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90화 (90/236)

<제90화>

우리는 스케줄을 이어갔다.

가요 어워드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아직 활동이 남아 있었다.

놀 시간이 전혀 없었다.

황이서가 경고를 할 정도로 인터넷이 난리인 거 같지만, 그렇다고 있는 스케줄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라이언을 밀어내고 올리오스가 댄스 퍼포먼스 수상.

우리도 놀랐다고.

“으으, 크리스마스에도 일해야 한다니….”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음악 방송 촬영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주가 축 늘어진 채로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엔 친한 사람끼리 모여서 같이 노는 게 최고인데….”

“그래봤자 칙칙한 남자들밖에 없는데 무슨.”

나는 멤버들을 보았다.

잘 꾸며놓은, 잘생긴 멤버들이었지만 남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형들이랑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았단 말이야. 다들 그거 알아? 대학교에서 유명한 술 게임. 새해가 되면 우리 술 사서 술 게임 해보자. 신년에는 활동 없으니까….”

“우리도 대학을 안 가서 잘….”

우주의 말에 정민이 나를 가리켰다.

“너 건하 주정 감당할 수 있어?”

“그거야 뭐, 건하 형은 사이다를 마시면 되잖아.”

이거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데.

“야, 나도 술 잘 마셔. 무슨 소리야.”

“에이, 우리가 형 주량을 아는데.”

“너희 진짜….”

아, 저주받은 몸뚱어리.

진짜 조금이라도 술이 잘 들어가는 몸이었으면, 전부 다운시킬 수 있었는데.

“으으으.”

“아무튼 케이크 하나 사고 트리 하나 세워서 우리끼리 크리스마스 기분 내면 참 좋을 텐데.”

아쉽다는 듯 몇 번이고 강조하는 우주의 뒤에서 호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엔 전기장판 위에서 이불 덮고 노곤하게 자는 게 최고인데….”

현장엔 나무에 걸린 수많은 미니 전구로 인해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

해외 유명 가수가 부른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매년 절대 잊지 않고 찾아오는 캐럴을 들으며 우리는 스태프의 안내를 받았다.

“여기 레드카펫 쪽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방송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레드카펫과 그 옆을 따라 각기 다른 팬들이 서 있었다.

이 추운 날에도 자리를 지키며 자신들이 응원하는 아이돌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추위 때문에 팬들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띤 채였다.

다수의 기자가 팬들 앞에서 카메라를 든 채로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와, 진짜 레드카펫이네.”

“올해 마지막 방송이라고 신경 엄청 썼나 보다.”

“저기 우리 팬들도 있어.”

우리는 한쪽 구석을 차지한 올리오스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건하야!”

“우주야, 사랑해애액!”

“꺄아아악!”

팬들의 환호성이 귀를 찔렀다.

그러나 환호만 들리는 건 아니었다.

“아, 쟤들 왔네.”

“라이언 대신 댄스 상 탔다던데?”

“솔직히 그건 아니지 않아?”

우리를 욕하는 소리 역시 들렸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팬들이 선 위치와 우리가 선 자리가 너무 가까웠다.

“웃어. 괜한 소리 하지 말고.”

나는 울컥하는 우주의 어깨를 꼬집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조금 화가 나서 그랬어.”

포토존에서 팬들과 기자들의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끝까지 느껴지는 질투와 시샘의 시선을 받았다.

“들어가자.”

대기실에 들어오고서도 위축된 멤버들의 기분은 풀어지지 않았다.

인터넷을 하지 않아서 느껴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반응을 체감하니 더욱 그런 듯했다.

“우리도 진짜 열심히 했는데….”

우주와 호진이 유독 분해했다.

기분이 나쁠 수밖에.

마치 우리의 노력을 폄하 당하는 기분일 테지.

우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당장의 실력은 몰라도 노력만큼은 다른 아이돌들에 비해 절대로 밀리지 않으리라 자신했다.

“다들 기운 빠지는 건 이해하는데, 너무 주눅 들지 마. 내가 봤을 땐 너희가 최고로 잘했어. 그러니까 보여주자. 너희가 최고였다는 걸.”

이두현이 멤버들의 기를 살려 주겠다며 파이팅을 외쳤다.

확실히 처음보다 분위기가 조금 살아났다.

“그래. 보여주면 돼. 우리가 못한 게 없잖아.”

“하던 대로만 하자. 너무 긴장하지는 말고.”

“알았어. 건하 형.”

모두가 기운을 차린 걸 확인한 나는 잠시 화장실을 가기 위해 대기실을 나섰다.

음방 1위를 찍은 이후로 방송국에서 우리를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대기실을 우리만 쓰니까 편하긴 하다.’

올리오스의 단독 대기실을 마련해 주기까지 했다.

물론 그리 넓지 않은 대기실이긴 했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야.

예전에 처음 우리가 음악 방송을 위해 방송국에 찾았을 때는 좁아터진 대기실에 두세 그룹이 들어갔었는데.

대기실을 나온 나는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어?”

그녀도 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당황한 듯 나를 가리켰다.

“건하 후배!”

블랑 엔터의 롤링걸즈 소속인 제리. 본명은 홍하나 선배였다.

너무 말이 많고 자기 자랑에 심취하는 캐릭터라, 한 번 이벤트가 걸리면 손가락이 뻐근해질 정도로 스킵 버튼을 눌러야 하는 골치 아픈 선배.

롤링걸즈 멤버들과 함께 있던 그녀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제리 선배님.”

“남자 아이돌 신인상 축하해.”

그녀가 내 등을 두드리며 축하했다.

내면은 서른을 훌쩍 넘긴 내가 나보다 열 살은 훨씬 어린 애한테 칭찬을 받는 기분은 뭐랄까, 많이 어색했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연예계는 그야말로 야생이자 정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잡아먹히는 지옥 같은 곳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선배님.”

비록 나보다 한 살 어리다고 해도 선배는 선배.

심지어 그녀가 소속한 롤링걸즈는 이 바닥에서도 꽤 유명한 중견 아이돌이었다.

올리오스보다 크면 컸지, 전혀 유명세가 작지 않은 그룹이었다.

“아, 맞다. 댄스 퍼포먼스 상도 받았다면서? 요즘 그것 때문에 말이 많던데.”

“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긴. 딱 봐도 올리오스가 받을 거 같았는데. 내가 춤은 잘 모르지만 말이야.”

제리가 작은 몸으로 팔과 다리를 쭉쭉 뻗으며 ‘All we once’의 안무 일부를 추기 시작했다.

“올리오스의 이번 노래와 춤이 정말로 좋았다는 건 알고 있어. 아무리 라이언 선배님들이라도 못 이길 정도더라.”

팟. 팟. 팟.

손과 다리를 쫙 뻗으며 우리의 춤을 칭찬하는 홍하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 말을 우주랑 호진이 들었으면 참 좋아했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칼군무로 촷! 촷! 촷!”

어설프게 우리 동작을 따라 하던 홍하나의 옆에서 다른 롤링걸즈 멤버들도 따라 웃었다.

“우리도 이런 느낌으로 군무를 맞춰 추거든. 물론 걸 그룹이랑 보이 그룹이랑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맞아. 우리가 봤을 때도 엄청 잘하던걸?”

“감사합니다.”

홍하나가 아마 롤링걸즈의 막내였었지?

장난기 넘치는 홍하나와는 달리 조금은 성숙한 느낌을 가진 롤링걸즈 선배들의 말에 나는 가볍게 웃어줬다.

“선배님들 말씀 덕분에 힘이 나네요.”

“아마 다들 좋게 보고 있어서 그런 결과가 난 거니까 기죽지 말고 힘내!”

주먹을 불끈 쥐는 홍하나의 모습에, 왜 그녀가 굳이 이렇게 과장하면서까지 기운을 북돋아 줬는지 알 것 같았다.

‘알고 있구나.’

우리한테 쏟아지는 악플을 말이다.

“열심히 할게요. 고마워요.”

“힘내. 진짜 좋았어!”

그래도 선배구나.

나이가 나보다 어리지만, 무려 데뷔하고 4년이나 이 야생에서 살아남은 홍하나였다.

그 한마디가 상당히 기분 좋았다.

“이따가 우리 애들 만나면 걔들한테도 한마디 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홍하나를 비롯한 롤링걸즈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실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들! 나 방금 복도에서 롤링걸즈 선배님들 만났는데, 우리 보고 엄청 잘했다고 하더라! 우리가 상 받을 거 같았다고 했어!”

우주가 폴짝폴짝 뛰며 들어왔다.

참 단순하다니까.

* * *

12월 마지막 주, 올해의 음악 방송 1위도 우리가 차지했다.

“축하합니다! 올리오스의 ‘All we once’!”

사실 마지막 주 활동이라 1등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음원 성적이 오랫동안 1등을 유지한 덕일까.

우리의 마지막 활동이었던 크리스마스 기념 지상파 음악 방송에서도 1등을 차지했다.

이로써 우리는 지상파 방송 3사 전체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동료 가수들의 축하를 받으며 우리는 우승 기념 공연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엉엉 울던 멤버들도 이젠 적응이 된 건지, 우승의 기쁨을 즐겼다.

“고생하셨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우리는 다른 선배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촬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때.

우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퀘스트라도 깬 걸까.

핸드폰을 열자.

“어?”

010-****-7890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였다.

‘스팸인가?’

뭐지?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자마자.

-축하해요, 건하 씨. 약속대로 해냈네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묘하게 사람을 긁는 신경질적인 목소리.

이게 누군가 잠시 생각했는데.

‘이범영 기자.’

<연예가 좋다>의 이범영 기자였다.

연예계 기자 중에서도 어그로를 잘 끌기로 유명한 기자.

좋지 않은 의미로 화제성을 몰고 다니는 기자로, 수많은 사건과 사고에 꼭 등장하는 기자였다.

오죽하면 아이돌 팬이라면 꼭 알아야 하는 기자로 유명했다.

그리고 우리를 몬스터즈랑 어떻게든 엮어서 기사를 내려고 했던 악질 기자.

“오랜만입니다. 기자님. 제 번호를 알고 계셨나 보네요?”

-하하하,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죠. 자기 번호 너무 쉽게 알려주면 안 돼요.

“…….”

내가 알려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사람들이 이 기자한테 알려준 거 같지는 않고.

불법적인 루트로 알아낸 게 분명했다.

“기자님, 어쩐 일이십니까?”

-기억 안 나나요? 우리가 했던 약속.

아.

기억났다.

이범영이 우리를 억지로 엮으려는 악질 짓도 모자라 매니저인 이두현을 무시하는 바람에 했던 말.

‘우리 두현이 형이랑 같이 1등 할 거라고요.’

‘참, 이건 오프 더 레코드?’

‘우리가 다음 앨범으로 1등 못 찍으면 그때 공개해 주십쇼. 건방진 아이돌 윤건하, 제 주제 파악 못 하고 덤비다.’

‘자신감 넘치네요. 좋아요. 대신 1등 찍으면 연예가 좋다에 단독으로 한 꼭지 따줄게요. 5분짜리 특집으로. 내가 그 정도 힘이 있거든.’

‘인터뷰는 괜찮습니다. 두현이 형한테 사과만 해주십쇼.’

‘미안하다고?’

‘예.’

‘알았어요. 그게 뭐 어렵다고.’

그와 했던 내기가 떠올랐다.

그리 머리에 각인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든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음원 차트 TOP10에 올라가는 것도, 최종 후보에 오르는 것도 전부 가능할 거라고 확신했다.

다만 그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마음을 졸였을 뿐.

“두현이 형한테 사과하려고 전화 주신 건가요?”

-그건 정식으로 사과해야죠.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해냈으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잠시 뜸을 들인 이범영 기자가 내게 말했다.

-기사를 하나 내려고 하는데요. 올리오스 특집으로. <연예가 좋다>와 한국 연예 1면으로요.

“기사는 안 써주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이것까지 내기에 포함된 거예요.

“…….”

-거절하지는 마세요. 어차피 필요하잖아요. 지금 올리오스.

“무슨 말씀이신지.”

-사과의 의미로 내가 제대로 뽑아줄게요. 올리오스라는 그룹이 가진 매력을. 그 팀이 댄스 퍼포먼스 상을 받을 가치가 있었다는 걸 알려줄게요.

믿을 수 없었다.

그 이범영이?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한다고?

한동안 대답이 없자, 이범영이 이해한다는 듯 껄껄 웃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만해요.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문 도는 것도 알고. 이건 그거랑 별개입니다. 건하 씨랑 나 사이의 사적인 내기잖아요. 건하 씨가 아이돌 생명을 걸었으니, 그만한 대가를 받으셔야죠.

수화기 너머 이범영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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