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이것까진 생각을 못 했는데 (2)
“현호밖에 없어? 그럼 센터 현호로 한다.”
여기서 이의 제기 안 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거라는 듯 정리하려 하자 홍수민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
“나, 나도! 잘할 자신 있어!”
그러면 진작 들 것이지. 비주얼에서 너무 압도적인 제현호 말고 홍수민도 손을 들자 좀 만만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임희록도 끼어들었다.
“나도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 거치고는 기합이 너무 빠져 있잖냐. 믿음직하진 못하지만 결국 유지원 빼고 나머지 세 명은 고스란히 손을 다시 든 꼴이 되었다.
‘흠….’
솔직히 센터는 좀 더… 무대를 좋아하는 녀석이 맡는 게 맞다고 생각은 하거든.
제현호야 시키면 잘할 거고 실제로도 기능적, 기술적인 수행은 완벽에 가까우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대는 역시 단순히 잘하는 것 이상의 플러스알파가 필요했다.
‘일각에서는 내가 왜 남의 집 아들 크는 걸 돈 주면서 지켜봐야 하냐고 욕부터 박고 보지만….’
원래 아이돌의 본질 자체가 그렇지 않나. 타인의 가장 반짝이는, 그리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응원받고 또 응원하는….
백날 무대 완벽하게 삑사리, 실수 하나 없이 하면 뭐 하냐. 데뷔는 제작진한테서 성장 서사 진하게 부여받은 놈이 할 텐데.
한마디로 결국 완벽하게 잘하는 것보다도 마음을 움직이는 게 우선이란 소리였다.
‘그런 면에서 저놈은 좀 불안하긴 해.’
내가 살짝 확신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을까? 제현호가 슬쩍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제가 제일 잘할 자신 있어요.”
이놈이 모처럼 의욕이 있어 보이는 발언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제현호의 손을 들어 주려면 내게도 논리가 있어야 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여 제안했다.
“너희가 센터로 무대에 섰을 때 우리 팀 시그니처로 밀 수 있는 포인트 안무 제안을 해 봐. 한 시간 줄 테니까 각자 기획해서 준비해 보고 다수결로 정하자. 괜찮지?”
가뜩이나 선곡도 내가 강하게 밀어붙여서 추진했는데 센터까지 일방적으로 정하면 이건 확실히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경쟁 붙여서 다수결로 정한다는데 불만 가질 게 뭐가 있어. 슥 반응들을 확인하자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런대로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윽… 알겠어요. 아니, 알겠어.”
반말을 쓸 거면 쓰고 안 쓸 거면 말라니까. 아무쪼록 아무나 기발하고 각 사는 거 들고 와 봐라.
연습생들 사이에 황금 사과를 던져 놓은 그때, 내내 잠자코 있던 주혜성이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그… 혹시 나도 해 봐도 될까?”
갑작스러운 난입에 임희록이 순간 눈을 흘겼다가 당황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형도 하게요? 갑자기요?”
갑자기까지는 아니지. 아까부터 내내 말하고 싶은데 끼어들어도 되나 눈치 보느라 입 다물고 있었으니까.
안 될 건 없었다. 자기가 제일 잘할 자신 있다고 했으면 쫄릴 게 없어야지.
“마음대로 해요. 그럼 한 시간 동안 각자 자료도 찾아보고, 연습실 빈 데 많으니까 가서 거울 보고 체크도 해 보고. 저희는 여기서 다른 거 결정해야 하는 거 정리해서 뭐라도 하고 있을게요.”
각자 한 시간의 제한 시간 동안 이래저래 찾아보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연습실에 남은 건 달랑 세 명뿐이었다.
이름이 오영환이랬나. 19살 D등급 연습생 한 명과, 유지원,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었다.
“너는 왜 포기했어?”
어색한 침묵 속에 지원에게 묻자 지원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나보다… 현호 형이 더 잘할 것 같아서.”
솔직함이 지나친 거 아니냐. 물론 전면에 나서는 퍼포머로서는 제현호가 유지원보다 나았다. 이건 팩트였다.
그래도 한번 도전이라도 해 보면 도움은 될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거기까지 내가 하나하나 챙겨 줄 수는 없었다.
“너는 음색이 장점이니까 센터보다는 도입부나 리드 보컬 쪽을 노리는 게 나을 거야.”
예전에는 도입부 그거 뭐 아무나 시키는 거 아닌가? 하는 인식이 강했지만 요즘은 또 달라졌다.
도입부에서 시선을 확 잡아끄는 것만으로도 도입부 장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메보 자리는 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지만 주목받는 자리가 거기만 있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서브 래퍼 같은 게 제일 애매하지 않나.’
자진해서 서브 래퍼로 가겠다고 한 은찬의 행보가 다소 의외였다.
‘당연히 자기가 메인 래퍼 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따로 뭐 생각이 있나…. 아니면 나서는 걸 원래 안 좋아하나. 직전 조별 무대에서도 메인 래퍼는 박하연이었지.
잘하긴 확실히 잘하던데. 둘이 포지션이 하나는 앞으로 나서는 쪽이고 하나는 뒤에서 서포트해 주는 쪽인가.
왜 세트로 나온 건지 이해가 되면서도 의아했다. 형 쪽은 아무리 봐도 아이돌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설마 뭐, 동생 쪽 혼자 내보내기 불안하다고 묶어서 보내고 그런 건가?’
나는 잠깐 의문이 들었다가 곧바로 철회했다.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할 리가. 그냥 해볼 만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힘들어서 짜증 난 거겠지.’
어쨌거나 다른 조원들을 다 뭐 하나씩 할 거리를 만들어서 내보냈으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는 이제 뭐 해야 하지?”
당장은 어쨌거나 멤버 다섯 명이 자리를 비워서 중요한 건 정할 수가 없는데….
‘아, 맞다.’
나는 불현듯 이번 미션부터는 조명을 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이제 조 이름을 정해야 할 것 같은데. 이따 다른 조원들 들어오면 의견 중구난방 돼서 정하기 어려우니까 지금 바로 정할까?”
어차피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들었을 때 쪽팔리지만 않으면 될 것이다.
“앗, 네네!”
지원이 드디어 자기도 뭔가 할 수 있는 게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근데 존댓말이랑 반말 아직도 헷갈리는 거 언제까지 그럴 거냐.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그냥 반말하라니까.”
“…응!”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귀엽긴 한데… 제작진한테 푸시라도 받아서 다행이지.
혹여 찍히기라도 했으면 아찔할 뻔했다.
‘실제로도 여기저기 미움도 많이 사는 모양이고.’
이를테면 그런 거다. 얘는 당연히 나보다 못할 줄 알았는데. 내내 빌빌거리다가 당일 갑자기 나보다 좋은 결과를 받아서 열등감 버튼을 누르고 다니는….
그게 잘못한 거라고는 말할 수 없지. 그렇긴 한데… 결과적으로 애는 나쁘지 않아도 원한을 사고 다니는 타입이라 해야 하나.
편집을 잘 받으면 서사의 수혜자, 못 받으면 민폐. 내보내는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냐에 따라 반응이 손바닥 뒤집듯 바뀔 위험이 있었다.
‘일단 나랑 있을 때는 프리라이더 소리는 안 듣게 잘해 봐야지.’
각자 펜과 종이를 쥐여 주고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적어 보라고 시켰더니 곧잘 단어 몇 개를 적어 나갔다.
[일식]
[사막]
[태양]
[전쟁]
모두 가사에 한 번씩 등장하는 키워드였다.
옆에 붙어 앉은 영환도 이것저것 적었다.
[소년들]
[보이즈]
[이클립스]
[포텐]
마지막은 무슨 의미야? 종잡을 수 없었으나 나름대로 열심히 적어 나가고 있었다.
홍수민도 의욕은 넘치는 녀석이고. 주혜성도 활동한 짬이 있으니 시키는 건 얼추 따라오지 싶고.
‘문제는….’
임희록 걔는 진짜 괜찮으려나. 아까부터 계속 불만은 많고 속으로 삭일 생각은 못 하고 툭툭 티를 내는 게 별로 좋아 보이진 않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불편함 이상으로, 방송에 나갈 때가 문제였다.
눈치껏 제작진이 가려 주거나 아님 통편집을 당하면 차라리 나은데.
애매하게 일부 장면만 잘려서 나가거나 아니면 갈등 요소로 제작진이 대놓고 활용하거나 할 경우 욕먹기 딱 좋았다.
‘뭐, 자기 팔자 자기가 꼬는 거지.’
나는 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 썼어?”
“응.”
앞에 옹기종기 앉은 미자들이 내민 최종 후보는 각자 세 개씩이었다.
우선 오영환이 낸 것부터.
[솔라보이즈, 크랙, 우주소년]
유지원이 낸 건 이 세 가지였다.
[파라노말, 에잇 아워, 다운 유니버스]
‘왜 둘 다 우주에 꽂힌 거지.’
가사가 딱히 그렇게 천문학적인 내용은 아닌데. 뮤직비디오가 화성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기라도 했나.
시청자들에게 각인되려면 너무 긴 팀명은 좋지 않다. 너무 짧아도 아쉽고.
그러면 남는 건 세 개 정도인데…. 그중에 너무 기존에 존재하는 그룹명이랑 겹치는 건 빼고.
이것저것 다 소거하고 나면 제일 마음에 드는 건 ‘파라노말’이었다.
‘가사 내용이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노래와 외침으로 바꾼다는 내용이니까, 초자연적인 무언가, 같은 느낌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마치 받아쓰기를 하고 채점을 기다리는 초등 저학년처럼 얌전히 두 눈을 말똥거리는 두 녀석을 보고 있으니 재차 웃음이 나왔다.
“나는 파라노말이 제일 좋은 것 같은데.”
“!”
내 지지를 받은 지원이 눈을 반짝이며 기뻐하려다가 슬쩍 영환의 눈치를 보고 얌전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냥 좋아할 거면 대놓고 좋아해라.’
막상 정했어도 이따 온 나머지 조원들이 반대하면 백지로 돌아가겠지만. 어쨌거나 우리도 소소하게 뭔가를 하고 있었다는 보람에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럼 일단 파라노말로 가제 정해 두고 이따가 조원들 다 오면 다시 얘기해 보자.”
“응!”
그렇게 팀명 짓기가 마무리되어 가던 즈음.
똑똑-
연습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조원이면 어련히 열고 들어왔을 텐데. 의아하게 생각하며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로 외쳤다.
“들어오세요!”
그리고 곧바로 벌컥 문이 열리며 요란한 소동이 벌어졌다.
“안녕하세요! 1조 서인수 팀! 잘돼 가고 있나요!?”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엄청난 성량. 내내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쥔 모습만 봐 왔던 국민 매니저 대표, MC 비안이었다.
“헉, 안녕하세요, 선배님!”
비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앉아 있던 세 명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배꼽 인사를 했다.
“어머, 아니에요! 앉아요, 앉아요! 나머지 조원들은?”
오해가 없도록 곧장 설명했다.
“아, 저희 센터 결정전 하느라 각자 준비하러 개인 연습실에 있습니다! 곧 돌아올 거예요.”
비안의 등 뒤로 줄줄 PPL로 추정되는 떡볶이 박스가 실린 트롤리가 놓여 있었다.
“아, 그래요? 그럼 조금만 기다렸다가 나도 같이 볼까? 어때요? 괜찮죠?”
‘?’
갑자기요? 느닷없이 난입한 비안이 관전하겠다며 벽 쪽에 붙어 있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
“여기 기대주가 잔뜩 모여 있어서 궁금했거든요.”
때마침 한 명, 두 명 복귀하던 조원들이 입구에서 비안을 딱 마주치고 당황해서는 문을 닫고 다시 돌아나갔다.
“?????”
그러곤 다시 문을 열었다.
“?????”
바보냐? 사람이 당황하면 머리가 굳어 버린다고, 깜짝 놀란 수민이 화들짝 사과하며 문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곧이어 제현호가 문을 벌컥 얼었다.
“?”
“아!”
제현호와 비안의 눈이 마주친 순간, 제현호가 예의 무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