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기다리고 있는 건 (2)
은찬의 눈을 먼저 가려 버렸어야 하는데. 영인을 발견한 은찬이 제법 간절해 보이는 얼굴로 나와 영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표영인 발언권 1회.”
내가 한숨을 삼키며 허락하자 영인이 입술을 삐죽이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미리 스몰토크로 입 틀 만한 간단한 걸 리스트 업 해 두면 되죠. 날이 많이 덥죠? 올 때 어떻게 왔어요? 혹시 제가 답변해 드렸으면 하는 거 준비해 오신 거 있어요? 학생이시면 요즘 시험기간이에요? 힘들겠다, 오느라 너무 고생했겠다, 등등?”
놀랍게도 정답이었다.
“우와…!”
지원이 뒤에서 눈을 빛내며 감탄하자 영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보통은 팬분들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쪽지에 적어 오거나 하시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녹음하거나 촬영하거나, 혹은 체크한 포스트잇 같은 걸 SNS 같은 데 올리는 분들이 많으니까 최대한 논란되지 않게 조심해서 답변하고요.”
내가 차분하게 조심해야 할 지점을 한 번 더 짚어 주자 은찬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미션 무대 너무 잘 봤어요. 멋있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무난무난하게 평범한 팬을 연기한 하연의 차례가 지나고, 영인의 차례가 된 순간, 영인의 눈이 장난기로 빛나는 것을 나는 보고 말았다.
‘이 녀석 뭔가 또 이상한 짓을….’
그리고 싸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형, 제 이름 기억하세요?”
“어…?”
당황한 은찬이 내게 SOS를 보내듯 바라보았다. 이름을 물어보는 팬 자체는 워낙 많아서 이상할 건 없었다.
기억하면 좋고, 못 해도 어쩔 수 없는. 아이돌이 워낙에 많은 팬들을 만난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은 섭섭하더라도 다들 양해하는 부분이었다.
은찬이 전기가 떨어진 로봇처럼 굳은 사이 영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지난번에 방청 때 맨 앞줄에 있었는데…. 꼭 기억해 주신다고 하셔 놓고….”
이제는 무슨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은찬을 보고 있으니 측은지심이 느껴졌다.
“아, 죄송, 합니다….”
“형 진짜 실망이에요. 전에도 저만 기억 못 해서 진짜 서운했었는데.”
“아… 그, 죄송합니다….”
3차 미션 때의 폭군은 어디로 갔는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냅뒀다간 한도 끝도 없겠네.’
나는 냅다 영인의 뒷덜미를 잡고 끌어냈다.
“네, 시간 다 되셨고요. 옆으로 넘어가세요.”
“에이~ 야박하다~”
“야박하기는. 그만 괴롭혀.”
영인이 괴롭힌 게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어서 규민이 또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임시 팬 미팅은 파행을 맞고 말았다.
“형, 제 이름은 기억하시죠? 저희끼리 별명도 만들고 그랬었는데….”
나는 영인과 같은 방식으로 규민을 끌어 내리며 말했다.
“시큐님, 이분 퇴장 부탁드릴게요.”
“떼잉.”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자 지원이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진짜 그러는 분들이 많아요?”
그에 대한 대답은 정석으로 정해져 있었다.
“아닌 분들이 더 많아요.”
긴장할 필요가 있는 건 맞지만 굳이 겁을 줘서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마지막 미션만 이기면 이대로 1년간 동고동락하게 되는 거니까.
번거롭고 시간을 뺏기더라도 다 같이 주의를 줘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알아서 잘할 자신 있다, 그러면 알아서 잘하면 되고요. 하면 안 되는 거랑, 미리 대비해 둬야 하는 것만 우선 설명드릴게요.”
어차피 진짜 문제가 될 만한 이상한 요구는 시큐 선에서 막아 줄 터다.
짧은 한숨과 함께 시작된 브리핑이 끝났을 때는 모두가 기진맥진해진 채였다.
“아, 좀만 쉬었다가 연습실로 가자.”
다들 잠깐만 쉬어야겠다고 퍼지려던 그때, 모두들 당장의 기획과 연출에 집중하느라 까먹고 있었던 것을 하연이 불쑥 지적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 저희… 팀명부터 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팬싸에서 단체 인사하려면.”
“아.”
“맞다.”
단체로 덤 앤 더머라도 된 것처럼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다시 둥글게 모여 앉아야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팀명 아이디어 있는 사람?”
“…!”
“영인이는 마지막에 얘기하자.”
영인이 재빠르게 손을 들었으나 질문을 꺼낸 규민이 침착하게 자제시켰다.
“으음…. 그러면 일단 다들 각자 두 개씩 지어 보고 그 안에서 투표를 해 볼까?”
영인이 다시금 손을 번쩍 들었지만 이번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팀명이 이대로 활동명까지도 이어질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무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참 이것저것 이야기한 끝에 간신히 모두가 만족할 만한 팀명이 정해졌다.
“일단 리스트 업은 했으니까. 이따 제작진분들한테 전달해 보고 최종 결정하자.”
그러나 잠시 후, 인터뷰 촬영을 위해 방문한 스태프의 설명 덕에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데뷔조가 정해지기까지는 팀 레드, 팀 블루라는 팀명을 사용할 예정이라고.
‘그럼 우승한 데뷔조의 데뷔 이후의 활동 팀명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건가요?’
기껏 정해 두었는데 폐기된다고 하면 아깝지 않나. 나는 혹여 너무 자만처럼 보이지 않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작진에게 엔터테인먼트 사업 운영을 위탁받을 기업에서 상의하여 지정될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엥, 난 꼭 간지 나는 걸로 하고 싶었는데. 폴보이즈 같은 거로 정해지면 어떡해?’
영인이 대번 불만을 표했지만 어쨌거나 지금부터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됐으니까 안무 짜는 거나 도와.’
제현호가 안무의 많은 부분을 캐리하고 있었고, 주혜성은 그걸 다른 팀원들도 소화할 수 있도록 다듬는 중이었다.
‘아, 마침 사람 한 명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잘됐다.’
최종적인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8명 모두가 동원되어야 할 테지만.
영인에 이어 하연까지 동원되어 거들다 보니 금세 착착 진행되는 게 눈에 보였다.
‘이거면 됐다.’
마침내 음원과 안무 모두 초안이 나왔을 때는 태복 수련관에 갇힌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순식간에 우려하던 날이 다가왔다.
‘…사인회에서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일주일 만의 외출이었지만 마냥 신나지는 않았다.
우리 모두,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평화로운 오후 9시 30분. 익숙한 동행과 함께 대형 복합 몰 입구 앞에 선 인덕은 기가 막힌 풍경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 지금 뭐 헛것 보는 거 아니져?”
인덕이 눈을 의심하며 묻자 XOXO 역시 평소의 포커페이스를 잃고 약간 흔들리는 눈으로 대답했다.
“네. 저랑 같은 걸 보고 있는 것 같네요.”
그도 그럴 것이, 팬 사인회 일정으로 정해진 오픈 시간은 오전 11시. 지금은 그 전날의 늦은 밤이었다.
이미 당첨자는 발표된 상황인데 이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이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진실은 인덕과 XOXO 또한 알고 있었다.
‘왜긴 왜야. 자리 선점해야 하니까 그렇지.’
지난주 4차 미션의 결과가 발표된 직후, 악몽 같았던 순간에 대해 묘사하려면 인덕은 10년 후에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말할 수 있을 터였다.
 ̄ ̄ ̄ ̄ ̄
[제목] 서인수 기 싸움을 오죽했으면 2위가 자기 발로 나가냐ㅋㅋㅋㅋ
[본문]
10화 방영분 내내 계속 떠넘기기 화법 오지네
거기다 무단 이탈 이슈로 팀 전체 흔들리게 만들고 무대 위에서 친한 척해 봤자 하나도 안 친해 보임무대 위라고 쳐내지도 못하고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면 하차를 하겠냐ㅉㅉ ̄ ̄ ̄ ̄ ̄
이미 한차례 인수의 인성이 다수의 증언으로 증명된 적 있음에도 억까들은 까질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이 붙었다. 방송 컷 하나하나를 훑어가며 조금이라도 논란으로 몰아갈 수 있을 만한 것이 보이면 게시판에 올려 인기 게시글을 만들었다.
[추천 152] [비추천 329]
대체로 비추천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으나 단순 조회 수를 기준으로 산정되는 랭킹에서는 상위를 차지하기 일쑤였다.
[- 나랑 같은 걸 본 게 맞나;;; 무대 위에서 ㅈㄴ 자연스럽게 다들 잘 어울리던데 왜 혼자 화가 나 있어]
[└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거 인수빠들밖에 없을 듯]
[└ 아니 내 댓글 모음이나 보고 와 ㅅㅂ 서인수 팬도 아니고 그냥 클립 보고 온 게 다임]
인수에 대해 조금이라도 온정적인 의견이 나오면 곧바로 기적의 논리가 들이닥쳤다.
[- 억빠들이 맨날 개소리로 영업하니까 까들이 생겨나는 거임]
아니, 됐고. 화면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니까?
인수가 소속된 팀 연성의 준비 활동은 대부분 편집되어 뭐 얼마 볼 수도 없었다.
제작진 측에서 논란에 대한 페널티를 분량을 줄이는 거로 주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얼마 안 되는 비중조차 친인수파로 묶이는 넷보다는 다른 연습생들 중심이었다.
인수는 그 얼마 안 되는 출연분 중 대부분은 공민형에게 의견을 반박당하고 있었다.
‘딱히 트롤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굳이 트롤을 꼽자면 공민형 쪽 아닌가?’
누군가를 욕하고 싶어서 빌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억까가 많아진 만큼 오히려 객관적인 시각으로 인수를 봐주려 하는 사람도 같이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팬이 많아지는 과정에서는 잡음이 날 수밖에 없다.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우리 애가 너무 잘나니까 까빠가 동시에 미치는구나.’
인덕은 그렇게 정신 승리의 회로를 돌리며 이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인수가 4등신처럼 나온 사진을 도배로 올려놓은 게시글을 불쾌감을 주는 표현/이미지로 신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인덕이 채 기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팬 사인회라는 새로운 시련이 다시금 들이닥쳤다.
그놈의 떡볶이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 가족들에게도 한 세트씩 돌리고 친구들과 만날 때도 떡볶이를 먹은 결과.
인덕은 팀 레드의 팬 사인회 초청권을 얻을 수 있었다.
‘왜 하필….’
인덕이 간절히 원하는 건 팀 블루의 초청권이었다. 애초에 인수를 보고 싶어서 응모한 건데 인수 없는 레드 팀을 보러 가서 뭐가 좋은 건데.
심지어 팀 레드가 파이널 미션에서 승리하여 데뷔하면 인수는 자동으로 탈락자가 되는 구조였다.
‘가고 싶겠냐고!’
다행히 인덕은 겨우겨우 팀 레드의 초청권을 원하는 거래자와 만나 교환에 성공했으나, 그 과정도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 ̄ ̄ ̄ ̄
○○떡볶이 겟데뷔 TOP 16 팬싸 교환하실 분 구합니다.
저: 팀 레드
천사님: 팀 블루
제발요 간절해요 최애 보러 가게 해 주세요ㅠㅠㅠㅠㅠ ̄ ̄ ̄ ̄ ̄여차하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바꿀 사람을 구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새로운 알림 메시지가 떴다.
‘헉, 이렇게 빨리?’
[새로운 DM이 도착했습니다.]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확인한 인덕은 곧바로 입꼬리가 지하 세계를 향해 수직 하향했다.
[죄송한데 혹시 12.0에 판매하실 생각 있으실까요ㅜㅜ]
‘하….’
팔겠냐고요. 저도 진짜 이게 우리 애 팬싸 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거든요.
인덕은 이를 갈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시지를 입력하고 전송을 눌렀다.
[12.0이면 단위가 어떻게 되실까요?]
그리고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천 원이여]
“아 씨, 뭐야. 장난하나.”
인덕은 같잖은 장난에 바로 해당 계정을 차단해 버렸다.
12만 원을 줘도 플미 리셀은 내키지 않을 마당에 만 이천 원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라고.
겨우 심신의 안정을 다스리기 위해 애썼으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