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0)화 (10/303)

10화 #3 – HS 엔터테인먼트 (1)

사흘 뒤.

삑.

“만 오천 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실까요?”

“여보세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를 받는 손님.

통화를 하면서 카드를 내밀 수는 없는 걸까.

“어, 진짜? 지금 나왔어? 헐.”

나는 멍하니 서서 손님의 통화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그사이 뒤로는 두 명의 손님이 줄을 섰고, 나는 정중히 물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뒤에 다른 손님분들도 기다리셔서요.”

“네, 할 거예요. 여보세요? 아니야, 말해. 그래? 그럼 안 사고 가지 뭐. 딱 계산 직전이었거든.”

나는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기요. 저 계산 안 할게요. 이거 두고 가도 되죠?”

그렇다, 아니다, 라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손님은 이미 나가버렸다.

하….

기분 나빠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뒤에는 또 다른 손님이 서 있었으니까.

“계산 도와 드리겠습니다.”

몇 분이 지나고 텅 빈 편의점.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그 명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답이 궁금하기는 한데….

사실 보답보다 더 중요한 건 일 이야기였다.

‘섭외’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으니까.

연락을 달라고 하기는 했는데, 진짜 전화하면 속물처럼 보이려나?

뭐, 그래도 그쪽에서 먼저 연락하라고 그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전화는 한번 해봐도 되지 않나?

계산대에서 걸어 나와 매대를 돌며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명함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신호음이 세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 연결이 되었다.

역시 전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직업이라서 그런가?

“안녕하세요. 저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저번에 명함 주셨던….”

-네! 알죠, 희성 씨. 언제 연락주시나 기다렸어요. 나는 또 부담돼서 안 하는 줄 알고 걱정했거든요.

“죄송합니다. 제가 고민이 좀 많은 편이어서요.”

-농담이에요. 전화 주신 김에 빨리 뵙죠. 언제 시간 돼요? 아니, 어디 살아요?

최 실장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저는 신림에 살고 있습니다.”

-신림? 회사랑 가깝네. 우리 회사가 홍대에 있거든요. 한번 보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언제가 좋아요? 내가 바로 갈게요.

“아닙니다. 제가 회사로 갈게요.”

-어우, 아니에요. 제가 희성 씨한테로 가야죠.

대접을 받는 것이 익숙지 않은 것도 있지만,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게 아니라… 제가 HS 엔터를 한번 구경해보고 싶어서요.”

-하하하, 좋습니다. 그러면 언제가 편해요?

***

HS 엔터테인먼트.

동기인 박민준, 그 자식이 있는 WG 엔터와 함께 대한민국 3대 엔터 중 하나인 HS 엔터.

WG 엔터에 비해 아이돌이 강세인 곳.

배우 풀은 조금 적은 편이지만, 모든 연예인 지망생들이 꿈꾸는 회사지.

사실 HS 엔터와 WG 엔터는 서로 앙숙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온 국민이 알 테지만, 이 두 회사의 대표들이 유명한 라이벌 관계니까.

그렇다보니 소속 배우와 아이돌끼리도 자연스레 라이벌로 형성되고는 한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하는 아이돌끼리 묶인다든지, 배우들이 동시간대 드라마를 찍는다든지.

그렇게 겹치는 경우도 많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기자들이 어떻게든 엮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HS 엔터의 소속 연예인 비율은 확실히 아이돌이 높지만, 낮은 비율의 배우 중 유명하지 않은 배우는 없다.

그만큼 소속 배우는 확실하게 키워주는 회사라고 볼 수 있지.

작년만 해도 HS 엔터의 배우들이 연말 시상식을 휩쓸었으니까.

더불어 올해 역시 유명한 드라마와 영화에 HS 엔터 소속 배우들이 한 명씩은 꼭 끼어 있었다.

내게 일 이야기를 하자고 했으니, 살짝 기대는 했지만.

무조건 계약 관련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기대를 하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단역 배우만 하다가, 특히 이번 황꽃에서의 연기만 살짝 보고 계약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들어봐야 할 일.

나는 HS 엔터 로비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천고와 드넓게 펼쳐진 로비.

한쪽에는 커다란 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카페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팬들.

확실히 일반 엔터와 다르게 소속 아이돌의 팬들이 가득했다.

주차장 근처에 서서 오가는 차를 보며 기다리는 중인 듯하다.

누군가의 팬이라니….

내게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뿐.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희성 씨!”

저 멀리서 최 실장이 손을 뻗으며 내게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와서 전화하시면 바로 내려온다니까, 왜 여기 계셨어요.”

“하하, 방금 왔습니다. 미리 좋은 회사의 로비 좀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올라가실까요? 제대로 회사를 소개시켜 드릴게요.”

“좋아요.”

띡.

최 실장이 사원증을 입구에 찍자, 투명한 가림막이 양쪽으로 열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넵.”

“그나저나 사흘 만에 연락하실 줄이야. 밀당을 좀 하시는 편인가 봐요, 희성 씨?”

“아,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제가 고민이 좀 많았거든요.”

“하하하, 농담입니다.”

“근데 송유나 씨 담당 매니저이신 거죠?”

“예, 유나를 담당한 지는 꽤 오래됐죠.”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우리 둘만이 탑승했다.

그리고 최 실장은 아무도 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조용한 목소리로 낮춰 말했다.

“그 친구가 워낙 까다로워서 저 아니면 안 되더라고요. 하하.”

농담 반 진담 반인 것을 알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송유나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엘리베이터는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휴게실이에요.”

“와! 휴게실로 한 층을 모두 쓰는 거예요?”

여기가 회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실내 인테리어.

게다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파에서 정말 자유롭고 평화롭게 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서울 시내를 완전히 바라볼 수 있는 사방 통유리의 전경까지.

그 끝에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저 문은요?”

“보시겠어요? 저기로 나가면 또 새로운 세상이죠.”

문을 활짝 열자, 작은 식물원에 온 듯 푸릇푸릇한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옥상에 이런 테라스라니.

아니, 테라스라는 말을 붙이기도 미안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소속 연예인들은 연습하다가, 직원들은 일하다가 아무 때나 쉬러 여기에 올라와요. 휴게실에서는 커피, 음료, 먹을 것들도 당연히 제공되고 또… 술까지 있으니까요.”

“와, 정말 일할 맛이 나겠네요.”

최 실장은 내게 놀라기는 이르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희성 씨 반응 보니까, 더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내려가 보실까요?”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는 최 실장이 누른 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자마자 코를 강타하는 맛있는 냄새.

“여기가 식당 층인가요?”

“맞아요. 저희 대표님께서 가장 신경 쓴 구내식당. 모든 음식이 유기농, 친환경 식자재 위주로 이루어져 있어요.”

“우와!”

“매 끼니 음식이 다른 건 당연하고요.”

입구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한 주의 식단표.

급식 같은 메뉴가 아니었다.

이건 호텔의 한식, 일식, 중식, 양식을 모조리 가져다 놓은 듯한 음식들.

게다가 이런 음식을 먹는 구내식당이 지하가 아닌 높은 층이라니.

뷰 역시 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끝내주는 건 당연했다.

이런 뷰의 레스토랑이라면 음식값은 최소 십만 원대를 호가할 테니.

아, 물론 여느 식당이 그렇듯 식사는 식판에 하는 것 같긴 했다.

이후로도 최 실장은 녹음실, 대본 연습실, 안무실 등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사옥 투어를 마칠 즈음.

최 실장이 손목시계를 쓰윽 확인하더니, 손으로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회의실로 가실까요?”

“네, 좋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게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나를 부른 이유에 대해 묻지도 못한 채 열심히 HS 엔터 사옥만 구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든 HS 사옥에 처음 온다면 이럴 수밖에 없는 놀라운 규모였다.

회의실에 도착하니 이미 내가 앉을 자리에 음료수와 다과가 세팅되어 있었다.

“희성 씨, 앉으세요.”

“네.”

“먼저 지난번 일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보답을 좀 하고 싶어서요.”

최 실장은 정장 안주머니를 뒤적여 봉투를 하나 꺼내 건네었다.

“아유, 아닙니다.”

나는 그 봉투를 양손으로 밀어내며 답했고.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봉투를 다시 내 쪽으로 밀었다.

“아니에요. 이건 희성 씨가 유나에게 해주신 일에 비하면 새 발의 피랍니다. 받아주세요.”

“그래도 이건 좀….”

봉투 안에 얼마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무턱대고 받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재차 거절했다.

그러자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아니요. 받으셔도 됩니다. 송유나 몸값 아시잖아요. 그날 유나가 다쳤으면 저….”

이내 씨익, 웃으며 내 손에 봉투를 강제로 쥐여 주었다.

“진짜 지옥에 갔을 겁니다. 그러니까 받아주세요.”

결국 나는 목례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선을 봉투로 옮겨갔다.

“궁금하면 바로 열어보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보실 건데요. 하하.”

지금 보라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봉투 끝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현금이 아닌, 백화점 상품권 1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아니, 실장님. 이거 너무 큽니다.”

“이걸로 크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예?”

“제가 일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네….”

마침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 문이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 씨?”

인자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나는 자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박한웅 팀장입니다.”

어, 잠깐만.

박한웅 팀장이라면…?

HS 엔터를 소개하는 인터뷰에서 여러 번이나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HS 엔터 소속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나는 그를 향해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박 팀장은 자연스레 내 앞으로 다가와 착석했다.

그러고는 최 실장과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방송을 통해 희성 씨 연기를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연기를 잘하시더라고요. 제가 봤던 호위무사 역할 중에 단연 최고였어요.”

박 팀장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

“유나를 지키던, 아니 공주를 지키던 그 호위무사. 항상 모니터링을 하기에 역할에 몰입하지 않는 편인데. 제가 어느새 드라마에 몰입해서 보고 있더라니까요? 하하.”

“극찬이십니다, 팀장님.”

“그래서 말인데….”

박 팀장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더니.

눈을 크게 뜨며 내게 제안했다.

“저희와 한번 같이 일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내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희 HS 엔터에서 제대로 서포트해 드리겠습니다. 희성 씨의 연기, 그 진가를 저희 HS 엔터에서 알리고 싶습니다.”

박 팀장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최 실장이 덧붙였다.

“맞아요. 희성 씨 연기 실력이 뒷받침해 주니까, 저희는 그런 희성 씨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습니다.”

내 연기 실력을 칭찬해 주다니, 그 어떤 칭찬보다 값진 말이었다.

더불어 정말 계약을 하자는 말에 나는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박 팀장은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쉬지 않고 멘트를 이어갔다.

“저희 매니지먼트 직원들은 이런 보석이 묻혀 있는 거 못 봅니다.”

그러고는 준비해 온 파일철을 열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시죠.”

파일을 열자 가장 먼저 ‘계약서’라고 쓰인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비율은 조정 못 하는데, 계약금은… 저희가 이번 일에 감사한 의미로 조금 더 넣었습니다.”

보통 신인 배우들에게 주는 계약금은 200만 원에서 300만 원 정도다.

조금 더 넣었다면 얼마를 넣었다는 말이지?

나는 곧장 계약서 하단에 적혀 있는 계약금을 확인했다.

…1천만 원?

“아니, 이건….”

내가 금액을 보고 말문이 막히자, 박 팀장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감사의 표시는 돈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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