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7화 아직 한 발 더 남았다 (1)
박태식은 과장님께 불려 간 상황이었다.
불려 갔다고 하면 뭔가 대단히 부정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온 참이었다.
부정적인 느낌을 받은 건 오고 나서의 일이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셨지?’
높은 사람이 언짢아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필사적으로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알아보기 마련 아니겠나.
박태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설마.’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왜?
당장 이번 총동문회인지 나발인지를 다녀와서 씩씩대셨으니까.
처음 갈 때는 에잇브릿지 가신다고 그렇게 좋아하시더니만…….
다녀와서는 당했다고 했다.
뭘 당했나 하고 봤더니 과연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한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태화 의료원이라고 하면 다른 곳보다 훨씬 빡센 곳으로 유명한데 교수들을 거기서 더 갈아 넣으려고 하다니…….
‘이수혁 교수가 거기 주구 중의 하나지…….’
조태진이 차기 학장이니 그쪽이 메인이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라고 보면 되었다.
조태진이 이수혁, 이현종 부자의 수하라는 걸 모르는 놈이 누가 있나?
당장 조태진이 학장이 된 것만 해도 조태진 본인의 뜻은 아닐 터였다.
추대되던 당시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만약 그게 연기라면 병원에 있을 게 아니라 당장 충무로 아니, 헐리우드로 가야 마땅했다.
“그…… 부르셨습니까.”
문을 열고 한 다섯 발걸음 걷는 동안 여기까지 생각이 든 박태식은 최대한 공손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홍혜리 과장은 그런 박태식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번에 그 통합진료센터 말야.”
“네네.”
예상대로 통합진료센터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박태식은 하마터면 의자 다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막상 앉고 나서 보니 자신의 외유를 아는 것 같진 않았다.
“모르는 놈들이야 내가 아무 때나 들이받는 줄 알지만…… 나도 다 봐 가면서 하는 거잖아?”
“아……. 그렇죠, 과장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남들보다 좀 시야가 넓은 게 탈이긴 했다.
아무리 봐도 여기는 다리 뻗을 자리가 아닌 거 같은데 귀신같이 뻗는다든지 하는 일이, 박태식 교수가 과장님을 모시고 난 후로도 수두룩 빽빽이었다.
모시기 전에는 아무래도 나이가 더 젊으셨다 보니 더더욱 많았고.
하지만 뭐 여기서 입바른 소리 하는 게 뭔 도움이 되겠나.
과의 미래에도 그렇겠지만, 자신의 미래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봤는데…… 통합진료센터…… 실력은 있는 모양이야, 확실히.”
“그건…… 그렇긴 하죠.”
“그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통합진료센터의 실력에 대해서 이제 와서 떠드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과장님의 이어지는 말을 듣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치켜뜬 눈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적어도 과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아니, 아니. 소문이 그렇다……. 이 말이죠.”
“그렇지? 산부인과는 아주 독립적인 과야. 역사를 봐도 그렇고, 현재를 봐도 그래. 여성만의 장기를 다루는 것이 어떻게 일반적일 수 있겠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건 맞는 말이긴 했다.
확실히 기존의 다른 의학과 산부인과는 직접적으로 딱딱 연결이 되진 않으니까.
하지만…….
‘아까 보니까 이수혁 교수는 산부인과도 잘합디다……. 그것도 저보다…….’
막상 수술을 시켜 보면 아마 다르긴 할 거다.
눈이 좋으면 수술에 유리한 것은 분명 사실이고, 거기에 더해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즉각적인 추론이 가능하다면 압도적으로 유리해지는 것도 사실이긴 하나…….
결국, 그 수술을 시행하는 건 손이지 않나.
이 손이 뜻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숱한 노력과 동시에 역시나 조금 다른 종류의 재능이 필요한 법이었다.
허나 조언자로서의 수혁은 확실히 박태식보다도 위에 있었다.
무엄한 생각인데, 홍혜리보다도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바로 들이받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게다가…… 외과랑 흉부외과 놈들이 아주 깜찍한 계획을 가지고 있더라고?”
“네? 외과랑…… 흉부외과가요?”
“그래. 거기에 소아과까지.”
“소아과……?”
외과, 흉부외과, 소아과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산부인과.
슬프지만 이 네 개의 과는 대표적인 비인기과다.
심지어 이 중에서는 외과가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들 인기가 없다.
힘들고, 돈은 못 버는데 소송의 위험이 굉장히 높은 과들이니 당연했다.
이렇게 다들 어려운 처치라면 서로 도와야 마땅하겠지만…….
그런다고 처지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보니 역시나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래. 그 세 개 과가 이번에 개편되는 학과 과정에 아주 열과 성을 다할 모양이야.”
“왜…… 요? 가뜩이나 힘든데……?”
“자네는 이 과 왜 선택했어?”
어리둥절해하는 박태식을 향해 과장이 물었다.
바로 답이 나가지는 못했다.
왜냐면 너무 어리둥절한 상황이라서 그랬다.
비인기과라는 건 레지던트 지원이 떨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던가.
미달이 난다, 이 말인데…….
그런다고 환자들이 주는 건 또 아니었다.
전체적인 환자는 어떨지 몰라도 태화 의료원의 환자는 오히려 다른 곳의 질적, 양적 저하로 인해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다.
원래도 평균적인 업무량이 어마어마한 태화 의료원이니만큼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간 과들의 업무량은 가히 살인적이다, 이 말이었다.
“왜 이 과 선택했냐고. 솔직히…… 업무 환경이니 뭐니 다 구리잖아.”
그런 생각을 하느라 말을 못 하고 있던 사이, 질문이 이어졌다.
다행히 박태식에게 이 질문은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그만큼 매력이 있으니까요. 새 생명을 살릴 수 있고…… 또 그 생명을 잉태할 수 있게 하는 과는 우리 과뿐이지 않습니까.”
“그래, 맞아. 다른 비인기과들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 그러니까 아직도 소수지만, 부나방처럼 자기 미래 생각 못 하고 지원하고 있는 거고.”
“그건…… 그렇긴 합니다.”
흉부외과?
펄떡펄떡 뛰는 심장에 칼을 대고 고치는 행위…….
사실상 신에 도전하는 행위이지 않나?
소아과?
아기들은 안 좋아질 때도 급작스럽게 안 좋아지지만, 좋아질 때는 또 언제 안 좋을 때가 있었냐는 듯 확 좋아진다.
외과?
인체에서 가장 넓고 가장 다양한 장기가 들어가 있는 복강을 다루는 과다.
당연히 제일 많은 술식이 나와 있고, 또 앞으로도 다양한 술식이 나올 여지가 있다.
“이 새끼들……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고생 좀 해서 자기 과 어필하겠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레지던트 새로 쭉쭉 뽑게 되면 이번에 하는 고생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계산이겠지.”
“아니……. 다 어려운 처지에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고요?”
“그게…… 뒤통수라고만 보기엔 좀 애매해.”
“그건 또 무슨 소리이십니까?”
박태식의 질문에 홍혜리 과장의 얼굴이 묘해졌다.
오래 그녀를 모셔 온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감정의 변화가 있었다.
‘뭔가…… 되게 싫지만 인정해야 되는 상황인가 본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확히 박태식 교수의 생각과 일치했다.
“프락치라고 하기는 뭣하고……. 남편 쪽 라인 통해서 외과를 알아봤거든?”
“네네.”
“근데 묘한 소리가 있더라고. 이수혁 교수가 케이스만 잘 보는 게 아니라네?”
“그럼 무슨……?”
“수술도 잘 본대. 한 번만 같이 수술방 들어가 보면 무슨 소린지 알게 된다는데…….”
“아.”
“아? 자네도 뭔가 아는 게 있어?”
알죠.
아까 같이 들어갔다 왔거든요.
진짜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성장한 느낌을 받았달까?
솔직히 말하면 과장님보다도 몇 수 위…….
‘내가 미쳤나.’
이따위 말을 어찌한단 말인가.
김영호, 김진실 영상의학과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다면…….
역긴 ‘홍그사’가 있다.
홍혜리는 그냥 사자.
박태식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헛 나왔습니다, 말이.”
“그래? 근데 이 말은 흉부외과에서도 하더라고. 소아과야 뭐……. 이기자 교수님부터 해서 이미 다 넘어갔으니까 애초부터 그쪽 편이고.”
“흉부외과는 원래 전통적으로 이현종 교수님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습니까?”
“나빴지. 근데 이제는 그냥 완전 그쪽 편인가 봐. 어떻게 하면 이수혁 교수 초청하나 이러고 있대.”
“으음…….”
하긴, 그럴 수 있다.
김승규가 괜히 그따위 말을 했겠나?
게다가 체험도 했다.
거의 종교적인 체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이나 강렬한 체험이었더랬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실력이 있어. 그래서 나도 좀 끌리게 되었는데 말이야…….”
“네? 끌려요?”
“그래. 우리 과…… 까놓고 말해서 망했잖아.”
“과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야, 나 들어올 때랑 지금이랑 비교해 봐. 망한 거지.”
“그야…… 그렇긴 하죠.”
‘덮어놓고 낳다 보면 패가망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나올 만큼 출산율이 높았던 때가 있었다.
출산율 0.7, 인구 소멸 단계에 접어든 대한민국에도 그럴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 산부인과와 소아과의 위상은 진짜 장난이 아니었더랬다.
당장 수도권 유수의 종합 병원들인 차병원, 길병원의 전신이 산부인과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지금은?
지금은…….
“막말로 레지던트 한 명이라도 더 들어온다고 하면 강남역 나가서 춤이라도 추겠어. 그거에 비하면 야간 강의 같은 건…… 할 만한 일이지.”
“근데 그 강의…… 강의하는 법에 대해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하던데요.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립니까?”
그래.
홍 과장이 화가 났던 포인트도 바로 이 점이었다.
암만 임상과 교수들이 강의를 살짝 뒷전에 놓고 있다고 해도…….
짬밥이 몇 년인데 강의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단 말인가?
고생이야 맨날 하는 거라지만 이건…….
“근데, 그게 먹혔다는 걸 내과도 아닌 흉부외과랑 외과가 떠들고 있잖아. 심지어 수술이.”
“아…….”
박태식은 홍혜리 과장의 말을 들으면서 이 사람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건 강의가 아니라 그냥 임사 체험 같은 건데……. 임사 체험이라고 하기에는 또 실체가 있긴 하고…….’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 양반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까 싶었지만, 막상 설명을 하려니까 말이 안 나왔다.
단순히 혼날까 봐서는 아니었다.
수혁이 보여 준 건 진짜 체험을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는 거라 그랬다.
말로는 안 된다, 이건.
10년 넘는 경력을 지닌 의사의 실력을 단숨에 올려 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래서 말이야. 내가 한번 알아보려고 해. 이수혁 교수……. 뭐 연락을 어떻게 하면 되지?”
하여간,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고 박태식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답을 해야만 했다.
-아, 저요? 저는 여기 환자 좀 더 보고 가려고요. 생각해 보니까 공부만 하고 케이스를 많이 안 봤더라고요.
다행일까?
이수혁은 지금 산부인과 병동에 있다.
“그…… 병동 가시죠. 여기 있을걸요.”
“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