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각오만으로는 (3)
[바로 이번 4차 미션부터 중국 CMTV 통신을 비롯하여 일본, 대만 등 세계 각지의 제휴 OTT사에서 매주 겟 데뷔 위드 미를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전 세계를 향해 뻗어 가는 겟데뷔의 뜨거운 열기! 실감 나시나요?]
나겠나요? 이건 유리한 연습생이 뻔히 따로 있었다.
‘중국에서 몇 명 나왔더라.’
일본인 연습생이 두 명인가 있었고, 중국인이 셋, 대만인가 홍콩에서 하나씩 있었던가.
과거형인 이유는 전부 TOP 16까지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나는 재빨리 겟데뷔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TOP 32위 안에 든 연습생 리스트를 확인했다.
1회차 때 데뷔 멤버였던 리첸싱을 비롯하여 중화권에서 온 연습생이 셋이나 남아 있었다.
‘중국 쪽 자본이랑 무조건 중화권 한 명은 데뷔시키기로 협의한 거라도 있나?’
갑작스러운 글로벌 투표 오픈 선언에 당황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놀란 가운데 영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럼 난 유리해진 건가?”
너도 조금이야 이득은 보겠다만… 아쉽게도 영인이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커버 댄스 채널의 구독자는 대부분 영미&동남아시아 쪽 유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 비안이 말하는 ‘글로벌’이란 사실상의 중화권 팬덤을 지칭하는 것에 가까웠다. 중국 인구가 좀 많아야지.
영인으로서도 크게 이득을 볼 수 있는 변화는 아니었다.
“너보다 유리해진 연습생이 따로 있겠지.”
규민이 썩 밝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리자 영인이 이해했다는 듯 짧게 감탄했다.
“아.”
그 전까지만 해도 해외 셀링은 말도 없었으면서, 갑자기 변화가 생긴 데에는 아마도 프로그램 자체의 흥행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안정적으로 4% 후반대를 찍고 있으니 욕심이 날 만도 하지.’
곧 5%대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는 만큼 꽤나 유리한 조건으로 판매할 수 있었을 테니까.
‘문제는 제작진이 어디까지 협의를 했을지인데….’
방영 전부터 내게 정산율을 대가로 장난질을 제안하려고 했던 놈들이다.
나 말고 다른 연습생들은 ‘협의’라는 이름으로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 제안이 과연 특정 연습생에게 유리하게 편집을 잡아 주는 정도에 그칠지, 아니면 최종 데뷔 멤버에까지 미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조 짜는 문제는 TOP 16이 결정되어야 나도 확실하게 영입을 할 수 있으니까.’
눈여겨본 녀석들은 있으니 이 안에서 얼마나 살아남을지가 관건이었다.
‘다들 표정이 썩었네.’
당연했다. 영인을 제외하고는 불리할 것이 명백한 변화였다.
“어쨌든, 다들 고생했어. 베네핏도 받았으니까 다음 주에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해산 후, 숙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
무대 직후에는 침대에 드러눕는 순간 그대로 눈이 감길 것 같았는데.
막상 잘 수 있게 되니까 주변의 심란한 분위기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잠깐 나가서 물이라도 마시고 올까.’
한참을 부스럭거리다가 조용해진 규민의 침대를 노려보며 거실로 향했다. 어스름한 거실에서 누군가 먼저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누구지?’
달칵 거실 등을 켜자 공민형이 눈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내가 태연하게 묻자 공민형이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이었어?”
“뭐가?”
공민형이 대뜸 물은 질문에 나는 딴청을 피웠다.
“왜 나한테만 나중에 얘기한 건데.”
“아, 뭐….”
네가 방해할 것 같아서, 라고 산뜻하게 불어 버리기에는 나도 쌓인 게 많았다.
“그냥. 네가 여러모로 부담이 많은 것 같길래.”
“언제부터 날 그렇게 배려했다고?”
그렇게 나오면 이쪽도 할 말이 있었다.
“네가 유 대표님 앞에서 네 잘못이라고 대답했을 때부터?”
“…하.”
‘하.’는 얼어 죽을. 이쪽이라고 바보도 아니고 가만있을 줄 알았나.
마음 같아서는 대체 왜 트롤 짓을 한 건지 묻고 싶었으나 의중이 뭔지 알 수 없는 한 선뜻 이쪽의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무튼 고생 많았다.”
나는 그대로 소파를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찬물을 반 컵쯤 들이켜고 다시 거실을 지나쳐 방으로 돌아갈 때에도 민형은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왜 저래.’
어쨌든 1위는 1위다. 결과적으로 순위 유지에는 도움이 될 테니 넘어갈 만도 하지 않나. 쯧, 속으로 혀를 차며 문고리를 쥔 순간 민형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너는.”
“…?”
내가 문을 열다 말고 뒤돌아서 민형을 마주 보자 놈이 곧바로 말을 얼버무렸다.
“아냐. 됐어.”
“뭔데.”
“됐다니까.”
거참, 사람 신경 쓰이게 하네. 일부러 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뭔데 말을 하다가 말아.”
팔짱을 낀 채로 거실로 다시 다가가자 공민형이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로 미간을 짚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아무 일도 아니면 왜 말을 하다 마는데.”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민형이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린 탓이었다.
이러고 그냥 들어가서 자라고?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대로 버틸 거라는 듯 공민형 앞에 서서 기다렸다. 공민형이 잘못 걸렸다는 얼굴로 인상을 썼다.
“…여기 나오려고 NO 퇴사했다는 거 진짜야?”
그렇게 시간을 끌고 묻는 질문이 고작 이거냐. 나는 김샜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맞아.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
그러자 공민형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디서는 솔로 시켜 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했다던데.”
‘아.’
전혀 사실이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 핑계를 대고 나온 건 맞았다.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해 주고는 덧붙였다.
“그게 끝?”
“…….”
공민형이 시선을 피했다. 나는 짧은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지는 네 자유인데, 난 네 목표가 데뷔든, 아니든 신경 안 써. 그러니까 너도 네가 뭘 하고 싶은지나 신경 써.”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민형을 노려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 난 다시 잔다.”
민형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딱히 내게 대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서 그대로 무시하고 잠을 청했다.
***
다음 날 아침, 익숙한 절차대로 짧은 휴일이 주어졌다.
곧바로 자취방으로 올라갈 생각이었으나 예상외의 일로 일정이 틀어졌다.
“야, 빨리 타! 빨리!”
“…? 너 미쳤… 뭐야! 왜 이래?”
느닷없이 구깃구깃 챙긴 짐째로 웬 승합차에 실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니 운전대를 잡고 있는 영인이 보였다.
“야, 이 새, 얘 운전해도 돼?”
“네, ‘이 새끼’ 운전 잘해요. 면허도 있고요.”
영인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저 완전 베테랑 드라이버니까 걱정 안 해도 되거든요.”
그제야 또 새삼 영인이 외국인이라는 실감이 났다. 한국 나이로도 면허는 딸 수 있는 나이겠지만.
그보다 차는 대체 누구 거고 대체 어딜 가려는 건데? 납치라도 당하는 것처럼 끌려간 곳은 후미진 산속에 있는 주택이었다.
“뭐야, 여긴?”
“우리 사촌 형네 주말농장.”
규민이 뻔뻔하게 대답하더니 설명했다.
“여기 바로 아래로 내려가면 계곡 있거든. 입구가 집 마당이랑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 식구들 아니면 아무도 안 와.”
“2박 3일로 빌렸대요!”
하연이 모처럼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그래서?”
내가 여전히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묻자 규민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 높였다.
“한우! 복숭아! 계곡! 빨리 개쩐다고 말해!”
“와아아아~!”
그래… 그렇게 된 거란 말이지. 듣고만 있어도 기가 쭉쭉 빨리는 기분이었다.
‘자취방에서 간만에 조용히 쉬고 싶었는데….’
지친 눈으로 규민을 노려보자 놈이 속 좋은 표정을 지으며 엄지를 척- 들었다.
‘고맙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절대 고맙다고 말 안 할 거다. 강제로 데려와 놓고 무슨.
웅성거리는 세 놈들을 뒤로하고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주섬주섬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간밤에 공민형 때문에 뒤척인 것도 있고 드디어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도 있고.
게다가 돌침대가 따로 없었던 숙소와는 달리 푹신푹신한 침대가 마음에 들어서 금세 잠이 쏟아졌다.
방 안 가득 퍼지는 맛있는 냄새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저녁이었다.
규민이 친척들에게서 받아 온 고기와 과일이며 간식 같은 것들을 자랑하는 너머로 정은찬이 영혼 없는 표정으로 복숭아를 씹고 있었다.
아삭아삭.
‘딱복이군.’
그 옆에 하연이 딱 달라붙어 앉아서 복숭아를 깎고 있었다.
“뭐냐, 저거.”
내가 눈을 의심하며 묻자 규민이 다 익은 고기를 새 접시에 덜어 내며 대답했다.
“몰라. 우리 것도 깎아 준대. 냅둬.”
조잘조잘 이번 미션에서 은찬이 얼마나 천재적이었는지 줄줄 당사자 앞에서 찬양을 늘어놓고 있었다.
은찬은 이런 건 익숙하다는 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 먹으라고 깎은 건 껍질과 함께 잘려 나간 게 30%는 되는 것 같은데.
“나 뭐 하면 돼?”
나만 마냥 멀뚱멀뚱 남이 준비한 걸 먹기도 좀 그래서 주방에 있던 앞치마를 매고 나서자 규민이 손사래를 쳤다.
“이따 다 먹고 설거지나 해, 설거지나.”
“저도 설거지 담당이에요!”
영인이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다. 대체 어쩌다가 소중한 휴가를 이놈들이랑 보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여기 이따 불 끄면 은하수 보인다.”
“와, 대박!”
“저 살면서 은하수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회사나 제작진의 감독 없이 밤늦게까지 야식을 먹고, 어떤 운동은 재미가 없다거나, 근육이 붙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거나, 어느 회사는 오디션 때 필수 준비 곡으로 뭘 시킨다더라, 같은 시답잖은 얘기들을 했다.
‘회사 소속으로 있을 때 이런 적 있었나….’
없었다. 이런 폭식에 가까운 파티는 물론 한 끼를 든든하게 먹기만 해도 잔소리와 협박이 돌아왔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기들은 말도 없이 회사를 옮겼고, 혹은 아예 연습생을 그만두기도 했다.
너는 다음에는 데뷔조 확실히 들어갈 거 아냐.
선이 하나 그어진 상태로 같은 회사 연습생 이상의 진짜 친구가 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데뷔만큼이나.’
그래서 그런지, 이 낯선 상황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로 눈치 볼 것 없이 이렇게 시답잖은 휴일을 함께 보낼 수도 있는 거구나.
‘…그렇다고 이규민이나 이놈들이랑 휴일을 보내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천천히 눈앞에 있는 인원들을 눈으로 훑었다.
이규민은 여전히 왁자하게 목소리를 높여 떠들고 있었고 박하연은 다른 의미로 흥분한 듯한 얼굴로 은찬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은찬은 하연의 다독임을 받으며 대체 언제까지 먹을 생각인지 모를 복숭아를 계속해서 갉아 먹는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영인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눈이 딱 마주쳤다.
“왜요?”
“…아니야. 설거지나 미리 할까?”
“앗, 그럴까요?”
영인이 나를 따라 조잘조잘 걸어 나와 고무장갑을 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인이야 안심이라고 쳐도… 다른 녀석들 순위가 더 올라가야 할 텐데.’
연신 그릇을 닦고 있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남의 등수가 더 위로 올라가기를 바라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5명이 먹어 치운 흔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규민이 입에 수박을 문 채 뒤에서 나타났다.
“그거 끝내면 수박 먹어.”
“넹~”
뒤로 사라지는 규민을 따라 시선이 다시 모두에게 향했다.
데뷔까지는 모르겠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이 멤버로 무대 올려 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이 생각을 떠올렸을 때, 주사위는 이미 내 손을 떠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