 합리적인 집단이 잘 없다는 것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