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8화 태화가 좀 수상하지 않아? (1)
역적처럼 사죄하고 있는 펠로우에게 괜찮다고 할 때만 해도, 박태식 교수는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미 없어진 거 어쩐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이런 걸로 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왜?
빈말로도 전망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과에 와서……. 전문의 따고 나서도 자진해서 펠로우에 지원한 녀석이지 않나.
“하아…….”
그저 이상하게 자꾸만 한숨이 나온단 생각은 들었다.
그럼에도 딱히 문제의식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다루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원래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 건, 그중에서도 응급을 다루는 수술 과에서 일한다는 건 자기 자신을 끝없이 소모하는 일 아니던가.
그렇다 보니 나이가 좀 찬 교수들은 대학 병원 교수를 하기 위한 가장 큰 자질은 아이큐가 높은 것도 아니고, 성실한 것도 아니고, 참고 견디는 힘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박태식도 딱히 예외는 아니었다 보니 수시로 번아웃에 시달렸고, 그러다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더랬다.
“하아…….”
그때마다 별일도 없이 한숨이 나오더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걸 방치했다간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최대한 보도를 자제하는 편이지만…….
내부에서는 모를 수가 없지 않겠나?
생각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대학 병원 교수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해서 병원에서는 숫제 내부 인원들의 정신과 진료를 장려하곤 했는데, 덕분에 박태식은 이럴 때일수록 자기 마음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아…….”
그걸로 안 되면 이제 병원에 가서 약을 먹건 자기장을 때리건, 코에 뭘 뿌리건 해야겠지만…….
워낙에 학구적인 인간들이 교수를 하게 되는 편이다 보니 의식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분석을 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비단 박태식만의 일은 아니란 얘기였다.
아무튼, 그렇게 자기 내부를 관조해 보니 평소랑은 좀 다른 면이 있었다.
‘최근 2주간 우울한 적이 몇 번……. 음. 어제부터 오늘뿐이야. 근데 이렇게 한숨이 막 나온다고?’
주요 우울 장애가 되었건, 기분 부전이 되었건 간에 기준이 있지 않겠나?
헌데 이건 좀 이상했다.
‘나 왜……. 이걸 들고 있지?’
박태식 교수는 병원에서 들고 온 텅 빈 외장 하드를 돌아보았다.
어찌나 소중하게 꼭 쥐고 있었던지 땀이 송골송골 배어 있었다.
뭐, 전에는 이런 일이 잦기는 했다.
병원 일 마치고 연구할 땐 집에서도 많이 하곤 했으니까.
-일터와 집은 완전히 구분하시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한번 번아웃으로 세게 고생한 이후론 정신과 교수이자 친구의 말을 잘 듣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창 일에 미쳐 살 때도, 그러니까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이혼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오늘처럼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외장 하드 같은 일감을 들고 온 적은 없었다.
‘이 상실감은 뭐지.’
더군다나 박태식은 외장 하드를 내려놓는 것이 어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외장 하드를 들여다볼 때마다 아련하고 애틋하고 그랬다.
이런 감정은 진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일 말고는 딱히…….
애정을 품고 살지 않게 된 삶이라서 그랬다.
오죽하면 이혼을 하게 되었겠나.
진정한 반려라 할 수 있는 아내조차 잊을 만큼이나 일에 집중한 삶이었다.
‘이거 마치…….’
불현듯 자기와는 거리가 있는 질환이라 생각해서 한번 들여다만 보고 말았던 질환이 떠올랐다.
‘펫로스 증후군…….’
애완동물이 쓰던 물건만 보면 애틋해지고 그렇다지 않은가.
헌데 이걸 보고 있자니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애완동물조차 나는 기를 수 없는 사람이라 여겨 한 번도 키운 적도 없긴 한데, 머리가 좋다는 건 어찌 보면 공감 능력도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나.
친구가 펫로스 증후군에 시달렸던 기억을 떠올려 보니 딱 지금의 자신과 같았다.
잠시 그랬으면 모르겠는데 벌써 이틀 연짱이었다.
일을 하는 중간에도 한숨이 나올 정도니 상당히 중증이었고.
‘내가 애착을 보이던 게 사라졌다는 건데……. 이건…….’
아무튼, 대학 병원 교수답게 자신을 케이스 삼아 진료를 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 유별난 짓거리는 아니었다.
원래 대학 병원 교수들은 좀 이런 편이니까.
얼마 전에 정년 퇴임했던 이비인후과 교수는 회식 도중에 나 좀 이상한데, 하면서 자가 진단을 하더니 뇌경색 또는 출혈 같다고 즉시 응급실로 갔다지 않나.
오버하시네 했던 사람들도 실제 MRI에서 경색이 뜨자 다들 깜짝 놀랐다고 들었다.
예후?
거의 생기자마자 갔으니 당연히 좋았다.
‘내가 애착을 보였던 건 그때 수술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우울감이 시작된 날을 떠올려 보는데 기억나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이수혁.
그 젊디젊은 교수가 이만한 인상을 남길 줄은 몰랐는데…….
여전히 그때의 그 감각을 느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원래 같으면 그 수술 영상이 바로 여기, 외장 하드에 있었어야 하는데…….
우리 망할 놈의 펠로우와 죽일 놈의 레지던트 둘이서 그걸 날려 먹었다.
더 괘씸한 것은 그랬으면 당장 와서 말해야 했는데 물어볼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단 점이었다.
“개새끼들…….”
오랜만에 육성으로 욕이 터져 나올 정도로 화가 났다.
뭘 몰라서 안 했을 건 아니란 확신이 들어서 더 그랬다.
사실 최근 산부인과로 우수한 인재가 잘 안 오지 않나?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과라 별명이 UFO니 뭐니 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진짜 꼴등들만 오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의대 꼴등이라고 해서 완전 꼴통도 아닐뿐더러, 여전히 낭만이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난 내 길을 가련다 하는 애들.
-네? 뭐……. 어차피 의사 이전만 못하다고 하잖아요. 피부, 미용 안 하면 건물 세우고 하는 건 꿈도 못 꿀 텐데 그건 싫고……. 그럼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펠로우 녀석도, 레지던트 녀석도 이 비슷한 말을 하면서 들어왔다.
다른 과 간 녀석들이 건물 올릴 때 자긴 집 하나 못 사고 있으면 우울할 테지만, 기껏해야 외제 차 끌 때 국산 차 끌어야 하는 수준의 차이라면 감수하겠다는 말도 더한 채였다.
그런 놈들이다 보니 실력도 썩 괜찮았다.
헌데 그걸……. 놓친다?
인턴도 알아볼 거다, 그 수술은.
오늘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은 받을 거다.
“에이…….”
가서 속 시원히 화를 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다 나가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일단 과장님한테 뒤져서 과의 미래니 뭐니 생각할 필요도 없게 될 터였다.
그보단 역시 좀 얼굴이 팔리더라도 수혁을 다시 한번 수술방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
이번처럼 우연히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방법도 있긴 하겠지만…….
점점 더 바빠질 것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통합진료센터의 위명은 계속 올라가고만 있고, 그에 따라 수혁의 명성도 올라가고 있으니…….
“저기.”
“오……. 웬일이지?”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별 친분도 없는 칠성 병원 과장이었다.
아니, 친분이 없다기보다는 왕래조차 거의 없었다.
병원과 병원 사이라도 양호하면 또 모르겠는데 그 정반대이다 보니 숫제 사이가 나쁘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러니 삐딱한 말투로 전화를 받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일단 받긴 했잖아.
“네, 그 태화 박태식입니다.”
“알지. 자네, 홍혜리의 개잖아.”
개라는 말까지 참아야 하나 싶었지만…….
‘개는 충직한 동물이지. 만약 애완동물을 키운다면 개를 키울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또 개가 맞긴 했다.
절대, 절대로 과장님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더 잘 모실까만 골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가끔 쓴소리해야 할 타이밍을 그냥 넘기기도 하지만 간신이라서는 아니었다.
죽을까 봐 무서워서지.
그렇다고 과장님이 암군이라는 뜻은…….
“그나저나 왜 전화를 걸고 말이 없어.”
“아, 네.”
개라는 호칭이 아주 괜찮지는 않았는지 잠시 스턴에 걸렸더랬다.
다행히 상대가 그냥 끊지 않고 또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정신을 차린 박태식 교수는 간신히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 좀 어려운 케이스 있으시면 저 좀 알려 달라는 말씀을 하고 싶어서요.”
“왜. 이수혁 그 친구 흉내라도 내려고? 이봐, 내과는 태화한테 숙였을지 몰라도 우리 산부인과는…….”
“그런 게 아니라……. 이게 실은 칠성 탓입니다.”
“응?”
그뿐만 아니라 거짓말도 할 수 있었다.
잠시 태화와 과장님께 죄송하단 생각은 들었지만…….
이걸 발판으로 삼아 더욱 훌륭한 집도의로 성장하게 된다면 결국, 태화와 과장님께 도움이 되는 일 아니겠나?
“진짜 칠성이 산부인과는 압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그런가?”
역시 과장님.
그 앞에서 가끔 거짓말을 해야만 했던 적이 있다 보니, 이렇게 다른 놈에게 전화로 거짓말 치는 것쯤은 껌이 되어 버렸다.
정말이지 다방면으로 수련을 시켜 주시는 분이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박태식은 입을 청산유수로 놀렸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환자가 확 줄었어요……. 특히 과장님께서 보시는 부인과 관련 어려운 케이스가 너무 줄었습니다.”
“그…… 그런가?”
“요새 환자 많지 않아요?”
“환자야…… 늘 많지.”
“산부인과 다 죽어 가는데 거기만 많은 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많기는 여기도 많다.
아니, 오히려 더 많다.
하지만 이현종처럼 프락치 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남의 병원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겠나.
무엇보다 큰 병원은 환자가 늘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긴……. 아, 그랬구만. 흐음……. 말해 보게.”
라이벌…….
아니, 사실 태화는 이제 라이벌도 아니지 않나.
저 위로 올라가 버린, 이른바 구름 위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헌데 그놈이 먼저 대단하다고 해 주니 기분이 나쁠 수가 있나?
칠성 과장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옳거니.’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말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박태식은 알아보았다.
“이게 다 교수님 때문인데……. 제가 너무 실력이 떨어지는 거 같고 또 레지던트 애들한테도 미안해서요. 케이스라도 주시면 공부 좀 하려고 합니다.”
“아, 뭐……. 몇 개?”
“일반적인 것도 주시고요. 기왕이면……. 칠성 아니면 못 볼 것 같은 대단한 케이스도 있으면 좋겠는데요.”
“으음……. 우리 아니면 못 본다…….”
“네네. 부탁 좀 드립니다.”
“이런 거면 근데 자네가 아니라 과장이 해야지.”
“네? 저희 과장님 아시잖아요.”
“아, 뭐.”
흡족해진 칠성 과장은 그러마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진짜, 최고로 어려운 케이스를 찾아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 10분쯤 후에는 아선 과장도 동일한 명령을 내리게 되었는데 역시나 박태식의 세 치 혀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