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첫 단추를 잘 끼우려면 (2)
제현호였다.
“어?”
나도 모르게 웬일로? 라는 사족이 붙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너도 연습하게?”
아마 우리 중에 제일 연습이 필요 없을 녀석일 텐데. 의중을 잘 모르겠어서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녀석이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뇨. 조금이라도 손 보태면 좋을 것 같아서요.”
현호가 지원과 은찬을 슥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한 명인 것보다는 둘인 게 낫지 않아요?”
그건 맞긴 하지. 나 혼자 두 명을 가르치려면 아무래도 한 명 봐주는 동안 다른 한 명은 그냥 멀뚱히 서 있어야 할 테니까.
“그래, 그럼 가서 한 명씩 봐주자.”
그럼 되겠네, 하고 정말 문을 나서려던 순간 줄줄이 지원자가 늘어났다.
“아, 그럼 나도.”
“어. 저도 가도 돼요?”
“저도 갈게요.”
차례대로 규민, 영인, 하연이었다. 우르르 나서서 나갈 채비를 하니 나머지들도 가만있을 수는 없겠다 싶었는지 따라붙었다.
“나도 같이 가서 조금만 연습해도 될까…? 방해 안 되게 주의할게.”
마지막으로 혜성까지 따라붙어서 전원이 이동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러면 소수 과외 하는 의미가 없잖아.”
“아, 우리는 보기만 할 거니까.”
“엥? 저희도 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 나도 뛰어야 해? 잠깐만 그럼 나 운동화 다른 거 신고 왔어야 하는데.”
“내 거 빌려줄까?”
“어, 정말요? 사이즈 몇이에요?”
갑자기 소란스러워져서는 이게 뭔가 싶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다들 좀 조용히 있어 봐.”
“합.”
일순 조용해지는 것이 불쑥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뭐냐. 다른 사람 보고는 조용히 하래 놓고 지는 실실 웃고.”
“됐으니까 빨리 움직이기나 해. 이목 쏠린다.”
시간이 늦어서 취객들 말고는 동네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평균 키를 아득히 상회하는 장신 여덟 명(에서 몇은 모자라긴 하지만)이 우르르 다니는데 튀지 않을 리가.
빨리 사옥으로 몸을 숨기는 편이 나았다.
잠시 후, 사옥 연습실에서 진행한 2:2 과외는 생각 이상으로 효율적이었다.
나머지들은 현호와 내가 코치하는 것을 지켜보며 각자 연습.
지원과 은찬은 1:1로 마크해서 동작 연결부터 디테일까지 익히기.
지원보다 은찬이 좀 더 더디긴 했지만 둘 다 두 시간쯤 굴리니 안무는 다 외우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제 남은 건 내일 연습하면서 디테일 살리는 거랑, 어디서 끊을지, 어디서 연결할지 계속 의식하는 거니까 영상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 봐요.”
우리가 처음 손을 잡았을 때처럼, 이걸 왜 못 해요? 이 정도도 못 하면 아이돌을 어떻게 해요? 할까 봐 걱정했던 것과 달리 현호는 제법 좋은 선생님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이 달라진 만큼 나도 많이 변했나.’
흐른 시간은 반년도 되지 않는데, 미션 때 썼던 가사처럼 돌아보면 왜 이렇게 까마득한지 모르겠다.
새삼 생각해 보면, 분명 겟데뷔 출연을 위해 수련관에 처음 모였을 때만 해도 ‘이 중 그나마 쓸 만한 놈이 누군가.’ 내가 평가하겠다는 듯 제법 오만한 시선으로 다른 연습생들을 내려다봤던 나였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내 발목을 잡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던 데뷔조가 ‘이 녀석들이었으면 좋겠다.’로 바뀐 순간부터 이미 겟데뷔 출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이렇게 변한 만큼 제현호도 비슷한 변화를 느끼고 있는 걸까.
괜히 센티해진 생각을 쫓아 버리기 위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정리 한 번 하고 갈 거니까 먼저 들어가서 씻어들. 여덟 명 우르르 가서 복작거리면 서로 불편하니까.”
나머지 놈들을 등 떠밀듯 숙소로 보내고 제현호화 단둘이 남으니 더는 어색하지 않은 정적이 흘렀다.
나는 웃음기를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너 좀 달라진 것 같다?”
그러자 현호가 쑥스러운 듯 표정을 구기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 보여요?”
“응.”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뭐 이런 X라이가 다 있냐 싶었는데. 아이돌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얼굴을 알려서 사람을 찾는 것만이 목적인 연습생이라니.
그렇다고 마냥 남들이 하는 걸 두고 보기만 했냐고 하면….
‘실력 안 되는 연습생이 자기보다 순위가 높은 꼴은 또 답답해서 못 보고 대체 뭐 하는 놈인가 싶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오기인지 아니면 자존심인지 누구보다 열심히 따라오는 것이 특이해도 보통 특이한 놈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굳이 녀석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는 좋은 말만 들려주었다.
“너 처음엔 다른 연습생들 다 싫어했잖아. 지금은 잘 지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현호가 아, 짧게 감탄사를 내뱉더니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다 싫어하진 않았어요.”
“그럼 누구누구는 괜찮았는데?”
그러자 현호가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놀렸다.
“어쨌든 나는 싫어했잖아.”
“그건 그럴 만한 상황이었잖아요. 자꾸 짜증 나는데 사람 쳐다보고 얼쩡거리고….”
“아무튼 싫어하긴 했다는 거네? 지금은 아니고?”
그 앙칼진 야생 너구리 같았던 놈이 부끄러워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그 얘기 좀 안 하면 안 돼요?”
더 놀렸다가는 또 1차 미션 때처럼 각 잡고 나를 노려볼 것만 같아서 적당히 하고 그만두었다.
“알았어. 어쨌든 그룹 활동에 의욕적인 거 같아서 내 마음은 좋다.”
파이널 무대에 선 녀석은 누가 봐도 무대를 너무너무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러면 이제 원래 목적은 뒷전이 된 걸까.
제현호 본인에게는 무엇이 이로울지 몰라도 팀 전체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의욕적으로 나와 주면 좋을 텐데.’
아이돌 안 하기에는 역시 너무 아까운 재능이라니까.
웃으며 고개를 돌린 순간 현호가 뜻밖의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전부 형 덕분이에요.”
“어?”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를 의심하며 녀석 쪽을 돌아보자 현호가 여전히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 이런 거 잘 못 해서, 말재주가 없어서 계속 얘길 못 했는데, 시설 담당자분 말고 절 챙겨 주는 사람이 있고, 시설 말고 제가 돌아갈 곳이 있는 게 저한테는 되게 이상하게 느껴져서… 표현을 못 한… 거지, 싫진 않았어요.”
뭐야 말 잘 못 한다면서 잘만 하네. 나는 나름 귀여운 짓을 하는 우리 두 번째 막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곱슬기가 꽤 있는 지원과 달리 현호는 가볍게 날리는 생머리 정도라서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아, 그만해요.”
선 넘었다 이거지? 곧바로 꽂히는 날 선 목소리에 나는 재빨리 손을 뗐다.
“그래. 시간 늦었다. 얼른 들어가자.”
얌전히 항복 표시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몇 시간 잘 수 있더라….’
오늘 잡힌 스케줄이 오전에 안무 연습하고 온라인 쇼캐스트랑 유튜브 예능 게스트였나.
유튜브 예능은 지금 한창 주가가 상한가를 찍고 있는 남자 솔로 가수가 호스트인 술방이었다.
호스트가 직접 타 준 술을 마시면서 간단한 게임도 하고 벌칙으로 벌칙주도 마시는 토크쇼였다.
‘세트장 들어가기 전에 미리 숙취 해소제 먹고 들어가야지.’
다년간의 알코올 중독자 경력을 통해 나는 어떻게 하면 숙취 없이 많은 양의 알코올을 흡입할 수 있는지 체득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어….’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나까지 그걸 인정하고 나면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되는 것 같아서.
한때 술로 모든 걸 도피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어쨌든 노래로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곧 주량을 줄이긴 했지만.
아무튼 술 관련이라면 자신 있다. 그래서 내가 나가겠다고 콕 집어 신청했던 스케줄이었다.
‘뭐냐? 너 주량 자신 있어?’
규민이 의외라는 듯 물었을 때 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유리병으로 마셨을 때 취한 적은 없긴 한데.’
대충 헛소리 안 하는 마지노선까지의 주량을 계산하면 네다섯 병 정도인가.
처음엔 한 병만 들어가도 어질어질했는데 마시다 보니 내성이 생겨서 주량이 점점 늘어나 버렸다.
내 목적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취하는 건데 갈수록 주량이 같이 늘어서 더더욱 많은 양을 마셔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뭔데 그렇게 많이 마셔 본 거야.’
있어. 목 상할까 봐 담배는 못 피우겠고, 방구석에 조용히 틀어박혀서 합법적으로 스스로를 망치는 방법은 술밖에 없는데 뭐.
아무튼 주량으로도 나보다 잘 마시는 멤버는 없어서 그대로 나로 낙점되었다.
‘이러고 나가서 한 병 마시고 취해 버리면 큰일인데.’
지금의 나는 주량이 확 늘어나기 전이니까. 뒤늦게 위기감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는….
“안녕하세요, 인수 씨! 반가워요, 태이진이에요. 이렇게 와 주셔서 너무 반갑네요.”
물러서기에 너무 늦어 버린 후였다.
“안녕하세요. 서인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깍듯한 인사와 함께 카메라 앞에 앉았다.
유튜브 예능이긴 하지만 확실히 광고도 많이 붙고 조회 수도 잘 나오는 채널이라 주변을 에워싼 스태프들이 상당히 많았다.
“저희가 방송 준비 차원에서 섭외할 때 게스트분 주량을 확인하고 있거든요. 근데! 저 진짜 인수 씨 주량 듣고 너무 의외라서 깜짝 놀랐잖아요.”
그 정도인가. 술 잘 마시는 연예인들 더 많지 않나…? 까지 생각한 나는 그제야 내가 뭘 고려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지금의 내 나이는 스물하나.
스물여덟도 아니고 스물하나는 음주를 할 수 있었던 세월이 만으로 2년도 채 되지 않는 나이였던 것이다.
‘심지어 아직 데뷔도 안 한 입장이잖아.’
데뷔도 못 한 놈이 뭘 그렇게 많이 마셔 볼 일이 있었냐 싶겠군.
나는 부랴부랴 쑥스러운 표정으로 해명했다.
“아, 그게 항상 그런 건 아니고요! 집안 어른들 있는 자리에서 한번 계속 권하셔서 제가 거절을 못 하고 마셨던 게 최대 그 정도였다~ 이거라서요. 아, 이거 오해 생기면 안 되는데.”
애써 상황을 수습하려 하자 호스트가 상황을 코믹하게 만들기 위해 농담을 했다.
“아, 그러니까 진짜 그 정도 마시고 안 취하는 건 맞다?”
“제대로 검증이 안 된 주량이에요! 저를 믿으시면 안 돼요!”
“그 정도로 여길 나오고 싶으셨어요? 저희 진짜 섭외 안 될 줄 알고 요청드렸던 건데.”
“네?”
“지금 케이 팝에서 제일 핫한 주역이잖아요. 막 하루에 방송 촬영 스케줄만 3개씩 뛰고 그런다는 얘기도 있던데.”
우당탕탕 정신없이 멘트가 휘몰아치는 사이 잔이 끊임없이 채워졌다.
결국 촬영이 시작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정신이 어질어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