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정상을 지키기 위해 (2)
평소에도 무뚝뚝한 표정으로 유명한 연성 프로덕션의 대표 유해라. 비안과 같은 그룹 출신의 기획사 대표였다.
‘당시 비안과 나이 차이 크게 나는 맏언니 포지션이었지.’
마선경에 이어 서주연까지. 나 뭐… 특정 연령대 관계자들이 유독 싫어하는 관상이고 그런가…?
나는 멍청한 고민이나 하며 비안의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명심하세요! 각 팀별 제한은 8명! 스카우트가 마무리된 팀은 바로 장소를 이동하여 본격적인 합숙 트레이닝에 들어가게 됩니다.]
“합숙 트레이닝?”
합숙이라면 지금도 지겹도록 하고 있건만. 여기서 합숙이라는 건 8인 1실을 쓰게 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어디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나?”
모든 게 미지수인 와중 비안이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마시고 자신 있는 연습생부터 지금 바로 Seize your chance! 정해진 순서 없이 준비된 연습생부터 바로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비안이 웃음과 함께 무대에서 뒤쪽 안내석으로 이동하자 스크린 뒤로 60초 카운트가 깜빡였다.
[60]
[???]
아래는 무대 위로 올라간 연습생의 이름이 표기되는 모양이었다.
“…….”
장내가 일순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했다.
조금 전 32명이나 되는 탈락자들을 떠나보낸 와중, 이 압박감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선뜻 첫 타자로 나설 사람은 없….
지 않았다.
“저요!”
연습생들이 몰려 있는 무리 사이에서 최장신인 영인이 손을 번쩍 들고 앞으로 나왔다.
“와… 용기 대단하다.”
“아니, 뭐… 그럴 만하긴 하니까….”
비록 팀에서 본인과 하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탈락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으나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게 멘탈 관리에 좋긴 하겠다.’
가끔 유지원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정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또 어떨 때 보면 미련이나 배려라고는 없는 놈처럼 냉정했다.
외국에서 자라서 그런가? 라고 하기엔 다 같이 이민 간 한국 친인척들의 영향도 많이 받은 것 같던데….
여러모로 추측할 수 없는 놈이었다.
[표영인 연습생, 무반주와 랜덤 플레이리스트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30초 이내로 결정해 주세요.]
60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원하는 반주를 틀어 줄 거라는 기대는 안 했다만.
보컬을 보여 줄 생각이 있는 연습생들은 무반주를 할 테고, 춤을 보여 주려는 연습생들은 반주를 택하겠지.
올라운더로 유명한 영인이 무엇을 택할지 이목이 쏠렸다.
“반주로 하겠습니다.”
스태프의 OK 사인과 함께 영인이 무대 한가운데에 섰다.
[지금부터 서바이벌 스카우트를 시작하겠습니다. 3, 2, 1…!]
[Start!]
등 뒤의 숫자가 59가 되는 순간, 해외 힙합의 비트가 흘러나왔다. 꽤 히트곡이라서 외국 힙합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도 여러 번 들어 봤을 곡이었다.
“…!”
그리고 비트를 듣자마자 익숙한 노래임을 눈치챈 영인이 웃으며 프리스타일로 몸을 움직였다.
큰 동작도 없고 화려한 비보잉이나 기술도 없는데도 기본적으로 길고 탄탄한 뼈대에 춤 선은 깔끔해서 딱딱 박자와 맞춰 떨어질 때마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Call your frends, tell them what.]
[Hot damn boy all here, cool like freezing.]
비속어가 가사의 절반은 되는 것 같았던 랩 파트는 넘기고 피처링으로 들어간 보컬 파트를 프리스타일로 추면서 소화해 냈다.
[3]
[2]
[1]
[종료]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야 영어가 제일 편한 언어라고 했으니 다른 연습생들보다 쉽긴 하겠지만.
춤도 되고 비주얼에 보컬까지 되는 놈이 프리스타일까지 저렇게 흠 없을 건 뭐냐고.
60초의 짧은 카운트가 끝나고 영인이 씨익 웃으며 마이크를 양손에 쥐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영인이 감사 인사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ALL SCOUT]
4대 기획사 전원, 영인에게 스카우트 버튼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첫 타자부터 올 스카우트가 뜨자 연습생들 모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스카우트가 꽤 후한 거 아냐? 하지만 상대는 영인이었다. 그 무대를 보고 그것보다 잘할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연습생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첫 번째 스카우트 결과가 공개된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공포감이 새겨졌다.
스카우트가 후하다면, 망설이는 사이 내가 가고 싶은 소속사가 금방 인원 다 찼다고 마감해 버리면 어떡하지?
그 와중에 어느새 심사평을 들은 영인이 여유 넘치게 웃는 얼굴로 외쳤다.
“팀 연성에 합류하겠습니다!”
모두가 쑥덕거리는 사이 영인의 팀이 결정되자 아까부터 내내 딱딱하고 냉소적인 표정이었던 유해라가 물었다.
“왜 우리 팀으로 오고 싶어요? 다른 기획사에서도 표영인 연습생을 원했는데.”
그러자 영인이 힘차게 웃으며 대답했다.
“리미 선배님과 같은 프로듀싱을 받아 보고 싶습니다!”
아주 영인다운 이유였다. 네가 걸 그룹 프로듀싱을 받아서 뭐 하게? 다들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는 와중 영인은 당당하게 팀 연성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나야 뭐… 특전이 있으니까 어디든 원하는 대로 갈 수 있겠지만.’
나는 애초에 NO 말고는 나를 스카우트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일단 슬슬 멤버 차는 거 보고 피아체나 KSD로 가 볼까.
피아체 쪽이 아무래도 보컬 특화 보이 그룹을 프로듀싱했던 경력이 있어서 더 마음이 갔다.
지금까지 애절한 발라드 계열 무대는 한 번도 한 적 없으니까 이번에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머릿속으로 대충 무대까지 그려 본 나는 10명쯤 팀이 배정되는 것을 지켜보다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무반주로 부탁드립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정석대로 내가 가장 잘하는 걸 보여 주자는 생각에 무반주로 호소력 짙은 고음 발라드를 불렀다.
깔끔하고 흔들림 없이 쭉 뻗는 소리. 음이 고음으로 올라가면서 불쾌한 느낌으로 가늘어지는 것 없이 탄탄하게 치고 올라가는 진성에 여기저기서 입을 벌리고 나를 지켜봤다.
좋아, 이 정도면 NO에서 스카우트를 못 받아서 올 스카우트를 따내지 못해도 방송에 나갈 만하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마친 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Team NO]
[X]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그러나 내게 퇴짜를 놓은 소속사가 하나 더 있었다.
[Team YS]
[X]
‘아니, 대체 날 왜 이렇게 싫어하는 거냐고.’
지금 난 이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꽉 잡고 있는 원 탑 출연진이었다. NO야 배경이 있으니 당연하다지만 왜 연성까지?
이렇게 되니 오기가 생겼다. 나는 별말 없이 칭찬뿐이지만 방향성이 맞지 않는다는 NO 대표의 말은 귓등으로 쳐낸 채 유해라의 심사평 차례만을 기다렸다.
“음….”
마침내 연성 대표 차례가 되자 유해라가 마이크를 쥔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좋아요. 서인수 연습생이 잘하는 걸 모를 사람은 없죠. 하지만 알다시피 아이돌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이게 대체 뭔 소린데.
“서인수 연습생, 노래하는 거 좋아해요?”
이건 또 뭔 소리냐고.
그럼 안 좋아하는데 내가 뭔 정체도 모를 출판사인지 악마인지 모를 거랑 인생까지 거래하겠냐.
그걸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쏘아붙이듯 대답할 수는 없었으니 나는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좋아합니다.”
그러자 돌아온 건 더 짜증 나는 헛소리였다.
“그런데 왜 즐거워 보이지가 않지?”
‘그야 당연히 슬픈 노래지 신나는 노래가 아니니까요?’
질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혹시 제작진이 뭔가 나한테 추가로 서사를 넣어 주기 위해 연성 대표에게 대본을 주기라도 했나?
그렇게 보는 게 합리적으로 보일 대화였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제가 아직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노래할 때 가장 즐겁습니다.”
그러자 유해라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남한테 보여 주고 싶은 거 말고, 본인이 진짜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 봐요. 잘 들었습니다.”
이게 진짜 뭔 소리냐고. 나는 답답함과 오기만 남은 채로 표정을 애써 조금 시무룩해진 척을 유지하며 모든 심사평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저는 정말 좋았어요. 서인수 연습생 보컬이 굉장히 호소력 짙어서 듣는 사람 마음이 다 뭉글뭉글해진다고 해야 하나….”
이어서 피아체와 KSD는 NO와 연성이 빠져 줘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나를 데려가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서인수 연습생과 함께 좋은 무대를 준비해 보고 싶습니다.”
거의 애걸복걸에 가까운 러브 콜이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온통 연성 생각뿐이었다.
평가는 모든 대표가 다 같이 진행하니 두루두루 좋게 보여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은 접어 두더라도.
‘본인이 진짜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 봐요.’
조금 전 연성 대표에게서 들은 말이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 14년의 연습 생활이 뭉뚱그려 부정당한 듯했다. 내가 이게 안 좋았으면 그렇게 오래 시간을 쏟아부었겠냐고.
마침내 결정을 내린 나는 마이크를 쥐고 외쳤다.
“TOP 3 베네핏을 사용하여 팀 연성에 합류하겠습니다.”
“네?”
한참을 내게 어필을 했던 KSD와 피아체 대표가 대체 왜?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유해라는 꼿꼿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유 대표님이 만족하실 만한 모습, 반드시 보여 드리겠습니다.”
겟 데뷔 위드미에 참석한 후로 처음 시도하는 도박이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나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상태창을 무시하며 유해라를 마주 보았다.
[어그로 지수가 (높음) 상태로 상승하였습니다.]
[개연성 지수가 (높음) 상태로 상승하였습니다.]
하여간 내가 뭐든 위험에 내몰려야 좋아한다니까.
이제 남은 건 이 위기를 내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
잠시 후, 8인의 팀이 완성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와 영인이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잠시, 요주의 인물이 한 명 더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팀 연성에 합류하겠습니다.”
지금까지 2위를 지켜 온 공민형이었다. 하다못해 아진도 온라인 투표가 시작되면서 순위가 흔들렸는데 이놈은 건재하게 내 뒤에 붙어 있었다.
‘차이는 거의 두 배 격으로 나지만.’
공민형의 존재에 위기감을 느껴 본 적은 단연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생각을 해 본 적 없다에 가깝달까.
공민형은 애초에 아진과 계속해서 한 팀으로 붙어 다녔다. 그래서 날 뭐 의식이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경쟁자이지만 이길 수는 없는, 벽 같은 존재.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진이 진심으로 날 못 이겨서 악에 받친 것처럼 보이는 거랑 다르게 말이지.’
아진의 편에 선 이상 최종 데뷔조에서 나와 같은 팀이 되긴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적대시할 필요는 없는 녀석. 딱 그 정도가 민형에 대한 인상이었다.
“와! 나 너랑 진짜 같은 팀 해 보고 싶었어!”
4차 미션까지 와서 나와 한 팀을 하기 위해 연성을 택했다고 말하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