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54화 (54/236)

<제54화>

“여기도 오랜만이다.”

숙소에 들어온 한진성이 감상에 젖은 얼굴로 우리의 숙소를 바라보았다.

추억에 잠긴 듯 거실을 살폈다.

“거실도 많이 바뀌었네. TV도 좋아지고. 소파는 그대로네.”

“몬스터즈 선배님들도 여기서 숙소 생활을 하셨습니까?”

“당연하지. 우리도 GH 소속인데. GH의 남자 아이돌들은 다 여기서 시작한다고 보면 돼. 여자 아이돌들은 이 근처 다른 곳을 썼다고들 하는데…. 잘 모르겠다. 거긴.”

너털웃음을 짓던 한진성이 내 방을 가리켰다.

“잠깐 봐도 돼?”

“예, 저기 물건은 건드리지 마세요. 우주 물건이거든요.”

“당연히 안 건드리지. 그냥 보기만 하려고, 여기가 원래 내가 쓰던 방이었거든.”

“정말입니까?”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해.”

한진성이 키득키득 웃었다.

“내 방을 우리 후배들은 어떻게 쓰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문을 열자, 2층 침대가 보인다.

“이야, 여긴 똑같네. 내가 여기에서 카이랑 같이 방을 썼는데.”

익숙한 이름이었다.

카이라고 하면 게임에서도 작곡으로 유명한 A급 아이돌 연습생이었다. 전용 작곡 스킬 때문에 성능을 원하는 유저들이 자주 애용했던 멤버였다.

성격 디버프가 있어서 은근히 육성하기 까다롭긴 했지만, 분명 특급 멤버는 맞았다.

어쩐지.

그런 멤버가 함께 있으니 몬스터즈가 성공하는 게 당연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몬스터즈에서 한진성과 함께 작곡을 담당하는 프로듀싱 멤버였다.

특히 작곡에 있어 걸출한 재능을 보였는데, 아이돌은 물론이고 힙합 쪽에서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래퍼들과 프로듀싱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애들은 모르고 있던데요?”

“모를 법도 하지. 우리는 데뷔하고 2년 차에 바로 숙소를 나갔거든. 다들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이 갖고 싶다고 해서. 그래서 겹치지 않았을 거야.”

“아하.”

“아마 이서 형이 말해주지 않은 건, 너희한테 부담 주지 않으려고 그랬던 걸 거고. 애들에겐 영광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부담이 되잖아?”

“그렇긴 하죠.”

황이서도 데뷔도 하지 않은 애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얹기 싫었을 것이다.

“여긴 여전하네. 진짜….”

방을 둘러 본 한진성의 입꼬리가 나긋하게 올라갔다.

데뷔 때를 추억하는 걸까.

눈가도 촉촉하게 젖었다.

“크흠,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버렸네.”

한진성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원래는 여길 감상하려고 온 게 아니라서…. 흠흠.”

한진성이 엄지를 치켜들며 밖을 가리켰다.

“밖으로 나가자, 내가 괜찮은 고깃집을 하나 예약했어.”

“선배가 사는 거죠?”

“따라오기만 해. 형이 사줄게.”

공짜 고기를 마다할 이유는 없지.

“잘 먹겠습니다!”

* * *

별도의 방이 있는 고깃집을 예약했다고?

-선빈당.

이름만 들어도 엄청 비쌀 거 같은 고깃집이었다.

심지어 내부는 룸 형태로 완전히 바깥과 분리가 되어 있는 방을 배정해 줬다.

적당한 프라이버시와 좋은 분위기.

“여기 엄청 비쌀 거 같은데요.”

“엄청 비싸. 후배랑 같이 먹으려고 통 크게 사는 거니까 이번 기회에 많이 먹고 가.”

“감사합니다.”

치이익!

고기가 구워지고, 첫 점을 집어먹었다.

맛이 기가 막혔다.

한진성이 기가 막힌 맛집을 알고 있었네.

보통 비싼 고깃집의 경우엔 고기를 굉장히 신선한 걸 사용한다. 그렇다고 고기만 좋으냐? 그것도 아니었다.

고기의 탄력은 물론, 숯불 특유의 향이 스며들어 그 맛을 더욱 배가시켰다.

고깃집에서 은근히 중요한 게 이 소금이랑 양념인데 이것도 훌륭했다.

“맛있네요.”

첫 점을 집어먹은 내 감상평이었다.

간단한 한마디지만, 굉장히 진심이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진성이 물었다.

“아이돌 일은 할 만해?”

“생각보다는 저한테 맞는 거 같습니다.”

“건하 너다운 대답이네.”

고기를 한 점 먹은 나는 진성을 바라봤다.

이미 탑급의 연예인이 되어 있는 한진성.

그가 얼마나 연예인에 걸맞은 인재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최고의 아이돌.

내 손으로 세계 최고가 되었던 한진성이기에 더 잘 안다.

내가 직접 키웠던 아이돌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라.

만약 지금의 몸이 아닌, 원래의 몸으로 만났다면 감회가 새로웠을 거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한진성은 단순히 내가 공략했던 캐릭터가 아니었다.

내가 넘어야 하는 산.

데뷔하고 활동하면서 한 번 더 느꼈다.

한진성이라는 벽이 얼마나 크고 높은 존재였는지.

‘진엔딩을 보기 위해선 저 한진성을 어떻게든 넘어야만 해.’

그를 이겨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그래미를 손에 얻을 수 있을 거다.

“어때? 그래미를 먹겠다는 그 꿈은 변함이 없어?”

한진성이 물었다.

처음 내가 그를 만났을 때 한 말.

그래미를 손에 쥐겠다는 내 말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늘 노리고 있어요.”

“그 말은 나를 밟고 올라가겠다는 뜻인 거지?”

“…예.”

“그럼 말이야….”

젓가락을 툭툭 두드린 한진성이 골똘히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노력해야겠더라.”

“…….”

“데뷔 싱글 앨범으로 놀라운 성적을 거둔 건 맞는데, 아직 한참 부족한 거 같거든.”

솔직한 피드백이었다.

“한국에서 1등을 하지 못하면 세계는 꿈도 못 꾸는 거 알잖아.”

“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실력으로는 그래미는커녕 한국 1등조차 얻기 어렵다는 걸.

확고한 팬덤이 갖춰지고 우리만의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진효원과 합작품을 만드는 것 또한 그를 위한 일환이고.

목표를 여전히 품에 안고 있는 한, 중간에 좌절할 일은 없을 거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내지 않고 우리가 가진 단점과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극대화하면 얼마 안 가서 국내 1등은 물론이고, 언젠가는 세계 1등, 먹을 수 있을 겁니다.”

“한 번 실전을 뛰어보고도 같은 생각을 하는 거야? 여전히 그래미를 먹을 수 있다고?”

“예. 지금의 멤버들이 있다면요.”

“세계의 벽은 높아. 한국에서 1등 하는 걸로는 먹을 수 없을 수 있어.”

“상관없습니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면 되니까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기는 따라올 겁니다.”

“꿈같은 얘기지만….”

한진성이 나를 주시했다.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건치를 드러내는 시원한 미소를 보였다.

“그 믿음과 열정이 마음에 드네.”

* * *

한진성은 윤건하의 당돌한 생각이 데뷔를 하고 나면 금방 꺾일 거라 생각했다.

프로 데뷔를 하지 않은 연습생의 치기, 패기.

이 정도로만 생각했으니까.

현실을 깨닫고 목표를 조금은 수정하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건하는 달랐다.

그의 목표는 확고했고, 데뷔를 통해 더 단단해졌다.

‘건방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실력이 없는 자의 치기 어린 목표만큼이나 어리석은 게 없었다.

하지만 한진성은 건하의 목표가 듣고도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건 아마.

‘자신감을 뒷받침해 주는 실력 때문이야.’

빠르게 발전하는 실력 때문이었다.

데뷔하고 무대를 이어갈수록 발전하는 게 눈에 보였다.

활동하는 중에도 발전하는 게 보일 정도니,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기대가 되는 후배였다.

동시에 경계도 하게 되었다.

자신을 넘을 거라며 확신하는 후배.

그게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다.

가슴에서 열정이 끓어올랐다.

이런 기분이 얼마 만이었지?

한국에서 1등을 찍고 음악상을 받고 여기서는 더 받을 게 없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한진성은 처음으로 열정을 잃어버렸다.

세계의 높은 벽을 마주하고 더는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을 했을 때, 그나마 남은 열정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저 관성적으로 앨범을 준비했고, 해외 투어를 다녔다.

더 좋은 앨범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무대를 문제없이 끝낼 수 있을지 생각했었다.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걸 티 내지 않기 위해 해외로 도망치듯 다녔고.

그때 건하를 만났다.

세계 무대에서 상을 받겠다는 건하를.

국내에서 자신을 넘고 1등을 찍는 것도 모자라 세계에서 상을 받아 보겠다는 이 발칙한 후배를 보았다.

어리석은 일이다.

한진성은 알고 있으니까.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어려운 일인지.

한 번 꺾여봤으니 더욱 잘 알았다.

그런데.

웃기는 소리라며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진짜 해낼 거 같았으니까.’

그때 잃어버렸던 의욕이, 열정이 다시금 살아났다.

본인을 넘겠다는 후배에게 지는 건 자존심이 용납 못 하거든.

아무리 귀여운 후배라도.

같은 필드에서 경쟁하는 선수였다.

“까마득한 후배에게 질 수 없다는 거 알지?”

* * *

“알고 있습니다.”

한진성을 넘어 그래미를 타겠다는 건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여전히 목표를 바꾸지 않았다는 내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한진성은 내가 아끼는 캐릭터임은 분명했지만, 그에게 밀려 진엔딩을 보지 못하는 불상사는 피하고 싶었다.

“언젠가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네.”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님을 넘어서 제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거든요.”

“순순히 내줄 수는 없다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지글지글.

고기가 굽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아까운 고기가 조금 타버렸다.

“기대할게. 네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그 순간을.”

“금방 쫓아가겠습니다.”

그보다.

“우선 고기 좀 더 먹을게요. 이러다 다 타겠네요.”

“먹어. 내가 괜히 불편하게 했네.”

“이 집 고기가 진짜 맛있네요.”

“그치? 내가 생각보다 맛집 탐방을 좋아하거든. 언제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내가 알고 있는 집들 전부 소개해 줄게.”

그는 어느 때보다 신나 보였다.

“알겠습니다.”

“많이 먹어야 힘을 낼 수 있으니까.”

“그러다 제가 선배님 자리를 뺏으면요?”

“그때는 건하 네가 나한테 사줘야지.”

말을 마친 한진성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참고로 한진성이 사준 고기는 진심으로 맛있었다.

* * *

“왜 전화를 안 받아?”

“미안, 후배랑 밥 먹느라.”

“저번에 말했던 그 후배?”

“응.”

“그 후배 진짜 좋아하네. 그렇게 자주 만나면 나 질투 나는데.”

집에 도착한 한진성의 눈앞에 멋대로 그의 집 비밀번호를 찍고 들어온 직장 동료가 있었다.

카이.

몬스터즈 멤버로, 숙소 생활할 때 같은 방을 썼던 룸메이트이자, 그와 가장 사적으로 친한 멤버였다.

동시에 가장 한진성을 귀찮게 하는 멤버였다.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가끔 곤란할 때가 있었다.

프랑스계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의 피를 반반 물려받은 그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장점만 딱 맞춘 그런 얼굴을 지녔다.

그의 각진 턱은 한진성도 부러워할 정도였다.

“무슨 일이야?”

“그냥 같이 술이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연락을 안 받아서 그냥 집까지 무작정 찾아왔어. 우리 진성이 의외로 외로움 많이 타잖아. 그래서 이렇게 왔습니다. 짜잔.”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에 회와 함께 소주가 놓여 있었다.

“일부러 너 좋아하는 거 세트로 사왔다. 나도 오랜만에 술 좀 먹으려고….”

그때, 카이가 한진성에게 몸을 기울이며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킁킁, 몸에서 소고기 냄새가 난다? 설마 소고기 먹었어?”

“응, 오랜만에.”

“그 후배 때문에 소고기까지 먹은 거야? 너 고기 싫어하잖아.”

“그렇게 됐다.”

“와, 이건 진심으로 질투 나는데. 천하의 한진성이 자기가 싫어하는 고기를 후배를 위해 사줬다고? 저번에 내가 가자고 했을 때는 그렇게 싫어했잖아!”

이래서 지금 만나기 싫었는데.

사실 건하한테는 고기를 좋아하는 척했지만,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그리 선호하진 않았다.

진성이 좋아하는 건 닭고기와 생선.

돼지와 소고기는 특유의 잡내가 심해서 입도 대지 못하는 진성이었다.

그러나 건하가 휴가인데도 혼자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고깃집을 예약했다.

“고맙다. 덕분에 좋은 고기 먹었다.”

카이가 그렇게 가자고 노래를 불렀던 고깃집이었다.

맛있는 고깃집에 가서 먹으면 달라질 거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카이한테 듣지 않았다면 소고기가 아닌, 해산물 가게를 찾아갔을 거다.

기운 차리는 데는 고기만큼 좋은 게 없으니, 내린 결정이었다.

“설마 선빈당 갔어?”

“내가 아는 고깃집은 거기밖에 없어서.”

“으아아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가자고 할 때는 절대 안 간다고…. 와, 배신감, 미칠 거 같아. 아아, 지금 현기증 나.”

카이가 머리를 붙잡으며 휘청거리는 시늉을 했다.

“아끼는 후배가 첫 휴가에 혼자 있다는데 그럼 어떡해.”

“아니, 나도 불렀어야지! 선빈당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으아아아.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 A부터 Z까지 다 알려줄 수 있는데. 그 친구는 나랑 같이 못 먹은 걸 후회할 거야. 진성이 너도옷!”

“어차피 나 몇 조각 안 먹었어. 거기 메뉴 중에 등심밖에 못 먹었다.”

냉면은 맛있더라.

“억울해서 안 되겠어. 이거 가지고 갈 거야. 나 혼자 먹을래.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카이가 사 온 회랑 술을 쥐었다.

“에이, 왜 그래.”

“나 진짜 섭섭해서 같이 못 먹어.”

이럴 때 붙잡지 않으면 2주는 간다.

그렇게 한 번 삐지면 활동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대화를 피하니, 무조건 말려야만 했다.

그런데 또 전화는 받는다.

‘현재 카이는 전화를 받을 수 없으므로….’

이러면서 끊을 뿐이지.

“나중에 같이 가자. 그때 내가 고기 살게.”

“진짜지?”

“그래. 선빈당 한번 가자.”

“약속한 거다. 잊기 없어?”

“알았어. 명심할게.”

“그럼 마시자. 회 앞에 두고 너 기다린다고 얼마나 침을 흘렸는지 모를 거야.”

“잘 먹을게.”

회를 한 점 먹던 카이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보다. 네가 고깃집에 데려갈 정도면.”

“엄청 마음에 들었지. 내 원픽이야.”

잊었다고 생각했던 열정이 그 아이 때문에 다시 불타올랐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목표가 다시금 생겼다.

‘그래미.’

한진성은 처음으로 건하와 같은 목표를 떠올렸다.

후배가 노리는 그래미.

그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세계를 노려보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카이야.”

“응?”

“우리 다시 한번 세계를 노려보자.”

“…포기한다면서.”

“다시 한번 도전해 보려고. 한국에서 칼을 갈고 다시 한번 해보자.”

“그래. 한번 해보자.”

믿음직한 동료의 말에 한진성은 회를 먹으며 미소지었다.

아까 고기를 많이 못 먹어서인가.

회가 엄청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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