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9화 (9/224)

#009. 이런 누추한 곳에 (3)

[안녕하세요! 221번 표영인입니다!]

묘하게 독특한 발음을 가진 목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생긴 건 엄청 차가워 보이는데, 목소리가 예상과 달리 씩씩했다.

머리는 탈색인가? 갈색이라기엔 너무 밝아 보이는 탁한 금발의 꽁지를 동여맨 가벼운 인상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아마 전 참가자 중 최장신일 듯 키가 굉장히 컸다. 거기에 머리는 또 작아서 웬만한 장신 모델보다도 비율이 좋았다.

[네, 221번 연습생,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심사 위원 중 한 명이 자기소개를 요청하자 다들 생각지도 못했던 돌발 발언이 터져 나왔다.

[넵! 나이는 19살, 호주에서 왔고요, 한국 이름은 표영인, 호주에서는 다른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K-POP 아이돌은 원클릭이고, 클릭미스 3기, 잭팟 2기, 르레브 4기, 럽이슈 1기 회원입니다!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은 리미 선배님입니다!]

그러더니 오디션장으로 가지고 들어갔던 가방에서 각 그룹별 응원 봉을 하나둘씩 꺼냈다.

심사 위원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려는 게 목적이었으면 성공한 것 같은데….

전략적으로 좋은 방식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외국인이 K-POP 오타쿠 캐릭터로 밀고 가는 거야 그렇게 나쁘지 않은 전략이겠지만, 그러면 최소한 내가 이 아이돌의 팬입니다! 하고 공공연하게 고백했을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 그룹만을 언급했어야 했다.

‘제일 먼저 말한 원클릭 선에서 멈췄어야지.’

클릭미스는 남자 아이돌 그룹 원클릭의 팬덤명이었고, 나머지 잭팟, 르레브, 럽이슈는 모두 여자 아이돌 그룹의 팬덤명이었다. 제일 존경한다는 리미도 여자 솔로 아이돌.

여돌 팬덤 출신 연습생? 데뷔 이후에 팬 활동을 했던 것이 밝혀진 아이돌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데뷔 초부터 알려져서 좋을 게 정말 하나도 없었다.

처음 단상 위로 올라왔을 때만 해도 딱 봐도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차분한 외형에 다들 신비주의 컨셉인가 봐, 웅성거렸건만.

신비주의는 개뿔. 남들보다 커다란 손안에 옹기종기 움켜쥔 응원 봉이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와…. 진짜 깬다.”

곱상하고 차가운 인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푼수데기 같은 행동에 심사 위원들도 놀랐는지 움찔 기백이 눌린 것이 눈에 보였다.

[음…. 원래 호주에서 쭉 지냈는데 K-POP 아이돌을 동경해서 이번에 한국으로 처음 들어온 건가요?]

심사 위원이 어떻게든 상황을 좋게 풀어 나가기 위해 던진 질문에 자신을 표영인이라 소개한 연습생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 호주에서 지낼 때는 아역 배우로 몇 번 출연했습니다! 열심히 해서 리미 선배님처럼 멋진 아이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응원 봉의 전원을 몽땅 켜서 번쩍번쩍 오디션장을 간이 클럽으로 만들었다.

저래서야… 붙여 주더라도 어그로용이지 데뷔는 물 건너가는 거 아닌가.

비주얼은 확실히 독보적이긴 한데…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응원 봉이 ‘저를 데려가시면 1+1 행사로 두통과 위염을 드려요!’라고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골을 울리는 천진난만함이었다.

“노래는 잘하려나?”

“모르겠다. 저 응원 봉이나 좀 끄지.”

처음 영인이 무대 위로 올라왔을 때만 해도 다들 긴장한 눈치였으나 지금은 그 누구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럼 일단 준비해 온 심사 곡부터 들어 볼게요.]

[넵, 안무랑 같이 하겠습니다.]

라이브 보컬을 안무랑 같이? 번호 아래에 붙어 있는 개인 연습생 표기에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외국에서 자라면 원래 다 저렇게 무한 긍정주의인가.

신기해하기도 잠시 곧 간주가 울려 퍼졌다. 영인이 선택한 곡은 힙합 댄스곡이었다. 잘 모르면 보컬은 쉽고 댄스만 빡센 곡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보컬이 오히려 힘들지.’

댄스는 웬만한 몸치가 아닌 이상 죽어라 연습하면 무난하게는 보인다. 문제는 보컬이지. 이런 힙합곡의 보컬은 절도 있게 강약을 딱딱 줘서 끊지 않으면 대참사가 나기 쉬웠다.

가사가 쉽고 단순한 대신 보컬의 음색이나 그루브로 승부를 보기 때문이었다.

‘뭐… 원곡자도 라이브는 살리기 힘들어서 전부 AR 깔고 부르는 마당에.’

다른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저걸? 다들 같은 생각을 하자마자 영인이 다시 한번 분위기를 뒤집었다.

[쉿, 물러나. 바로 여기, come out.]

[turn down, 전부 내 방식대로 change.]

뭐지? 특유의 나른하게 뭉개진 발음과 힙합 사운드의 보컬이 너무 잘 어울렸다.

큰 체격을 십분 활용하는 절도 있는 댄스까지. 데뷔조에서 건져 왔다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저 정도로 라이브가 안정적인데 댄스까지 되는 건 데뷔한 사람 중에서도 많지 않은데.’

대체 어디서 무슨 트레이닝을 받은 거지? 개인 연습생이라면서.

[분위기를 지배해. 경고했지, 쉿. louder.]

심사 위원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지 급히 한 명이 손을 들고 MR을 멈추게 했다.

[잠깐만요. 영인 군 지원서에는 개인 연습생으로 적혀 있는데 혹시 소속사에서 트레이닝을 받은 적 있을까요?]

그리고 그때 연습생 대기실에서 누군가 이제야 영인을 알아봤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헐, 나 누군지 알아. 얘 걔잖아. 핫케이팝에서 존나 유명한 멤버.”

핫케이팝? 다들 어깨너머로 들은 이름을 급히 인터넷에 검색했다. 초록 창에 검색해서는 나오는 게 핫케이크밖에 없는데.

혹시나 싶어 유튜브에 검색하자 웬 외국인들의 K-POP 커버 채널이 나왔다.

호주, 북미, 남미, 유럽 가리지 않고 각지의 유명한 장소에서 케이팝 커버 라이브, 또는 커버 댄스를 찍어 올리는 계정인 것 같았다.

제일 조회 수 잘 나온 영상이… 8백만?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지 댓글에 한국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와, 조회 수 봐. 무슨 커버 댄스 멤버가 직캠이 있어?”

그 말 그대로 영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만 따로 찍은 세로캠 영상이 있었다. 핸드폰으로 찍은 건지 화질은 구렸지만.

이 영상만 해도 조회 수가 120만이었다.

소리를 최소한으로 줄인 채 재생하자 웬만한 무명 아이돌 버스킹보다 더 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영인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잘하네.’

다른 외국인들도 춤은 잘 췄지만 보컬이 어눌하거나 아니면 아예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동작을 바로바로 쳐내는 데 급급한 다른 크루원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재능이 돋보였다.

다시 오디션 화면으로 돌아와 고개를 들자 영인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없습니다!]

이렇게 해외 팬들끼리 모여서 만든 크루라면 전부 독학이겠지.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거기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비주얼까지.

좀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는 언행을 해서 그렇지, 저 비주얼에 저 실력이면 묻히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였다.

‘입만 좀 다물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아쉬워하거나 말거나 영인의 차례는 곧 마무리되었다. 번쩍거리는 응원 봉이 너무 인상적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99명 안에 들지 못하고 탈락할 일은 없어 보였다.

‘연계 소속사에서 바로 자기네 데뷔조로 빼 가려고 떨어트린다면 모를까.’

비주얼 완성, 실력도 완성이면 입만 좀 다물게 해서 데뷔시키면 될 거라 생각할 테니.

‘다른 녀석들은 또 없나….’

이후로 한 20명쯤 하품만 나오는 평이한 수준의 연습생들이 지나가고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수준이 넷. 그마저도 확 내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다 의욕이 당길 정도로 잘하는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홀수 조가 유독 좀 괜찮은 옥석이 별로 없나? 실력 있는 녀석들은 다 짝수로 간 건가, 아니면 프로그램 자체가 이래서 망했던 건가.

여러모로 아쉬운 참에 눈이 번쩍 뜨이는 참가자가 나타났다.

아주 불행하게도 나쁜 의미로.

‘저놈이네. 프로그램 전체를 망하게 만든 놈이.’

번호는 271. 딱 봐도 아이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개성 있는 외형에 대기실 전체가 술렁거렸다.

“힙합 쪽 연습생인가?”

남자 아이돌 연습생 중에서는 외모보다는 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으려 하는 연습생들도 꽤 많았다.

실제로 탑급 아이돌 중에 전부 외모가 뛰어난 아이돌만 있었던 건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 다들 좀 놀라운 비주얼이긴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다시 잠잠해지려던 순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어? 잠깐만. 나 개좋사에서 본 거 같은데…?”

개그를 좋아하는 사람들, 일명 개좋사는 조항준이 데뷔한 공채 방송사의 메인 개그 프로그램이었다.

“어… 맞는 거 같은데?”

다들 핸드폰으로 한 번씩 검색해 보고는 대기실 전체가 고요해졌다. 일부는 대놓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니, 개그맨이 여길 왜 나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다른 연습생들도 마찬가지인지 조항준이 소개를 시작하기만을 다들 뚫어져라 화면을 쳐다보며 기다렸다.

[음… 조금 특이한 이력이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소개 좀 해 주시겠어요?]

특이하다 못해 기가 막힌 이력이지. 다들 조용히 뭐라 말하는지는 들어 주마 기다리던 그때 조항준이 마이크를 쥐었다.

[어, 어…. 안녕하세요? 차세대 케이팝 리더를 목표로, 어… 이게 맞나? 맞다, 어 리더를 목표로 지원한 조항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왜 저러는 거지? 실실 쪼개는 걸 보면 절대 긴장하거나 떠는 것 같지는 않은데. 심사위원도 의도를 알 수 없는 어눌하고 이상한 말투와 대조되는 표정에 놀란 모양이었다.

[조항준 연습생. 그럼 지금 현역 코미디언으로 활동 중이신 건가요?]

제일 왼쪽에 앉은 심사 위원이 일단 활동이나 촬영이 가능한 건지 확인하기 위해 묻자 조항준이 뻔뻔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제가, 마음만은 풀 부킹? 인데, 이제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나 할까. 목표는 그런데 아무래도, 어… 그러니까… 지금은 가수에 집중할 생각인 것? 같아요.]

그제야 다들 조항준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아차렸다. 지난 오디션 차례에서 내내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단상 아래로 내려온 연습생들의 말실수를 흉내 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예의라고는 없는 짓이야.’

흉내의 당사자가 아닌 내 입장에서 봐도 썩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게 또 우스꽝스럽기는 해서, 모르는 외부인이 보면 웃기게 보일 만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연습생 중에는 자기가 조롱당하는 것도 모르고 좋다고 웃는 놈들도 있었다.

저게 웃겨? 조금의 진지한 마음도 없이, 연습이 부족할 뿐 용기 내서 오디션에 나온 연습생들을 비웃는 놈이 더 조롱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해 온 심사 곡 바로 들어 보겠습니다.]

여차저차 조항준이 뭐 얼마나 부르나 노래나 한번 들어 볼 타이밍이 되자 다들 귀를 열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노래를 잘해도 못해도 이쪽에는 모욕인 상황. 짧은 간주가 끝나자마자 다들 인상을 쓴 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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