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네가 왜 여기서 나와 (3)
아까 은찬도 만만치 않았으나 걔는 옆에서 열심히 커버 쳐 주는 동료라도 있었지.
웬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의 소형 소속사에서 달랑 혼자 나온 제현호는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꿰지 않은 진주였다.
‘쟤는 누가 주워다 잘 커버 쳐 주기만 하면 충분히 잘될 것 같은데….’
보통은 안 그러지. 멘토가 도와주는 것도 수많은 연습생 중 하나 수준일 테고. 다른 연습생들은 그저 빨리 떨어지길 바라는 경쟁자일 뿐일 테니.
‘누가 옆에 붙어서 코칭만 조금 해 주면 딱일 텐데.’
어디 팀 좀 예쁘게 꾸려서 쟤 좀 푸시해 줄 구세주 없으려나….
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아차, 그게 바로 나였다.
‘일단 나중에 기회 되는 대로 따로 얘기는 해 보자.’
나는 될성부른 망태기 리스트에 제현호를 냉큼 집어넣었다.
“와, 개쩐다, 진짜.”
자꾸 깨는 소리를 해서 인상을 망치는 영인의 어깨를 한 번 더 꾸욱 손으로 집은 건 이젠 익숙해진 일이었다.
***
“오래도 걸렸다.”
마침내 등급 심사가 끝나고 10시간 가까이 이어진 녹화에서 해방된 연습생들은 그야말로 날아다니는 벌 떼였다.
“화장실 좀 들러도 되나요?”
“야식 먹을 수 없어요?”
“배달시키면 안 돼요?”
그야말로 아수라장인 대인원이 정리된 건 한 명 한 명 사용할 방을 배정받고 난 후였다.
숙소는 기본적으로 같은 소속사에서 온 연습생들끼리 붙여서 미리 배정을 해 뒀다.
올망졸망한 눈으로 소속사 동기들을 따라 떠난 지원을 제외하고, 나와 영인은 몇 안 되는 개인 연습생으로 묶여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개인 연습생이 적기는 한데 그래도 9명 중 저희 둘이 같은 방이라니. 운이 정말 좋았네요.”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대기하는 내내 니가 한 짓을 생각해 봐라.
쟤네 뭔가 친목질을 하나 보다 카메라에 훤히 비쳤으니 화제성을 위해 중간에 바꿨을 가능성도 충분히 의심되었다.
‘처음 보는 멀뚱멀뚱한 사이끼리 한방을 쓰는 것보단 그게 더 내보낼 만한 그림이 잘 나올 것 같을 테니.’
아무쪼록 나는 상관이 없다만… 이 아니라, 이놈을 촬영 시간 외에 휴식 시간 중에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냐… 여기서부터 약한 생각 하면 안 되지.’
아까 내가 어떻게 이를 악물고 버텼는데. 나는 고개를 도리질 쳐 약한 마음을 쫓아 버리고는 조금 전 무대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당연히 서인수니까 중간 차례쯤에는 내 이름이 불리리라 예상했건만, 생각한 것과 달리 내 차례는 제일 마지막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거 같긴 한데.’
하필 내 앞에 떡하니 보란 듯이 배치해 둔 연습생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노골적인 순서였다.
[NO엔터테인먼트 아진 연습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온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진이 내 앞 차례를 차지한 것이다.
‘순서야 다들 소속사 가나다순일 거라고 예상만 한 거지 공식 발표는 아니니까.’
중간에 이렇게 변주가 일어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준비해 온 보컬 들려드리겠습니다.]
아진이 선빵이라도 치듯 내가 마지막 월말 평가 때 부른 곳을 아주 보란 듯이 불렀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내가 NO에서 나간 후로 이 곡만 죽어라 연습하기라도 했는지, 평소 듣던 아진의 실력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제된 보컬이었다.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전환도 조금 삐걱거리긴 했지만 잘 넘어갔다.
본인도 만족스러웠는지 파트가 끝나자마자 ‘봤지?’ 얼굴에 써 두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만 보자 하니 자꾸 신경을 건드리네.’
가뜩이나 조항준이 정말 예상에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사전 오디션 때와 똑같은 짓을 해서 기분이 더러운데….
저렇게 시비를 거니 받아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쪽이 시비는 먼저 걸었으니 맞부딪쳤을 때 후회하는 게 누구인지 알려 줘야지.’
그래서 나도 똑같이 같은 곡을 불렀다. 사전에 요청했던 MR과 다른 곡을 불러서 스태프가 일순 당황한 듯싶었다.
그러자 메인 PD가 팔짱을 낀 채 지금 요청한 대로 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오… 아진 연습생이랑 같은 곡을 선곡하셨네요?]
MR이 나오기 직전, 예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선경이 내게 물었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마지막 월말 평가 때 불렀던 곡이라 아진이가 제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같이 연습할 때 저를 많이 따랐었거든요. 저 역시도 그때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 선곡했습니다.]
따르긴 뭘 따라.
자꾸 개소리하고 핑계 대고 연습실 빠져나가서 옥상에서 여자 연습생이랑 번호 교환하려다 걸린 게 몇 번인데.
아이돌이 우스워? 이렇게 시시덕거리면서 데뷔할 수 있을 만큼 쉬워 보여? 진지하게 안 해?
번번이 내가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파투 내는 바람에 나라면 이를 갈고 있을 게 뻔했다.
이번엔 내가 나갈 때 저놈 핑계를 댄 것까지 있으니까.
‘내가 미운 것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만….’
고작 나한테 엿 먹이겠다는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따라온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줘야지.
나는 싱긋 웃으며 흘러나오는 간주에 맞춰 가볍게 마이크를 쥐었다.
미공개 예정인 사전 오디션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외부에 노출될 무대였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 이 되기는커녕.
‘…드디어.’
심장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이 무대 하나에 오르기까지 대체 몇 년을 허송세월한 건지.
나도 모르게 울컥 북받칠 뻔했으나 나는 감정을 다잡고 첫 소절을 내뱉었다.
[하얀 눈이 쌓이고, 계절이 지나면-]
[우리 함께 걷던 이 길도 점차 지워지겠지-]
차분하게 감정선을 쌓는 도입부부터 매끄럽게 깔리는 음색에 다들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음이 깔끔해.’
성대를 혹사시키기 전이라서 그런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음이 투명하게 쭉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기교를 부리기 위해 억지로 섞은 비음이 들리던 아진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음역대만 맞는다면 무난하게) 감정선으로 넘어갈 수 있는 파트가 지나고, 곧 클라이막스를 찍는 후렴이 다가왔다.
‘아까 여기 가성으로 흘렸지?’
컨디션도 좋겠다, 한 번 더 격차를 인지시켜 줄 시간이었다. 나는 조금 전 아진이 가성으로 간신히 해결한 부분을.
[다시 내 세상에, 너라는 기회가 온다면-]
깔끔하게 진성으로 올렸다. 풍부한 성량에 마이크를 얼굴에서 꽤 멀리 떨어트렸음에도 스튜디오 전체가 내 목소리로 공명했다.
갈라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시원하게 뻗는 음에 연습생들이 앉아 있는 방향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위 말하는 쥐어짜 내거나 목을 혹사시키는 고음이 아니었으니까.
듣는 사람도 편안히 즐길 수 있는 안정적인 두성이 섞여 음원을 튼 것처럼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차이가 느껴질 수밖에 없겠지.’
조금 전 아진이 삑사리는 없었지만 끝이 흔들려서 불안하게 들렸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 두 손 쥐고 다시 놓지 않을 꿈을 그릴게-]
모두가 저걸 어떻게 ‘쉽게’ 진성으로 올리냐 혀를 내두르는 와중 나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노래를 마무리했다.
‘보컬이 기인 열전도 아니고 가성으로 넘기는 게 딱히 나쁜 건 아니지…. 거기다 나 노래 잘하는 거 다 아는 와중에 과시하는 게 솔직히 내키진 않긴 한데…….’
그쪽이 먼저 시비를 걸면 안 받아 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뭐든 강렬하게 인상을 남길 만한 능력을 보여 줘야 하던 참이기도 했고.
이윽고 반주가 모두 끝났을 때는 다들 등급 심사의 경쟁자가 아닌 보컬 오디션 프로그램의 방청자라도 된 것처럼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로지 아진만이 불만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똑바로 아진을 올려다보며 웃어 주었다.
이게 너와 나의 차이라는 듯이.
결과는 당연히 S 등급. 소수 정예인 S 등급 대열에 자리라도 맡겨 놓은 것처럼 당당히 합류하자 아진의 표정이 참 볼만했다.
‘표정 관리 너무 안 되는 거 아니야? 나중에 이미지 어쩌려고.’
데뷔한 다음이라면 모를까, 지금 저렇게 대처했다가는 팬은커녕 안티나 안 붙으면 다행이었다.
촬영장은 NO엔터 연습실이 아니다. 표정 한번 잘못 지었다가 슬로우 걸린 채로 5번씩 우려먹혀서 이미지 골로 가는 출연진이 한둘인가.
‘뭐….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여기는 약육강식 정도로는 설명되지 않는 야생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서바이벌은 기본적으로 내 새끼가 데뷔하려면 내 새끼보다 가능성 있어 보이는 놈들이 떨어져야 하는 판.
표정 관리를 못 하는 건 피라냐 떼에게 생살을 던져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 편집 쪽에서 NO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어느 정도 커버를 쳐 주긴 하겠지만.’
아무리 NO라도 화제성이 될 만한 장면을 제작진이 놓칠 리가 없다. 저러다 언젠가 스스로 자기 발등 찍겠지.
나는 흥 고개를 돌리고는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무대에서 내려왔다.
‘아무튼 나한테는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좋았다.
막판에 운명이 갈린(?) 같은 소속사 출신끼리 대형 어그로를 끄는 대사건이 일어났으니까.
조항준이 끈 어그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묻혀 버렸다.
‘이대로 조항준이 계속 기를 못 펴는 상황이 되면 좋겠는데.’
그렇게 쉽게 되진 않겠지. 오늘 화제를 모으는 데 실패했으니 다음에 더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른다.
미리 쓸데없는 짓 못 하도록 꺾어 놔야 하는데…. 머릿속으로 방법을 구상하려던 찰나 심사평이 불쑥 다시 떠올랐다.
‘하…. 다시 생각해도 신경 쓰이네.’
내가 99명 중 단연코 가장 완벽한 무대를 마무리하자 하나라도 지적하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멘토들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적을 하는 게 불가능한, CD를 씹어 먹은 수준 이상의 무대.
트집을 잡아 봤자 추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때 마선경이 불쑥 손을 들었다.
‘서인수 연습생?’
‘네.’
나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내가 잘했다는 건 모두가 알았으니까.
그리고 마선경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본인의 장점은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테고. 그 장점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좀 더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잘 들었어요.’
그 말을 하는 내내 마선경은 감정이라곤 없는 무표정이었다.
음이 다 갈라지고 흔들리는 연습생을 볼 때도 힘내서 더 해 보라는 듯 응원하는 미소를 지었으면서.
‘…….’
딱히 혼나거나 지적을 받은 건 아니지만, 다른 연습생들을 대할 때와 다른 태도가 신경 쓰였다.
‘뭐지…. 설마 내 재능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
완벽한 무대에 할 수만 있다면 앵콜의 앵콜까지 계속 부르고 싶은 고양감에 젖어 있었던 나는 기분이 팍 식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건방진 소리야,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도 연습생 생활을 하며 만난 트레이너 중 그런 사람이 있었다. 은근히 내게 목이 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던.
으음…. 생각만 많아지던 그때 영인이 불쑥 다가와 물었다.
“맞다. 형, 근데 아진이랑 진짜 친해요?”
너는 제발, 나 혼자 생각할 시간 좀 주면 안 되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