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270화 (1,270/1,303)

1270화 아직 한 발 더 남았다 (4)

‘용종양 자궁내막증…… 이라?’

‘들어 보기는 한 거 같긴 합니다만, 그게 자궁내막 말고 다른 데도 생길 수 있는 거였어요?’

장강명이 괜히 심술부렸다가 모든 환자는 VIP라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멋있는 말에 침몰하는 순간에도 홍혜리, 박태식 교수는 커튼 뒤에 서 있었다.

아니, 이제는 서 있지는 못했다.

바퀴 달린 조그마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대체 어떻게 산부인과 전문의 둘이, 그것도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애초에 전문의 뒤에 어중이떠중이라는 말이 붙을 수도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중에서도 뛰어난 사람들인데도 모르는 것을 내과 의사가 왜…….

‘있을 수는 있을 거야. 있긴 하겠지만…… 타목시펜이 이런 걸 일으킨다는 건 몰랐는데.’

‘그야 교수님이나 저나 유방암을 보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사실.’

‘그것도…… 그렇긴 하지.’

변명거리를 찾으려면야 얼마든지 가능하긴 했다.

홍혜리 교수야 산과 교수이지 않은가.

주로는 출산을 담당하지만, 그녀는 사실 태아 수술의 스페셜리스트다.

사실상 대한민국에서는 유일하고, 아시아 전역으로 범위를 넓혀도 그녀가 하는 수술이 가능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도 채 못 들 지경이다.

집도의라는 것이 지식만 쌓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사람인 데다가 그 분야가 한정되면 될수록 더더욱 강력한 스페셜리스트가 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주로 보는 분야가 아닌 것을 모르는 것은…….

전혀 부끄러울 일이 없는 일이었다.

‘나도 그렇지? 그렇잖아.’

그에 반해 박태식은 엄밀히 따져 보면 부인과다.

산과 임상 강사까지 하다가 부인과에서 사람이 모자란다고 해서 부인과 펠로우 1년하고 했다는 다소 특이하면서도 어찌 보면 비참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이력이 있긴 한데…….

그래도 지금 당장은 부인과다.

부인과가 출산 외의 여성에게 발생하는 병을 보는 과니 유방암을 봐야 할 것 같지만…….

이게 또 과끼리 영역 싸움이 치열하지 않았던가.

외과가 산부인과보다 훨씬 더 먼저 쇠락하게 된 바람에 적극적으로 유방을 가져가게 되었고, 병원마다 유방암을 주로 보는 과가 다르게 되었는데…….

태화 의료원은 외과가 유방암을 보고 있는 병원이었다.

‘난소 때문에 우리 과로 온 건데…….’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변명을 마구 늘어놓다가 문득 수혁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냥 우연히 떠올린 것은 아니고 마침 환자를 회복실로 옮기는, 그러니까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나서 그랬다.

“우리보다 잘 아는 분야가 있다니…….”

그와 동시에 또각또각거리는 지팡이 소리 또한 멀어져 가고 있다 보니 홍혜리 과장이 먼저 속삭이는 것을 중단했다.

얼굴을 돌아보니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요……. 대체 이게…….”

“이번 학제 개편에서…… 케이스 관련 강의는 각 과를 막론하고 이수혁 교수가 도와준다고 했지.”

“협조 안 하는 과는 안 하겠다고 했고요.”

“그렇지.”

홍혜리 과장은 처음 그 공문…….

이걸 공문이라고 해야 할지 농담 쪼가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던 것을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화가 아주 많이 났었더랬다.

각 과 케이스 강의해 주는 것을 협박조로 말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허나 눈앞에서 거의 강의라고 해도 좋음 직한, 정말이지 유려하기 짝이 없는 진료 과정을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

“이거 내가 잘못 생각했네. 기분 나빠할 일이 아냐……. 여기서 통합진료센터 동아줄 못 잡으면 산부인과는 영영 비인기과야.”

박태식 교수는 그런 홍혜리 과장의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아줄을 잡는다고 해서 비인기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서 그랬다.

산부인과가 가라앉고 있는 건…….

정치권이나 시민 단체, 의협을 포함한 그 어떤 단체에서도 자세히 말을 안 하고 있는데, 실은 사회 구조, 저수가, 높은 고소율 및 3D 과라는 인식 등 너무 복잡한 것들이 다 연관되어 있어서 그랬다.

일단 출산율이 0.7 찍는 나라에서 대체 어떻게 산부인과가 인기과가 될 수 있겠는가.

“네네, 그렇죠.”

하지만 홍혜리 과장의 표정이 너무 진중하기도 한 데다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알 것 같아서, 박태식 교수는 부리나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소아과, 흉부외과, 외과 같은데 레지던트 뺏기면 비인기과에서 소멸 과 되는 거지…….’

비인기과를 지원하는 애들은…….

아쉽게도 극소수에 해당하지 않겠나.

성적 때문이거나 혹은 진짜 소신 지원이거나…….

문제는 외과나 흉부외과는 저점 매수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는데, 산부인과, 소아과는 그런 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반등하려면 출산율이 올라야 할 텐데 지금 사회 분위기상 그게 되겠나?

학생 아니라, 인턴, 레지던트들하고 대화할 때도 크게 놀라게 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애요……? 저도 결혼 생각 딱히 없는데요.

의사면 그래도 먹고살 만할 텐데도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기성세대야 요새 애들이 결혼 안 하고 애 안 낳는 게 힘든 거 싫어하고, 이기적이라서라고 퉁 치겠지만…….

실제로 그로 인해 과가 망해 가는 상황에 놓인 산부인과 의사로서는 훨씬 심도 있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지금 20, 30대가 처한 상황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도 더 절망적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높은 확률로…… 대한민국 독립 이래 최초로 이전 세대보다 못사는 세대가 될 것 같지 않나.

“어차피 우리 과 올 애들은 또라이야. 근데 이수혁 교수, 이번에 보니까 진짜 또라이잖아. 또라이는 또라이끼리 통하는 법…….”

자동적으로 비관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게 된 박태식을 보면서, 홍혜리 과장은 과연 괜히 한 과의 수장이 아니라는 듯 건설적인 말을 해 대기 시작했다.

박태식이 듣기에도 그럴싸했기 때문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탄복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건 물어야겠어. 연락해야지. 대신…… 과 분위기를 좀 단도리 쳐야겠는데…….”

홍혜리 교수의 눈빛이 그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그제야 박태식도 이게 무작정 하겠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한 사람당 적어도 며칠에서 한 주 내지는 두 주까지는 죽을 고생을 해야 하지 않겠나?

모든 본과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뒤지게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노교수님들 쪽은 내가 알아서 할게. 어차피 나도 뭐 이틀 이상 드릴 생각은 없어.”

“젊은 애들은…… 그럼 제가 맡겠습니다.”

“온전히 맡기진 않을 거야. 내가 말하면 거부는 못 할 거 아냐.”

“그건…….”

“그렇지, 뭐. 나 소문 무섭게 난 거, 나도 알아.”

“하하.”

무섭게만 났겠습니까.

오히려 잘 모르는 지방 병원에서 홍혜리라고 하면 미친 여자로 알고 있는 곳도 많습니다.

실제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미친 여자라는 말이 딱히 억울할 것 같지도 않고요.

몇몇 사례는 실제로 직관하기도 했던 박태식은 말을 아낀 채 웃기만 했다.

“근데 그러다가 나갈 거 같아서 그래. 요새…… 사실 대학 병원 교수 타이틀이 예전만 같진 않잖아.”

“그것도 그렇죠, 확실히…….”

영상의학과나 피부과, 성형외과 같은 곳들은 바깥 상황이 좋으니까, 나가는 게 이해가 갔다.

헌데 다른 과들은 그렇지도 않지 않나?

그러면 남아야 되는데…….

이게 망해도 어지간히 망한 게 아니게 된 데다가, 확실히 보상이 없거나 적은데 고생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서 그런가. 비인기과는 오히려 더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기서 이렇게 개고생하면서 월급 받느니 개원을 하거나, 아싸리 미용 쪽으로 돌려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도 힘든데 여기서 더 힘들게 한다면 이탈이 있을 가능성이…….

이곳이 태화임에도 불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분위기를 좀 잡아 봐. 이게 이렇게 하면 레지던트들이 꽉 찰 수도 있다고.”

“확실히 그럴 거 같긴 해요.”

“그래, 그렇게만 돼도 주니어들 일이 팍팍 줄걸? 게다가 레지던트가 늘면 펠로우도 늘 거 아냐.”

“그렇기도 하죠.”

“레지던트 애들한테도 못 할 짓 하는 건 아닐 거야. 암만 우리가 출산율 박고 있어도……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야. 어떻게든 회복할 거야. 그때 되면 적게 배출된, 실력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는 부르는 게 값이지, 뭐.”

“그…… 그러길 저도 깊이 바랍니다.”

“그럴 거야, 인마.”

홍혜리 과장은 호탕하게 웃고는 박태식의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그러곤 바로 연구실로 돌아와 이현종에게 메일 답장을 보냈다.

처음 오고 거의 열흘 만의 일이었다.

-좋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이현종은 재활 치료받고 있는 터라 할 게 없는지 바로 메일이 아니라 문자로 답을 해 주었다.

그렇게 산부인과 또한 이 정신 나간 학제 개편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단지 그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흉부외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쪽은 뭔가 한 발자국 더 나가 있었다.

“그때…… 수술을 했다고?”

“네. 그렇다니까요? 아니, 대체 지금까지 뭘 들으신 거예요.”

“아니, 자네 지금 날 타박하나?”

“그럴 만도 하죠! 총동문회 때부터 계속 얘기하고 있는데……. 아, 혹시 청력 검사 하셨어요? 안 그래도 이낙준 교수님이 과장님 귀 얘기하시던데.”

“그거…… 그건 일단 넘어가, 인마. 아무튼, 수술을 그렇게 잘한다고……?”

“그렇다니까요. 알아보니까 외과 새끼들이 지들끼리 꿀 빨고 있었더라고요. 손도 손인데, 보는 걸 진짜 잘한대요. 근데 그 수술을 보고 나니까…… 그거보다 보는 걸 훨씬 잘한다면 대체 어떤 수준인지 모르겠어요.”

흉부외과 과장은 총동문회 당시 응급 상황에 대비해 당직을 섰던 조교수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태화 외과 애들 실력이 늘었다는 소문이 자자하긴 했다.

어디 밖에서 돌고 있으면 오히려 병원 홍보팀이 바이럴 잘 돌리는구나 했을 텐데, 내부에서 돌기 시작한 소문이었다.

그것도 깐깐하기로 소문난 수술방 간호사들과 마취과들 사이에서.

그중에서도 마취과에서 그랬다는 건 허투루 볼 것이 아니었다.

수술 시간에 진짜 예민한 애들 아닌가.

“그래? 흐음……. 근데 좀 그게…… 말이 되나 싶은데.”

“저도 그래 가지고 이 난리를 치는 거예요. 진짜 눈앞에서 보니까 믿지, 아니었으면……. 아이고, 진짜 괴물 그 자체라니까요. 다리만 안 불편했으면 우리 어쩌면 백강혁의 재림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예끼, 불경한 소리.”

“아……. 이건 제 실언입니다. 인정합니다.”

과장은 조교수를 조금은 불만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세상에 백강혁 교수님이라니.

전설 정도가 아니라…… 숫제 세계 수술사의 위인이지 않은가.

살아 있는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해외 유수의 교수들 또한 인정할 만한 사실이었다.

‘문제는 쟤도 그런 걸 모르는 게 아니라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감히 올렸다?

그렇다면 못 먹어도 고였다.

“일단 내 수술에 한번 불러 보지. 시간 조율해 봐.”

“어…….”

“왜?”

“그렇게 건방지게는 안 될 거 같은데요.”

“뭐 인마?”

“김승규 교수님도 직접 부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럼 삼보일배라도 해야 되는구나. 어쩌지?”

근데 그 고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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