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그렇게까지는 좀 (4)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영인이 왼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했다.
윙크는 무슨 얼어 죽을 윙크야.
그러나 더 미루다가는 박자를 놓칠 것 같았으므로 나는 급히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구름 위로 올라가면 다 같이 미소를 짓고 웃어 보자~”
그러고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아이에게로 마이크를 내밀었다.
망설이지 말라는 듯 마이크를 까딱하며 웃어 주자 아이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꾸, 꾸믈, 꾸, 는, 대, 훌쩍, 로, 이러지는, 흑….”
군데군데 코를 너무 먹는 바람에 가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이에 영인이 개구진 목소리로 외쳤다.
“좀 더 크게 부를 수 있을 텐데~? 형이랑 같이 해 보자! 하나, 둘, 셋, 넷!”
그러고는 아이가 불러야 할 가사를 함께 따라불렀다.
“꿈을 꾸는 대로 이뤄지는 순간, 멈추지 말고 노래 부르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뭐야? 지금 뭐 촬영 중인가?”
커플들 중 한쪽이 핸드폰을 꺼내 우리를 촬영하려 하기에 나는 슬쩍 그쪽을 보며 입술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그 후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자 알았다는 듯 커플 중 남자 쪽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말고 다른 거 부를 수 있는 거 있어?”
언제 울었냐는 듯 방긋방긋 웃는 아이에게 하연이 묻자 아이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기, 기차 여행…!”
여행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가요였다.
“우와, 그렇게 어려운 노래도 부를 수 있어?”
규민이 과장된 표정으로 놀란 척 묻자 아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럼 그거 부르자!”
마이크는 꺼져 있고, 조명도 제대로 켜지지 않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즉석 공연이었지만 출연진(?)들의 쿵짝이 잘 맞은 덕에 그런대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On my way~ 달려가는 거야.”
“두려운 건 없어. 어깨에 멘 기타 하나로 모든 걸 떨쳐 버리고~.”
“가벼운 발걸음에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옆에서 아이의 부모님도 같이 손뼉을 치며 함께 불러 주자 정말 미니 콘서트라도 된 것 같았다.
어느새 눈물이 아닌 웃음이 묻어나는 얼굴로 신이 나서 목청을 높이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휙, 영인이 나를 무대 한가운데로 잡아끌었다.
“뭐 하고 있어요. 우리 메보 멀뚱멀뚱 꿔보처럼 멍때리고 있네.”
하여간 저거 인터넷 못 하게 핸드폰 뺏어 버리든가 해야지.
저러다 카메라 앞에서 이상한 커뮤 용어라도 쓰면 저거 어쩔 거야.
나는 한숨과 함께 소리가 나오지도 않는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자유롭게 부는 바람 on my way, 계속 가는 거야.”
나머지 손님들도 무대 가까이 와서 가사를 함께 외치고 있었다.
‘…….’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조금은 즐거웠다.
“더는 도망치지 않아. 마음이 가는 대로 가는 길이 나의 way!”
어느새 신나서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목청을 높이고 있는 아이를 보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처음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게 언제였더라. 유치원 졸업 공연 때였나.
그 전에도 계속 모델 해도 되겠다, 연예인 해라 같은 소리는 귀에 못 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때마다 부모님이 생각 없다고 거절했었지.’
다른 집 부모들은 애 인물이 인수만 못한데도 인물이 아깝다고 여기저기 에이전시에 연락 돌리고 난리라는데, 인수네는 애가 저렇게 예쁜데 아깝다고 난리들이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연예인은 나와는 관계없는 세계인 줄로만 알았다. 온 학부모를 초대한 무대에 서기 전까지.
독창을 위해 무대 중앙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순간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심장이 뛰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고, 나를 보고 즐거워해 주는 것이 좋았다.
나의 일방적인 실연이 아니라 무대 아래의 관객들과 함께 이 순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실감이 나자 머리로 피가 몰렸다.
‘왜 아이돌이 하고 싶냐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노래를 기대하고, 나를 위해서 환호하고, 함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소리 지르는 그 감각이 좋아서.
내일을 또 힘내서 살아가게 하는 넘치는 에너지와 즐거움이 좋아서.
‘내가 하고 싶은 무대.’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다니던 아이디어들이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했다.
팀의 이익을 위한 무대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건….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조금 진정해야겠다 싶은 순간.
“On way! 달려가는 거야. 두려운 건 없어!”
온실 속에 있던 모든 손님들이 함께 목청을 높였다.
나 또한 목소리를 한데 모으며 웃었다.
***
잠시 후, 시설 점검을 하느라 헐레벌떡 달려온 직원이 잠금장치를 마스터키로 열었을 때는 그로부터 30분이 넘게 지난 후였다.
얼결에 아이와 부모님은 물론 몇 명 더 있던 손님들에게도 팬 서비스를 하고 나니 예상보다 시간이 더 지체되어 있었다.
“우리 진짜 늦었어. 얼른 들어가야 해.”
급히 표를 다시 예매하고 역으로 돌아왔으나 하필 시간대가 안 맞았는지 열받을 정도로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그냥 걸어가는 게 더 빠르겠다.”
“?”
걸으면 편도 1시간 20분인데 무슨 소리야. X라이 같은 소리 하지 마. 규민과 내가 동시에 영인을 노려보자 영인이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여기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단 운동도 되고 좋지 않아?”
“너나 실컷 해.”
영인과 비교적 손뼉이 잘 맞는 규민도 그건 미친 짓이라는 듯 택시 호출 어플만 계속 들락날락했다.
그렇게 30분을 허공에 뿌리고 나서야 겨우 배차된 차를 타고 펜션으로 돌아가자….
“…….”
일이 생각보다 커져 있었다.
‘그야 시간이 벌써 4시가 다 되어 버렸는데 안 들킬 거라고 기대도 안 했다만.’
목표는 점심 먹기 전에 빠르게 귀가하는 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차는 놓치고, 다음 차는 2시간 후에나 있어서 발을 붙잡히고 말았다.
‘아….’
아까 아이 부모님한테 태워다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숙소 위치를 외부인에게 노출하는 것도 미친 짓인지라 그냥 감사 인사만 받고 헤어졌는데.
점심 전에 안 보이는 거면 그냥 잠깐 바깥 해변에 산책이라도 나갔나, 아니면 방에서 자고 있나 하겠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비워 버렸으니 당연히 걸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요 앞에서 바람 좀 쐰다는 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네요. 죄송합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스태프에게 고개를 숙이자 스태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서인수 씨는 이번이 두 번째시네요.”
무슨 소리야? 나도 순간 이해가 안 됐으나 촬영 초기 제현호를 따라갔다가 벌어졌던 소동이 떠올랐다.
‘그것까지 무단 이탈로 치냐….’
“기존 계약서에는 무단 이탈 후 미복귀 시에 해당되는 내용밖에 없어 내부 상의 후 앞으로 처분에 대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공민형과 눈이 마주쳤다.
“…….”
묘하게 웃는 것 같기도 한 무표정이 거슬렸지만 어쨌든 잘못은 잘못.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임시 근신처럼 4인실 안에 들어선 순간 규민이 침대에 드러눕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짜르진 않을 거 같은데.”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건지, 아니면 대책 없이 태평한 건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짜르지만 않겠지.”
이전에도 계속 들락거렸던 녀석들은 많았던 모양이지만, 이렇게 딱 걸린 건 우리가 처음이었다.
다른 팀원들도 봐 버렸으니 아무 페널티 없이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었다.
‘가뜩이나 지금도 내가 제작진 버프를 받아서 떴네 어떻네 말이 나오고 있는데….’
여기서 만약 ‘서인수 씨는 시청률을 견인하고 계신 주요 출연진이시니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하고 봐주기라도 했다간 든든한 악플 대식가가 되기 딱 좋았다.
잠시 후 피곤한 표정의 유 대표와 메인 피디가 숙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참 공방전이 벌어졌다.
“제가 하루 개별 일정을 가져도 좋다고 허가했습니다. 장소를 지정하진 않았으니 문제 될 건 없는 것 같습니다만.”
놀랍게도 유 대표가 우리를 질책하는 대신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러나 피디는 입장이 달랐다.
“하지만 그건 대표님과 연습생 사이의 문제고요. 촬영지를 협의 없이 이탈했을 때 뭔가 사고라도 생기면 결국 뒤집어쓰는 건 저희인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한들 징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참 페널티를 줘야 한다, 그럴 정도의 일은 아니다로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낮은 수위의 징계가 내려졌다.
[팀 단체 어필 타임 출연 제외 명단]
[- 서인수]
[- 표영인]
[- 이규민]
[- 박하연]
어필 타임 미니 게임에서 시간을 벌어 온 주역들이 우르르 빠져 버리고 나니 남은 팀원들이 3분이나 되는 시간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사고에 표정이 어두웠던 나머지 팀원들도 어쨌거나 화면을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에 내심 만족한 눈치였다.
‘뭐… 나한테 직접 피해를 끼친 건 아니니까….’
중요한 연습을 하던 중 탈주한 것도 아니라서 더더욱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다시 유 대표 앞에 서서 각자 준비한 걸 보여 줘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
“이상입니다.”
조금 전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했다.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발표한 것을 들은 유 대표가 어김없이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이전에 느낀 감상과 마찬가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게 서인수 연습생이 찾은 이유인가요?”
다소 동문서답처럼 보이는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무대가 일반적인 대형이 아닌데 자신 있어요?”
유 대표의 눈빛이 서늘했지만 나는 밀리지 않고 물었다.
“구현해 주실 수만 있으면 반응은 저희가 이끌어 내겠습니다.”
낮에 그런 사고를 쳐 놓고도 맹랑하다는 듯 유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하고 싶은 게 확실하게 생긴 이상 더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어차피 이번 미션 이미지는 무단이탈로 망했으니 무대라도 어떤 편집으로도 망칠 수 없게 잘해야 해.’
굳은 의지와 함께 대답하자 유 대표가 냉소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팀원들과 협력해서 구체적으로 살을 붙이는 건 알아서 해야 할 거고요. 나는 이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여러분들의 능력 밖의 것들만 지원해 줄 겁니다. 물론 능력 밖의 것인지는 제가 판단하고요.”
그러곤 모두가 다 똑바로 알고 있으라는 듯이 쐐기를 박았다.
“아시다시피 이 무대로 인생이 걸려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여러분이에요. 나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말이 꼭 어차피 책임은 너네가 지는 거다, 하고 애매하게 발을 빼는 것 같았다.
이건 되는 기획이다, 하고 안심하고 확신할 수 없도록.
‘…진짜 성격 이상해.’
그리고 며칠 후, 단체 연습 후 개인 연습까지 모두 끝낸 늦은 밤.
골 아픈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