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1화 태화가 좀 수상하지 않아? (4)
이현종도 신현태도 모두 진료를 위한 시스템 개선에 있어서는 돈 한 푼 아끼는 사람이 아니지 않던가.
특히 이현종은 다른 복지보다 이쪽을 우선시했었더랬다.
물론 정작 개선이 된 것은 신현태 때가 압도적으로 많긴 한데…….
그건 김다현 회장이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을 뿐더러, 드디어 원내 수익률 1위가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진료과로 넘어오기 시작한 덕이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역시나 수혁의 공이 가장 클 터였다.
아무튼, 그러한 덕에 원내 PACS 시스템 또한 속도가 장난이 아니게 되었다.
틱.
웅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CT가 쭉 떠 있었다.
Abdomen-pelvic CT, 즉 복부-골반 CT다 보니 영상 개수가 많은데도 그랬다.
‘음.’
박태식 교수로서는 맨날 보던 사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눈에 뭐가 딱 들어오거나 하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방대하니까.
드르륵.
그에 비해 수혁은 맨 위, 그러니까 폐의 하단 컷부터 시작해서 죽 내는데 그 표정이 참으로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내리는 것도 아닌 듯했다.
뭐라뭐라 중얼거리는데 그게 다 의미심장해 보였다.
“이상은 없고…….”
어디 어디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이게 그냥 하는 말이진 않을 것 아닌가.
만약 그냥 하는 말이라면 세상에 이런 미친놈이 또 없을 텐데…….
지금까지 보아 온 수혁의 모습을 감안해 보면, 미친놈은 맞지만 이런 방향으로 미친 건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딱 들었다.
“자궁 경부 인근에 대략 4cm가량의 저밀도 병변이 있네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수혁은 어느새 자궁 경부 근처까지 영상을 내친 참이었다.
당연하게도 거기서 보이는 이상 소견에 대해 툭 던졌다.
그러곤 박태식을 바라보았다.
뭔가 들은 게 있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박태식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답을 하진 못했다.
“교수님?”
“아, 네네. 그…….”
수혁의 재촉이 있고 나서야 입을 열었는데, 다행히 그 또한 짬 찰 만큼 찬 사람이다 보니 지나치게 뜸을 들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오늘 이 모임의 목적 또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고 있기도 했다.
“초음파에서 보였던 병변과 같은 병변이기 때문에……. 근종이 사실 제일 의심이 됩니다. 증상이 좀 이상하긴 한데……. 뭐 그렇게 급할 거 같진……. 음.”
해서 아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을 수 있었다.
아니, ‘그대로’라고 하면 좀 억울했다.
박태식도 CT와 초음파를 비교해서 봤으니까.
면밀히 살피고 나서 내린 결론은 칠성 병원 과장과 거의 흡사했다.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래도 근종 같다. 그러니 급할 거 없이 수술장에서 제대로 된 진단을 내려보자.
비단 이렇게 둘만이 아니라, 아마 전국에 있는 실력 좋은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똑같이 말하지 않을까 싶었다.
자연히 박태식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잔뜩 배어 있었는데…….
‘왜 이래? 표정이?’
말을 이어 나갈수록 수혁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라고 딱 짚지는 못하겠는데, 하여간, 언제부터인가 띡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냥 어디 불편한가 싶지도 않았다.
오해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노골적인 표정이었으니까.
이건…… 100% 자신의 말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말이었다.
‘아니……. 어디가 잘못된 거지?’
문제는 박태식의 머리로는 이게…….
아무리 검토를 해 봐도 전혀 떠오르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상대가 다른 놈이면 이 새끼야 라고 하겠지만 수혁이지 않나.
보통 태화 교수쯤 되면 누군가에게 이 사람한테 내가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어려운 법인데……. 수혁에게만은 예외였다.
절대라는 단어를 감히 쓸 수 있을 정도로 확신할 수 있었다.
뭔지 몰라도 언짢아하고 있다면 이쪽이 틀렸고, 저쪽이 맞았을 거라고.
“그…… 왜 그러시는지.”
“지적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문제가 있긴 한데요.”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어? 박태식은 산부인과 학회에서 떠오르는 샛별도 넘어 앞으로의 산부인과를 끌고 갈 차세대 동량으로 평가받고 있는 사람이지 않나.
칠성 병원 과장도 병원이 칠성이라 그렇지, 절대 실력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대한민국 3대 병원이 후질 수가 없었다.
‘다 틀렸단 말인가.’
허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수혁을 보고 있자니 자신감이 손안에 쥔 모래알처럼 스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해서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수혁의 말이 이어졌다.
여느 때처럼 또랑또랑한 눈을 하고서였다.
“일단 CT 소견과 초음파 소견이 같다는 것부터 짚어 보죠.”
“어……?”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긴 할 텐데, 박태식은 맑은 눈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설령 광인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기 어려운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수혁 같은 놈이 맑은 눈을 하고 있으면 대체 어떻게 무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건 좀 선을 넘은 거 아닌가 싶었다.
CT랑 초음파 소견은…… 어떻게 봐도 같아 보여서 그랬다.
이제 갓 전문의 딴 사람이라고 해도 사실 자궁 초음파와 CT는 자신 있게 볼 수 있을 텐데 칠성 과장이나 자신은 그 정도 수준도 아득히 넘긴 지 오래지 않나.
“초음파 소견을 보면, 자궁경부 앞에 확실히 뭐가 있죠?”
“아, 네.”
속으론 불만이 마구잡이로 번져 가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낼 수 없었다.
아니, 생각만큼 불만이 막 쌓이지도 못했다.
혹시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반발심보다 더욱 강하게, 수혁이 맞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었다.
“영상을 보면 아무리 크게 잡아도 대략 3.5cm 정도입니다. 이 수치도 되게 크게 잡은 거예요. 초음파 사용자가 미숙할 가능성, 뒤에 아티팩트가 심할 가능성 등등을 모두 잡아도 이 정도예요.”
“아…….”
그렇습니까? 라는 말을 박태식은 애써 참았다.
이건 좀 너무 멍청해 보이지 않은가.
같은 의미로 네? 에? 등이 있는데, 다행히 박태식은 비슷한 느낌을 자아내던 인턴, 레지던트, 학생들을 많이 보면서 반면교사 삼아 온 덕에 이러한 실수는 피할 수 있었다.
때론 침묵이 천 마디 말보다 귀하다지 않은가.
지금의 박태식이 딱 그 모양새라고 보면 되었다.
“그에 비해 CT를 보죠. 영상 상단에 보면 시행한 시간이 나오는데, 초음파 찍고 1시간 반가량 후에 찍은 겁니다. 사실 시간 선후 관계를 파악하는 게 기본이긴 하죠. 이걸 잘 안 보시는 거 같긴 한데…….”
“아…… 네.”
비난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억울하지도 않았다.
1시간 반 후에 찍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숫제 찍은 날짜 및 시간을 볼 생각도 지금까지는 딱히 해 본 적이 없었다.
암 수술하고 다시 보는 거라면 전후 비교를 해 보겠지만…….
같은 날 찍은 다른 영상을 보는데 시간을……?
‘이게…… 이수혁이구나.’
단지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한…….
이러한 것이 결국, 지금의 이수혁을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박태식이 감탄하고 있는 동안, 수혁의 말이 이어졌다.
“보면 여긴 최소 직경이 이미 4.3cm 정도 됩니다. 최대 직경은 4.6cm도 넘고요. 직경만 해도 상당한 차이이지만, 부피로 치면 어마어마한 차이가 되죠. 이게 뭘 뜻하겠습니까?”
“아…… 이거!”
“네, 1시간 반 만에 이렇게 자라나는 종양은 없어요. 특히 이렇게 균일한 조영증강 정도를 보이는 종양이라면 더더욱 없겠죠.”
“추, 출혈이구나. 근데, 이게…… 대체 어디서?”
“극히 드물긴 하겠지만 자궁동맥의 자발적 파열 가능성이 있습니다.”
“네? 그건 극히 드문 정도가 아니라…….”
자발적 파열이라니…….
파열만 놓고 봐도 드문 상황이지 않겠나?
자궁동맥은 경동맥처럼 표면에 노출이 된 동맥도 아니고 안에 숨겨져 있는 동맥이기에 그러했다.
외상이 없이 그냥 터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임신한 상태라면…… 이론적으로 가능하긴 했다.
뭐가 되었건 안에 아이가 들어찬 거니까.
그래 봐야 전 세계에 몇 케이스 보고되지 않았을 테지만…….
“네. 아마 전례 없는 케이스일 겁니다. 비임신 여성에서 자발적 자궁동맥 파열이니까요.”
“그럼 다른 걸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 위치에서 저렇게 빠른 속도로 출혈을 일으키면서, 복통과 같은 증상을 동반하는 질환은 그 외에 달리 없어요. 극히 드물지만 동시에 유일한 케이스입니다.”
“아…….”
유일하다고?
그런가?
박태식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저 CT 영상을 받은 것이 벌써 3시간 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사이에라도 바이털이 흔들려서 수술방에 들어갔을까?
모를 일이긴 한데…… 가능성은 떨어질 터였다.
차라리 다른 병동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산부인과 병동에서 산모가 아닌 환자 그것도 교수가 이따 수술하자고 했던 환자에 대한 관심도는 현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
“이거…….”
“네, 전화하세요.”
이거 야단났다 싶어서 전화기를 찾고 있으려니, 어느새 수혁이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있었더랬다.
이제 보니 이미 설명을 시작했을 때부터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대단하다 싶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설마 칠성만큼 커다란 병원에서 병동에 멀쩡히 입원해 있는 사람을 놓치는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모를 일이지 않나.
원래 제일 위험한 상황이란, 아직 진단이 되지 않은 상황이 아니라 잘못된 진단을 내렸을 때니까.
그 잘못된 진단이 원래 진단보다 응급도가 떨어지는 진단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네, 수술방입니다.
해서 전화를 걸었더니만 간호사가 받았다.
주변 소음으로 미루어 보건대 확실히 수술방이었다.
-야! 미친놈아!
수술이 잘되고 있진 않은 것 같았다.
‘어쩌나, 이걸.’
이번 수술보다 훨씬 급한 수술이 있을 텐데…….
박태식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
“아니, 이 전화가 급해요. 오전에 저한테 말씀해 주셨던 환자 얘기입니다.
-네?
-지랄하지 말고 끊으라고! 빨리 피나 들고 와!
“병동 환자 하나 지금 자궁동맥 파열로 출혈이 아주 심각합니다.”
-저, 과장님!
-왜 인마!
분위기는 개판이었다.
간호사도 아마 이 전화를 그냥 끊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자궁동맥 파열을 그냥 넘길 사람은 못 되었다.
산부인과 일을 하다 보면 진짜 죽는 사람을 자꾸 보게 되기에 그랬다.
동맥 어쩌구 해서 예후가 좋은 꼴이 거의 없지 않겠나.
“병동 환자…… 자궁동맥 출혈이라고…….”
“어? 어, 옳지. 와……. 지금 봤냐? 귀신 같이 잡은 거?”
“아, 네.”
“아무튼, 뭐라고?”
신은 있는 걸까.
다행히 그 순간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출혈이 딱 잡혔다.
그 덕에 여유를 되찾은 칠성 병원 과장은 욕설 대신 간호사를 돌아보았다.
“병동 환자 지금 자발적 자궁동맥 출혈이라고……. 이거 누구야. 태화 의료원 박태식 교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뭔 미친 소리야. 바꿔 봐.”
물론 욕이 아예 안 나가진 않았다.
너무 이상한 말이라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