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레프픽션과 트레블리에 대한 투자 건으로 계약을 맺은 다음 날.
계약서대로 정확히 5억을 입금한 나는 다시 레프픽션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정확히는 트레블리가 연습하고 있는 연습실이었다.
전날에는 이후에 올리오스의 연습 스케쥴이 있어 트레블리를 보지 못하고 GH 사무실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 정도 늦게 본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도 없었고, 그들의 잠재력에 대한 내 믿음도 확고하기에 당장 봐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홍우선에게 트레블리를 소개시켜주면서, 현재의 상태를 점검하고 이후 일정을 짤 필요는 있었기에 다음날 연습 일정을 조정하고 레프픽션을 다시 방문했다.
“건하 씨, 아니 도련님, 오셨습니까?”
홍우선이 어색해하면서 인사했다.
어제 최 실장에게 한 소리를 들은 걸까?
친근하게 다가왔던 어제와는 달리 어색하게 예의를 차리는 티가 역력한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홍 프로님, 너무 어렵게 대하지 말아주세요. 저보다 훨씬 나이도 많으신 분이 이런 식으로 대하시면 오히려 불편합니다.”
“하, 하지만 최 실장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회장님 옆에서 계셨던 분이고, 제게도 어렸을 때부터 존대하신 분이시라 어쩔 수 없지만, 홍 프로님은 아니시니까요.”
“그, 그렇다면……. 크흠, 오셨습니까, 건하 씨.”
“네, 트레블리는 어떤가요?”
내 말에 홍우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찮던데요? 솔직히 왜 데뷔가 미뤄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였다면 빚을 져서라도 데뷔를 강행했을 거 같아요.”
“그런가요?”
“네. 하지만 아무래도 레프픽션에서 데뷔용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음원은 많이 아쉽네요. 퀄리티 자체는 평범하지만, 멤버들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해 트레블리와 매치가 잘 안 됩니다.”
“역시 그렇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레프픽션 아이돌들은 대부분 포텐셜이 높은 데 비해, 곡과 퍼포먼스는 약간 밋밋한 편이니까요. 이런 이유일 거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홍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레프픽션 아이돌들이 ‘탈 레프’라는 말을 늘상 듣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준비 기간이나 자금을 떠나서, 매력을 100% 끌어올릴 수 있었다면 아이돌이 레프픽션을 나가는 족족 잘될 리가 없겠지.
“얼마나 걸릴까요?”
“데뷔까지 말입니까?”
“예.”
“글쎄요. 최대한 빠르면 올해 말, 아니면 내년 초 정도일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잡으면 준비가 다소 부족할 수도 있기는 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올리오스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던 거죠. 올리오스를 기준으로 맞추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선 언제쯤 가능할까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비정상적으로 빨리 달리고 있다는 것쯤은.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건, 나라는 존재 때문이라는 것도.
과금으로 내 스탯과 스킬을 올리고, 멤버들의 실력을 올려줄 수도 있었다.
체력까지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과금의 힘이었다.
그러나 레프픽션은 달랐다.
그들의 성장은 내가 따로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금액적인 투자와 선배로서의 조언 정도.
아마 그것이 전부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올리오스와 맞먹는 속도를 바라는 건, 어찌 보면 무리한 요구였다.
“안정적으로 보려면 8개월 정도는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년 봄, 3월에 데뷔로 가일정을 잡는 것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 봄이고 개학, 개강 시즌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 신인 그룹의 싱그러움을 살릴 생각입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경쟁 아이돌이 많이 나올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이겨낼 거라 확신하고 투자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하핫! 생각이 통했네요.”
크게 웃은 홍우선이 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습실로 들어가 멤버들을 만나기 전, 안명학 대표를 만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앞으로 트레블리를 함께 키워갈 대표님이니,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건하 씨.”
“저도 애들이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 대표님.”
안 대표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트레블리가 기다리고 있는 연습실에 들어갔다.
옹기종기 앉아 있던 애들은 물을 마시거나, 숨을 가라앉히거나, 춤을 따로 연습하는 등 따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연습을 하고 있었는지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트레블리의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레프픽션에서 준비했던 4인조 그룹.
자금이 부족해 해체 직전까지 갔던 애들이었다.
‘그때 표정은 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는데.’
억지로 짓던 미소.
실낱 같은 희망을 잡으려던 그 필사적인 움직임.
대기실에 찾아와 최대한 환하게 지으려고 하던 그들의 미소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이제 애들은 나로 인해 데뷔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내게 인사하는 트레블리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환한 미소에는 당장 팀이 해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없었다.
앞으로에 대한 고민은 있을지언정, 지금 당장은 데뷔를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다들 반가워. 우리 구면이지?”
“네! 그렇습니다! 뮤직 에어에서 선배님을 뵈었습니다!”
멤버들 중에서 키가 작지만 가장 당찬 성격을 가진 강형찬이 가장 먼저 소리쳤다.
게임 속에서도 랩과 서브 보컬을 맡았던 걸로 기억한다.
패션 센스가 뛰어나다는 게임 속 설정이 떠올랐다.
단순히 트레이닝복만 입었을 뿐인데도 느낌이 있었다.
키도 작은데 옷태는 가장 잘 사는 느낌이랄까.
“상 받으실 때 정말 멋있으셨어요!”
“올리오스 짱! ‘For you’ 매일 몇 번씩은 듣고 있습니다!”
주민호와 레온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주민호가 리드 보컬, 레온이 댄서를 맡았던 걸로 기억했다.
그리고 마지막 비주얼 멤버, 솔라.
“안녕하심까.”
조금은 어눌한 한국어로 내게 인사했다.
“아, 솔라는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살던 애라서 한국말이 아직 조금 어색해요. 이것도 많이 좋아진 겁니다!”
레온이 대신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허겁지겁 변명해주는 모습을 보니, 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걸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 눈동자는 자연이지?”
나는 솔라의 연한 하늘색의 눈동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그렇슴다. 아버지와 같은 눈동자색임다.”
내가 알기로 솔라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전체적인 외모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생긴 한국인의 느낌이 강하지만, 유독 눈동자만큼은 서양인처럼 하늘색이었다.
“신기하네.”
일러스트로 봤을 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실물로 보니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왜 비주얼 멤버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얘기는 다 들었을 거다.”
“네! 선배님께서 저희에게 투자를 해주셨다는 얘기, 다 들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강형찬이 외쳤다.
“맞아. 대기실에서 너희를 보는 순간 느꼈다. 너흰 성공할 거라고.”
그 이유가 게임에서 봤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놀라운 잠재력을 엿봤다는 말이 지금 트레블리 애들에겐 더 깊은 인상을 줄 테니까.
“오늘 나와 같이 온 황룡엔터의 홍우선 프로듀서가 앞으로 너희의 데뷔 준비 및 이후 활동 전반을 관리해 줄 거야. 그 외에, 매니저나 서브 역할을 안명학 대표님이 그대로 해주실 거고.”
“홍우선 프로 님이 황룡엔터 소속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저희도 황룡엔터 소속이 되는 건가요?”
주민호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레프픽션 소속으로 데뷔할 거야. 회사에서 투자하는 게 아니라, 내 개인적인 투자거든. 홍우선 프로님은 도와주시는 것뿐이야.”
“아.”
“그리고 종종 이렇게 찾아와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을 도와줄게.”
“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앞으로 몇 년 뒤면 국내에서 손 꼽히는 보이그룹으로 자라날 애들이었다.
잘만 키우면 게임 속에서도 인권 캐릭터로 많이 쓰였던 애들.
현실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트레블리가 가진 재능.
그를 보좌하는 홍우선 엔지니어의 능력.
이 둘만 시너지를 잘 낸다면, 문제는 없을 거다.
레프픽션 측에서도 트레블리의 일정 관리와 매니지 및 스케줄 관리를 잘 해줄 터였다.
그들의 성공에 곧 회사의 운명이 달려있으니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겠지.
만에 하나라도 잘 가다가 선로를 이탈하거나 다른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케어해 줄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4명의 연습생들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그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어쩐지 닮았다.
작년의 올리오스와.
데뷔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과거의 우리들이.
강한 척 누구보다 앞에서 외치는 강형찬은 어쩐지 나와 우주를 섞은 것 같았고, 외국에서 온 탓에 말수가 적은 솔라는 호진을 닮았다. 레온은 정민을, 주민호는 성훈을 닮았다.
묘하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이들 역시 우리가 겪었던 것같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는 게 조금은 안타까웠고, 동시에 정이 갔다.
‘이런 느낌이었나?’
나는 한진성이 우리, 올리오스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묘하게 측은했던 눈빛, 친절하던 목소리, 후배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귀엽게 여기던 모습까지.
어쩐지 그때의 한진성이 가졌던 감정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묘한 동질감.
나 스스로도 왜 이 아이들에게 투자를 하기로 결심했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지만, 과거의 우리를 투영했다.
[업적 - 후배와의 교감]
[후배와 깊은 교감을 나눴습니다.]
[보상: 5 오픈 마일리지]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새로운 업적을 달성했다는 시스템 창이 떴다.
“데뷔할 때까지 열심히 해보자.”
“네! 알겠습니다!”
우렁찬 트레블리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이들의 성공이 눈에 보였다.
찬란하게 빛나며 성장할 트레블리의 모습이 말이다.
* * *
투자는 투자.
아이돌은 아이돌이었다.
새로운 곳에 투자를 했다고 본업에 소홀해서는 절대 안 됐다.
한 달간의 연습과 준비를 마치면 투어 첫 국가인 일본으로 건너가야만 했다.
“일본이라.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아?”
우주가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다섯이서 가는 첫 해외 여행이잖아! 뭔가 준비를 해야 하는데. 어디 재밌는 여행지 리스트라도…….”
호들갑을 떨며 리스트를 작성하려는 우주를 성훈이 막았다.
“아마 이번에는 따로 개별 활동을 할 시간이 많지 않을 거다.”
“엥? 왜?”
“아까 오는 길에 들었는데, 일본 예능 쪽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일본 예능?”
“진짜?”
성훈의 말에 우리 모두가 그를 보았다.
충격적인 뉴스였다.
잠깐, 진짜로 일본 예능에서 우리를 초청했다고?
“나도 정확히는 몰라. 두현이 형이랑 황 프로님이 말하는 거 주워 들은 거라서.”
“우와! 무슨 예능에 나가는 거지? 나 일본어 잘 모르는데, 지금이라도 공부를 해둬야 하나? 음, 곤니치와?”
갑작스러운 뉴스에 다들 벙쪄있던 그때.
“애들아, 해외투어 관련 좋은 소식이다!”
황이서가 성훈 발 소문에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일본 도쿄TV에서 인터뷰 요청 들어왔다! 우리들 해외 투어 기념으로!”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