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290화 (1,290/1,303)

1290화 휴가 (2)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네? 아니……. 휴가 가는 건데……. 이거 합법이래요.”

“사람이 법만 지키면 됩니까? 이건 매너지…….”

“그…….”

수혁은 다짜고짜 찾아와 강짜를 부리고 있는 산부인과 박태식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박태식도 그렇게 키가 큰 사람은 아니라 같이 서 있었으면 마주 보는 느낌이 들었을 텐데, 앉아서 회진 준비하고 있는데 대뜸 온 상황이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다.

보다 자세히 첨언하자면, 사실 교수 회진이라는 게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레지던트들과 병동 담당 간호사들과 함께 돌게 되어 있는 법이었다.

통합진료센터는 이현종, 이수혁 두 부자의 어마어마한 위력에 힘입어 특별한 일, 즉 돌발 변수가 거의 없는 곳이기에 지금도 다들 같이 있었다.

‘뭐 하는 사람이지.’

‘왜 이러는 거야?’

‘우리 교수님이 매너 없이 구는……. 그럴 때도 있긴 한데 보통 환자 볼 때만 그러는데……?’

시각은 저녁 7시.

당직의가 아닌 사람들은 이 회진만 돌면 퇴근이었다.

물론 본인이 원하거나 혹은 안대훈 기준 실력이 모자라는 경우라면 10시까지 강의를 들어야겠지만, 설령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해도 일해야 한다는 듀티에서 벗어난 상태가 되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걸 방해하는 놈을 노려보게 되는 건 인성과 관련 없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매너가 없으신 건…….”

수혁도 오늘은 퇴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장 내일 비행기 타고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오전인 것은 아니었지만, 김성진, 김인수, 장종우, 이태원과 더불어 하윤이 남게 된 마당이기에 그랬다.

하윤도 분투하긴 했지만…….

상대가 나빴다.

원래도 미친놈인데 수혁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가장 미친놈조차 될 수 있는 안대훈이었으니.

“교수님 아니신가요……?”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박태식 교수도 사람이었다.

홍혜리 과장에게 단련되었고, 또 이혼 등 다사다난했던 인생에 단련되었지만 안대훈처럼 미쳐 버린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 건 저 뒤에 숨은 녀석들 때문이었다.

신경외과 구세정, 흉부외과 과장 그리고……. 지금까지 이 꿀통을 혼자 독점하려 했던 외과 놈들까지도…….

모조리 케이스를 공물 삼아 바치면서 수술 한번 들어와 달라 우기고 있었더랬다.

“케이스 들고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갔다 와서 봐 드릴 거라니까요? 지금 회진 돌아야 합니다, 교수님.”

박태식도 당연히 동참하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이번에 급히 두 개나 더 모았다.

아직 산부인과 홍혜리 과장은 통합진료센터의 진단적 우수성만 파악했을 뿐, 수술에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는 아예 모르는 상황이지 않은가.

해서 관심이 없는데…….

과장 성격에 그런 걸 알게 되는 순간 산부인과에서 모으는 어려운 케이스는 전부 홍혜리 수술 우선으로 빠지게 될 터였다.

“갔다 오면 늦습니다……. 그 안에는 해결이 될 거 같아요!”

“그럼 어려운 케이스는 아니죠.”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해서 무리를 했더랬다.

적이라 할 수 있는 아선과 칠성 모두 건드리면서까지.

헌데 수혁이 해외로 나간다고 하니 맥이 탁 풀렸다.

허탈한 마음으로 뭐 할까 하다가 그냥 왔는데…….

온다고 해서 뭔가 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하지만 와서 보니 저 새끼들도 한마음 한뜻으로 와 있지 않던가.

뭔가 어필을 하려면 지금 이렇게 진상이라도 부려야 할 터였다.

“아니, 이 박 모……. 이해하겠습니다.”

원래 진상부리다가 한번 숙이면 상대는 고마워하기 마련이라 그랬다.

물론 진상부린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와서 한 2, 3분 땡깡 피운 걸로 나가리 되진 않을 거 같았다.

칠성, 아선도 아니고 같은 병원 사람인데 설마하니 그러겠나?

게다가 어려운 케이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이 수혁이니만큼 그 케이스를 들고 올 사람을 급하게 내치진 않을 거란 계산도 있었다.

“그……. 감사합니다.”

“대신이라고 하면 뭣한데.”

“네네.”

“돌아오시면 제 케이스부터 봐 주십쇼. 그때까지 제가 더 어려운 케이스 모아 오겠습니다.”

“대신 수술방에 들어가야 되는 거죠?”

“그렇죠.”

“뭐……. 알겠습니다.”

과연 수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태식은 후후 하고 웃으며 뒤로 돌아섰다.

그 순간 다른 외과계 교수들과 눈이 마주쳤다.

‘혼자 살겠다고 저 지랄 하는 것 좀 봐라?’

‘미친놈인가……?’

흉부외과 과장과 외과 교수 둘이 눈으로 욕을 했다.

하지만 감히 앞으로 나서진 못하고 있었다.

남의 센터 기둥 뒤에 숨어 있으니까 좀 모자라 보이는 것이지, 따지고 보면 나름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지 않나.

나쁜 짓 해서 성공한 것도 아니고 남 살리는 기술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자부심이 있지 않겠나.

하다못해 자존심이라도 있기 마련이었다.

뚜벅뚜벅.

허나 그중에서도 튀는 사람은 있었다.

신경외과 구세정.

남들이 다 뭐 하러 신경외과같이 힘든 데를 가냐고, 여잔데 되겠냐고 할 때도 고집을 아니, 신념을 지켰던 그녀는 막 수술장에서 나온 탓에 피도 채 닦지 못한 크룩스를 신고서 수혁에게로 향했다.

‘어…….’

‘뭐지?’

그러곤 수혁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이제 막 회진을 돌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수혁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네, 교수님. 내일부터 미국 학회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네. 그래서 케이스 들고 오셔도 당장은 볼 수가…….”

“하하. 학회 가시는데 그런 염치없는 부탁이나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구세정은 그런 수혁을 보며 껄껄 웃었다.

그러곤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는데 꽤나 두툼했다.

“이거 가지고 가시죠.”

“이건……?”

“전에 학회 갔다 와서 남은 건데……. 달러입니다.”

“네? 아니, 이런 건 조금…….”

“전에 도움도 받았지 않습니까. 그때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사실 그 환자 VIP였거든요. 그 보답이라고 하긴 뭣하고……. 학교 선배이자 동료가 쓰고 남은 거 주는 셈 치면 됩니다.”

“아…….”

VIP?

아니다.

물론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모든 환자가 의사에게 VIP인 것은 맞겠지만…….

일반적으로 VIP란 적어도 지인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구세정과 그 환자는 말 그대로 의사-환자 관계에 속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수혁이 알 게 뭐란 말인가.

상대가 이런 것으로 거짓말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수혁보다는 조금이나마 영악하다는 바루다조차 의심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만 들었다.

“혹시 어려운 케이스 있으면 또 부탁드릴게요.”

“아……. 네, 교수님.’

“하하. 딱딱하게 교수님, 교수님 하는 것보다는……. 과도 다른데 선배라고 해도 돼요.”

“아, 네. 선배님.”

거기에 더해 호칭 정리도 친근하게 해 주는 센스까지 있는 사람 아닌가.

이현종과 신현태는 최낙필이 수혁이 다쳤던 당시 보여 주었던 언행 때문에라도 신경외과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수혁은 별생각이 없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이런 모습을 보이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와서 진상 부리다가 굽히고 간 박태식보다야 단 몇백 달러라도 쥐여 주면서 간 구세정이 몇백 배 낫지 않겠나.

‘이런 미친……?’

‘저 불여우 같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기둥 뒤에 남은 외과, 흉부외과 교수들은 그럴 만한 깜냥이 못 되었다.

보고 나니까 그래, 외국 나간다는데 남은 달러 줄 수 있겠구나 싶긴 했지만…….

언제나 세상은 미리미리 움직이는 자들에 의해 굴러가는 법 아니겠나.

“그래, 이 환자는 퇴원하도록 하고……. 나 학회 가 있는 동안 김성진 선생이나, 김인수 선생 선에서 해결 안 되는 환자들은 무조건 전화해요. 개인적으로 오는 의뢰 다 접고, 센터 환자 진료에만 집중할 테니까. 시차 고려하지 말고요.”

“네, 교수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그들은 스슥 숨은 채로 수혁이 회진을 마무리하는 것까지 바라보았다.

그동안 수혁은 구세정 교수가 건네준 봉투를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학 병원 교수들이 마냥 똑 부러지는 사람들인 줄 알겠지만, 실제론 머릿속에 의학 지식만 욱여넣은 경우가 태반이지 않은가.

애초에 다른 방면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고, 관심이 있어도 시간이 없어서 액션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특히 수혁은 그중에서도 심한 놈이다 보니 환전은 공항 가서 좀 더 비싸게 하지 뭐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달러가 들어온 상황이었다.

‘구세정 교수님……. 좋네.’

생각할수록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호감을 박고, 하윤과 함께 나가 저녁 먹고 생맥까지 한잔하고 헤어졌다.

그냥 헤어진 것은 아니고 맥주집 앞에 우창윤이 왔다.

명목상 하윤을 데리러 온 것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옆자리에는 하윤이 아니라 수혁이 탔다.

“아빠……?”

“넌 집에서도 얘기할 수 있으니까. 근데 우리 사위는 그게 안 되잖아.”

“아니…….”

“일단 조용히 해 봐. 내가 부탁받은 게 있어서 그래.”

우창윤은 최근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수혁 토템을 박으면 수술을 잘하게 된다는 괴담이 있어요.

-그거……. 진짜 괴담 아닙니까?

급하다고 해서 가 봤더니 이상한 말을 꺼내길래, 우창윤은 좀 지루해져서 상대의 머리카락이나 살폈더랬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가발을 끼게 된 이후로는 나이 좀 많은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이 사람도 혹시 가발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어서 그랬다.

관찰한 결과 그건 아니었는데…….

-진짜건 아니건 확인은 해 봐야 합니다. 이거 통계를 좀 봐요.

-통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여전히 늘어놓고 있었다.

이런 놈이 대머리가 되었어야 했는데 하는 순간, 통계를 들먹였다.

그렇다면 암만 주장이 이상하더라도 듣는 시늉은 해야만 하는 법이었다.

의학에 있어 통계란 학문이 그렇게 중요한가? 싶을 수도 있을 텐데…….

19세기 악에 가까운 의료에서 현대 의학에 이르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페니실린도 아니고, 엑스레이도 아니고 통계학이다.

오죽하면 의료 통계학이란 학문이 따로 있고 거의 모든 대학 병원에서 통계팀을 따로 운영하겠나.

-얼마 전부터 태화 의료원 수술 성공률이 올라갔어요.

-음……. 영 점 몇 퍼센트 수준 아닙니까?

-사실 그것도 대단한 건데……. 과별로 보면 신경외과, 흉부외과, 외과가 올라갔어요. 그중에서도 외과는 4% 정도 개선되었습니다.

-4%라……. 원래도 잘하던 곳이죠?

-네. 그뿐만 아니라, 교수별 결과를 보면 김승규, 장준혁. 이 둘이 어마어마하게 실력이 늘었어요.

-열심히 하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아무리 통계가 유의미해 보여도 사람 토템 박아서 실력 키운다는 건 좀 그랬다.

해서 시니컬하게 말했더니 상대가 발작했다.

-갈!

-?

-이 둘이 이수혁 교수를 수술방으로 자주 부른다는 믿을 수 있는 프락치의 증언이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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