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재계약 (2)
내 짧은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래창의 내용이 바뀌었다.
[교환]
[받는 아이템]
- 1년간의 아이돌 활동 기회
(특약 사항)
- 현 세계선 영구 체류권
[보내는 아이템]
- 인생
(특약 사항)
- 화제성 지수 유지 약정
새롭게 추가된 특약 사항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특약 사항…?”
내가 반사적으로 소리 내어 글자를 읽자 K 피디가 설명했다.
[기존 지표에 더하여 화제성 지수를 추가하는 것에 동의하신다는 약정입니다.]
“화제성 지표가 추가되면 뭐가 달라지는 거죠?”
아무리 사북 자리에 몰려 있는 상황이라 해도 아무거나 덥석 잡을 수는 없었다.
내내 인생의 쓴맛만 맛봐야 했던 14년 동안 지독할 만큼 학습해 왔다.
내가 가장 절박하고 위태로울 때 달콤해 보이는 제안은 돌다리가 부서질 때까지 두드려야 한다.
‘대체 뒤통수를 몇 번이나 맞은 건지….’
NO 출신 연습생 서인수의 가치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 나를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달려드는 하이에나들이 한둘이었던가.
나는 그때마다 나름대로 저울질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으니까.’
마른침을 삼킨 채 시스템창을 노려보자 K 피디가 개정된 약관을 띄워 주었다.
[화제성 지표가 낮음 상태로 장기간 유지될 시 KJG미디어 측에서 계약을 일방 종료할 수 있음.]
‘미친 건가.’
거봐라. 이번에도 도저히 욕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제게 너무 불리한 조항 아닌가요?”
어그로랑 대충 비슷한 지표인 거 같긴 한데, 낮음 좀 오래 유지되었다고 일방 계약 종료가 가능하다면 내가 미친 관종 짓을 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닌가.
기가 막혀서 하, 혀를 차자 K 피디가 혀를 굴렸다.
[그 정도의 대가는 감수하셔야 저희 측에서도 영구 체류권을 특약 사항으로 제공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잔여 체류 시간이 1초도 남아 있지 않은 배너를 반짝였다.
[현재 잔여 체류 시간을 초과하여 머무르고 계시므로 되도록 빨리 결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있는 선택지는 두 개라는 거지.
특약을 빼고 1년의 유예 기간만 얻거나, 특약을 넣고 독소 조항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선택지는 없나….’
나도 모르게 까득 이를 갈 뻔하는 바람에 나는 퍼드득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화제성 지수 추가 말고 다른 걸 특약으로 걸 수는 없을까요?”
물론 그거라고 내게 유리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화제성 지수를 유지하느라 미친 관종이 되어 팀 활동에 지장을 주게 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차라리 서브 퀘스트 거부권을 빼앗든가 메인 퀘스트를 두 개 동시에 진행한다든가, 하면 사실상 화제성도 보장되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내 제안을 들은 K 피디가 또 잠시 응답이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짧은 정적 끝에 K 피디가 다른 제안을 해 왔다.
[그러면 메인 미션을 진행하시면서 스페셜 미션을 동시에 진행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K 피디의 제안과 함께 거래창의 내용이 다시금 바뀌었다.
[교환]
[받는 아이템]
- 1년간의 아이돌 활동 기회
(특약 사항)
- 현 세계선 영구 체류권
[보내는 아이템]
- 인생
(특약 사항)
- 스페셜 미션 수행
나는 망설임 없이 물었다.
“생각하고 있는 스페셜 미션이 뭔데요?”
그러자 곧바로 K 피디의 설명이 이어졌다.
[스페셜 미션 ▷ 뻐꾸기를 잡아라]
“…?”
웬 뻐꾸기? 생각도 못 한 키워드에 진짜 푸드득 날아가는 새라도 잡아야 하나 당황한 그때 이어서 자세한 설명이 떴다.
[수행자에게 어떤 행동을 가한 주동자인 ‘뻐꾸기’를 찾아내 진상을 밝히기.]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뻐꾸기’를 찾아내지 못할 시 ‘뻐꾸기’의 행동이 점점 더 심화될 수 있음.]
‘그래도 이게 관종 짓 안 하면 곧바로 계약 종료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여러모로 피곤한 밀당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내 입장에서 나름대로 받아들일 만한 조건이었다.
‘뻐꾸기가 대체 뭔 짓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계약 종료라는 강수까지 둔 보람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나는 이제 더 잴 것 없이 [거래 수락]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저희 KJG미디어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인 미션]
[기간 한정이지만 괜찮아]
[- 1년간 해체/탈퇴/활동 중단 등의 그룹 활동이 불가능한 이슈 없이 활동 계약을 무사히 종료하기]
[스페셜 미션]
[뻐꾸기를 잡아라]
[- 악성 루머/이슈 생성 주동자인 ‘뻐꾸기’의 정체 및 진상을 밝히기]
“아.”
내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것과 동시에 두 마디 내외의 줄글들이 엔딩 크레딧처럼 스쳐 지나갔다.
- 넷 다 징계받은 거 보면 실드 못 쳐 줄 짓 하고 다닌 거 아님?
- 나가서 하고 다녔을 짓 뻔하지ㅋㅋ
- 연습생 넷이서 클럽 간 거라는데 실화?
[4대 엔터 방출 연습생 출신 서바이벌 출연자가 1위를 유지하는 비결]
[현재 출연 중인 프로그램에서도 각종 지저분한 추문으로 논란]
[후배 연습생들을 데리고 유흥업소에 방문! 발각되어 퇴출 위기!]
‘그러니까 이게… 그냥 내가 유명인이라서 붙은 렉카나 어그로가 아니라… 주동자가 따로 있는 일이라고?’
믿기 힘든 얘기였다.
‘하지만 시스템이 내게 이런 거로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비록 K 피디인지 뭔지 하는 양아치들이 사람 뒤통수를 칠지언정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지금껏 그냥 내가 너무 부동의 1위고 화제성이 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 K 피디에게 곧장 물었다.
“주동자가 유 대표나 그 박 대표인가 하는 사람 아니에요?”
하지만 유 대표가 그런 짓까지 할 사람 같진 않았다. 아니, 물론 여러 가지로 심경이 복잡해서 유 대표에 대해 조금도 좋게 생각해 주고 싶지 않지만!
나를 다른 방향으로 방해하면 방해했지 그런 치졸한 수를 쓰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최소한 실력주의와 공정성 면에서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박 대표가 아닐까? 추론해 보았으나 K 피디의 답변은 냉정했다.
[본인 스스로 구체적인 진상을 밝혀내셔야지만 미션을 달성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식으로 대충 찍어 맞히듯 추론하는 건 안 된다는 얘기였다.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는 건데….’
다른 일도 아니고 악플과 루머, 렉카라면 굳이 미션이 아니더라도 진상을 밝혀내야 하는 일이긴 하다.
내가 앞으로 아이돌로서 이 험난한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알겠습니다.”
내가 진상을 빨리 밝혀내지 않을 경우 강도가 세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이 정도면 계약 종료 위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럼 앞으로도 필요하신 일 있으실 경우 언제든 K 피디를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무단이탈 건 때문에 뒤집혔을 때는 묵묵부답이었으면서.
하여간 짜증 나는 놈들.
“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일단 이건 이렇게 일단락됐고.’
이제 계약자 서인수로서의 역할을 얼추 해냈으니 아이돌 서인수로서 활약해야 할 차례였다.
‘그나저나 위탁 운영사는 정해진 건가?’
그룹명은? 또 공모니 뭐니 이상한 짓 해서 온갖 조롱과 성희롱, 밈 같은 거나 만들진 않겠지?
갑자기 불현듯 위기감이 느껴졌다.
‘에이스트리트는 싫은데.’
1회차 인생에서 지독할 만큼 망돌과 조롱의 대명사였기에 찝찝한 것도 있고.
‘멤버가 이규민 빼고 7명이나 달라졌으니 나를 포함해서 이 여덟 명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그룹명이었으면 좋겠는데.’
데뷔 쇼케이스까지 시간이 결코 넉넉하다고 할 수 없었다.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데뷔시키려 하겠지. 시일이 촉박한 만큼 내일부터 바로 합숙 및 연습을 시작할 예정이라 했다.
‘그럼 지금이 마지막으로 여유를 즐길 시간인가.’
이미 시간이 늦다 못해 곧 동이 터 올 시간이었기 때문에 여유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얼른 잠부터 자자.’
데뷔조로서 참가하는 첫 연습에 다크서클이 퀭하게 내려앉은 채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가까스로 의식을 잃은 건 결국 해가 뜨고 난 이후였다.
***
“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최현웅이고요, 이렇게 여러분들과 함께 멋진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눈앞의 중년 남자가 자기 이력을 띄워 놓고 인사를 마친 직후.
눈치가 빠르게 돌아가는 멤버들 머릿속에 모두 같은 생각이 들어앉은 듯했다.
‘X됐다.’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라 진짜 X됐다. 우린 지금 다 같이 침몰하는 배에 탄 수준이었다.
‘이러니까 에이스트리트가 그렇게 망했지.’
멤버도 솔직히 문제가 많았으나 운영 방식에도 큰 난관이 있었을 것이 뻔했다.
[합작 법인 ]
[최현웅 대표]
[이력]
[- P 디자인 스쿨 졸업]
[- 클론아이디어 기획 팀 입사]
[- 블루닷 어워드 실용 디자인상 수상 프로젝트 참여]
[- 현 뉴브랜드필드 대표]
이력의 그 어디에도 음악의 ‘ㅇ’ 자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사람이 대표라고?
‘뉴브랜드필드는 골프장 이름이라고…? 대체 왜 디자인 일하던 사람이 골프장 사장을 하고 있는 거야?’
게다가 이제는 기획사 대표를 하겠다고?
아무리 임시 프로젝트라곤 하나 최소한 멤버들이 소속된 기존 기획사 중 하나가 위탁 경영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두의 예상이 박살이 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예상한 최악의 경우도 KMB가 중간에서 수수료 한 번 더 떼먹으려고 임시 자회사 법인을 세우는 정도였는데.
‘근데 그 사장으로 이렇게 문외한을 앉혀 놓을 거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냐….’
규민도 같은 생각인지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지만 그 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냐.’
저 사람이 천만다행으로 나는 잘 모르니까 너희들끼리 의견 내서 잘해 봐, 응응, 나는 지원만 할게, 하는 사람이면 다행이겠지만.
‘미치겠네….’
저 커다란 두 눈에 가득 들어찬 자의식을 봐라.
자기 분야에서 프로젝트 참여이긴 하지만 유명한 상도 받은 적 있겠다. 본인의 유능함에 도취되어 자랑 한번 해 보라고 판을 깔아 주면 일주일도 떠들어 댈 타입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맞다고 우겨 댈 것이 너무나 선명해 보였다.
‘물론 우리나라 중년 결정권자 대부분이 그 비슷한 양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닌데.
그 헤실헤실 잘 웃고 다니는 영인도 이번에는 등 뒤로 진땀을 흘리는 것 같았다.
“자, 그러면! 내 소개는 이쯤 했으면 됐고 우리 멋진 친구들이 제일 궁금해할 게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데요. 예상하기도 전부터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여러분 그룹명 말이야, 기대되지 않아요? 얼마나 멋진 이름일지.”
분명 한 시간 전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는 놈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