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종착역 (3)
‘멤버들 간 합이고 뭐고 일단 데뷔시키면 알아서 친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기가 막혔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 팀을 몇 번 해 왔던 녀석들은 내가 뭘 고를지 알 것 같은데.’
양자택일의 옵션이 3개. 이 중 겹치는 것이 많은 연습생들끼리 팀이 되는 구조였다.
[강아지 vs 고양이]
[여름 vs 겨울]
[계곡 vs 바다]
대체 팀을 정하는 데 이런 취향이 겹치는 게 왜 중요한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만, 룰이니까 어쩔 수 없지.
침착하게 덮개로 가려진 투표소 같은 공간으로 가서 펜을 쥐었다.
‘웬만큼 눈치가 있는 녀석들은 맞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웬만큼’의 영역에 들지 못할까 봐 걱정되는 놈이 두 놈 있었다.
‘…….’
나는 잠시 펜을 멈추고 상태창을 띄웠다.
‘인벤토리 확인.’
팟, 하고 간만에 확인한 상태창에는 뽑고 파기하고 뽑고 파기하고를 반복하느라 얼떨결에 남은, 애매한 아이템만 남아 있었다.
‘뭐, 텔레파시 보낼 수 있는 그런 아이템이나 줄 것이지.’
하여간 도움이 되는 게 없어. 불평한 순간 [새 아이템 뽑기] 버튼이 반짝 빛났다.
남은 코인은 4차 미션을 완료하고 받은 2개. 이걸 여기서 사용하기엔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
함께 X같은 팀플을 이겨 냈던 녀석들과 같은 팀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마음이 조금 여려졌을 뿐 처음 겟데뷔에 발을 들여놓았던 시절의 각오는 아직 건재했다.
데뷔를 함께 하더라도 1년 동안의 인연이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임시 소속사 신분을 벗어나 반드시 원소속사로 돌아가야만 하는 계약직 신분.
머지않아 각자의 길을 갈 것이 명백한 멤버들에게 정을 붙여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간 따위 상관없이 내 인생에 엮일 녀석들이라면, 내가 억지로 아등바등 애쓰지 않아도 인연이 이어지겠지.
나는 마저 동그라미 표시를 하고 투표용지를 접어 제출했다.
[지금 바로 팀 편성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잠시 후 모든 용지가 정리되고 스크린에 결과가 노출된 순간.
“헉.”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름 아닌 나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나 때문만은 아니지만.’
내가 제출한 내용은 강아지, 겨울, 계곡.
나를 따라서 내가 체크할 만한 답을 고르려 했던 연습생들은 여럿이었지만 1차로 첫 번째 항목에서 걸러졌다.
‘그야… 개는 이름을 부르면 오잖아?’
게다가 이유 없이 나를 물거나 때리지도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핥긴 하지만…. 요즘은 자주 보지 못하지만 학창 시절 진순이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내 이미지가 워낙 냉한 느낌이어서일까 당연히 고양이를 고를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고양이… 귀엽긴 한데 아무래도 개가 더 좋지….’
평소 연습하다 말고 할 말 없으면 우리 집 개 사진을 보여 주거나, 집에서 보내 주신 담요나 이불 같은 것에서 개털이 나온 걸 봤던 팀원들은 내가 개파라는 걸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다음 겨울. 이건 대부분 예상했는지 정말 정직하게 자기 취향대로 고른 몇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겨울로 통일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계곡. 더운 것보다 차라리 추운 게 낫고, 소금기가 남아 찝찝한 건 질색이니 계곡이 훨씬 좋았다.
이것 또한 태복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팀원들은 내가 바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름 힌트는 많았는데….’
덕분에 나와 같은 팀 블루에 소속된 멤버들을 보니 제법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Team Blue]
[서인수]
[이규민]
[박하연]
[표영인]
[정은찬]
[유지원]
[제현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 이쪽에 오지 않았으면 했던 이름이 하나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진]
‘……!?’
나와 아진 본인은 물론 다른 연습생들도 당황한 듯 웅성거렸다.
‘뭐냐, 저거….’
‘괜찮… 나?’
아진 본인도 자신이 이 팀으로 올 줄 몰랐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정말 이놈이랑 같이 데뷔라고? 진짜로?
조금 전 어차피 1년짜리 계약이니까 멤버들 뭐 어떻게 되어도 받아들여야지~ 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왜 하필 이 녀석이랑?’
오자마자 한 게 이 녀석 한 방 먹이기라서 내가 벌이라도 받았나? 심보를 못되게 써서 돌려받은 건가?
눈앞이 핑핑 도는 한편 아진과 함께 어떻게 무대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가 아찔함이 아득하게 밀려들었다.
일단 다른 멤버들은 용케 팀 안에 잘 들어왔으므로 다수결로 밀어붙이면 되기야 할 텐… 데….
그 험난한 과정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하….’
오랜만에 새로운 삶을 얻기 전 봤던 아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징징거리고… 나 없이 너희가 뭘 할 수 있겠냐 배짱부리고… 연습도 안 하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뜻밖에도 아진이 먼저 손을 들었다.
‘…?’
[앗, 아진 연습생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그러자 아진이 ‘나 지금 불만 엄청 많아요.’ 하고 얼굴에 써 놓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멤버 트레이드를 제안하고 싶은데요.”
되겠냐? 속으로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응원하는 마음이 동시에 샘솟았다.
그래, 차라리 안 해 주면 하차한다고 협박이라도 해 주라. 아진의 단호한 표정에 잠시 촬영이 중단되고 제작진이 회의에 들어갔다.
작가들은 물론 메인 PD까지 모여 한참을 논의한 결과 양측에서 각각 방출하고 싶은 멤버를 1명씩 지명해서 교환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저쪽에서 누가 오려나….’
레드팀의 라인업을 다시금 확인한 나는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이는 연습생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오히려 이쪽도 바라는 바일 것 같은데.’
[주혜성]
지금껏 이렇다 할 성과를 크게 내지 못한 주혜성이 TOP 16 안에 든 건 운 덕택이 컸다.
3차에서는 베네핏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고, 이번에는 이전 활동 때의 해외 팬들이 힘을 모아 준 결과였다.
‘반대로 말하면 글로벌 투표 안 열렸으면 100% 떨어졌을 거라는 거고.’
운이 좋은 것도 실력이다. 다른 참가자가 부러움에 배가 아픈 건 개인 사정이고.
하지만 그게 내 팀으로 들이고 싶은 요인이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
그간 무대에서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저쪽에서도 가장 먼저 방출하려고 할 터다.
[그러면, 지금부터 트레이드 멤버를 공개하겠습니다!]
짧은 투표 시간이 종료된 후, 스크린에 각각 예상했던 이름이 떴다.
[팀 블루]
[아진]
[팀 레드]
[주혜성]
본인이 트레이드를 요구했던 만큼 당당한 표정의 아진과 달리 주혜성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마지막 결정을 눌러 주세요!]
[3]
[2]
[1!]
남은 멤버들 모두 앞에 놓여 있던 패드의 동의 버튼을 눌러 수락하자 아진과 혜성의 자리가 바뀌었다.
팀 레드 쪽으로 건너가던 아진과 흘끔 눈이 마주친 순간.
내가 죽어도 너랑 같이 데뷔하나 봐라 고집스러운 시선이 읽혔다.
‘누구는 뭐 좋은 줄 아냐.’
어찌 되었든 가 줬으니 고맙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멤버가 확정되자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이제 좋으나 싫으나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거네요. 마지막이니까 최선을 다해서 잘해 봐요.”
규민이 눈치껏 스타트를 끊자 주혜성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울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규민이 기껏 터 준 물꼬가 다시 막히지 않도록 말을 이었다.
“다들 잘하는 거 알고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내가 보여 주고 싶었던 거, 다 보여 주고 가요.”
멤버가 확정된 순간, 솔직히 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처음 3배수 오디션을 준비했던 게 초여름이었으니까. 3개월쯤 되는 긴 시간 동안 공들여 검증한 멤버들이었다.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그동안 여러 번의 위기와 위태로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모두 최고의 결과로 탈바꿈시켰다.
나 혼자만의 결과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파이널 미션의 무대에서 이 멤버들의 매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나만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이면 부끄럽겠지만.’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은 기쁜 마음이 제일 컸다. 만에 하나 데뷔에 실패한다 해도 후회 없을 무대를 올려 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일단 우리 아이디어 회의부터 하러 갈까요?”
남은 시간은 2주. 생방송 무대에 맞춰서 전국에 시청률 5%대로 송출해도 부끄럽지 않을 무대를 선보이려면 빠듯한 시간이었다.
잠깐의 침묵에 움찔하기도 잠시, 영인이 번쩍 손을 들었다.
“넵!”
우르르 함께 연습실로 이동하는 걸음이, 왜인지 가벼웠다.
아진이 다른 팀으로 가 버렸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
조 편성에서 하도 긴장한 탓일까, 이후로 이어진 팀 미팅은 생각 이상으로 순조로웠다.
가장 위험 요소였던 은찬은 다행히 4차 미션 조를 꽤 잘 만나서 만족스러운 조별 과제를 마쳤던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컨셉 있으면 레퍼런스로 보여 줘.”
2차 미션과 3차 미션 때의 폭군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꽤나 유순해진 태도에 나와 주혜성, 제현호 모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어디 뭐 잘못 먹었나? 귀를 의심한 그때 지원이 허둥거리며 변론했다.
“저희, 피아체에서 작업할 때, 한 대표님이, 형한테 이것저것 자율권을 많이 주셨거든요. 다행히, 결과가 좋아서…! 은찬 형도 좀, 조별 과제에 호의적으로 바뀌신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원이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것처럼 횡설수설하자 옆에서 하연이 한술 더 뜨며 거들었다.
“형도 이제 조금 배려해서 말하는 데 익숙해져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그걸 두 놈 다 요령 없이 본인 앞에서 지껄이는 바람에 결국 기어이 은찬의 눈썹이 삐죽 천장을 향해 올라가고 말았다.
“왜, 내가 또 팩폭 하고 다녔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해 왔던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시비가 아니라 팩폭이라 생각한다는 점에서 여전하다 싶었지만.
어쨌든 이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분위기에 안심이 되었다.
“아뇨. 지금이 더 편해 보이셔서 좋아요. 일단 저희 방향을 어떻게 잡고 싶은지부터 정하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내가 적당히 사담을 끊고 회의 쪽으로 말을 돌리자 슬쩍 눈이 마주친 하연이 부끄러운 듯 뒷목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인 은찬의 귀도 새빨갛게 붉어진 것 같았지만 나는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