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하나하나씩 (1)
쉽게 물어볼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다.
“혹시 간병인 비용 때문에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그게 핵심을 찌른 듯 수화기 너머에서 딸꾹질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 그, 그런 것도 있고… 걱정도 돼서….
마지막으로 확인한 바로는 허리 통증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시는 거지 생명이 위독하신 상황은 아니었다.
당장 임종을 앞두신 상태도 아니니 비전문가인 지원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실수를 연발하는 것보다 전문가가 도와주시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서라면 손자가 옆에서 돌봐 드리는 게 좋겠지만.’
이제 더는 평범한 고등학생도 아니고 활동하면서 출석 일수도 채워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지.’
나는 짧게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비용은 내가 회사랑 해결해 볼 테니까 너는 내일부터 다시 숙소로 들어와. 졸업 생각 있으면 출석 일수도 채워야 하는데 네가 거기 2주나 있으면 안 되지.”
그러자 지원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 어떻게…? 나, 아직 학생이라서 대출도 안 나오는데….
대출은 안 나올지 몰라도 앞으로 받을 돈은 있잖냐. 나는 우선 지원을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두 달 동안 아주 데굴데굴 구른 거 생각하면 나중엔 너한테 큰돈도 아니야. 내가 혹시 해결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볼게. 금방 다시 전화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 …!? 앗, 형, 잠깐만…!
지원이 허둥거리며 거절하기 전에 거절할 여지를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제 진짜 내가 해결해야 한다.’
사실 나도 그동안 모아 둔 돈이 없는 건 아닌데 2주 치 간병비를 턱턱 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지금 생각해 낸 방법이 깔끔하게 먹히지 않았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꺼내는 것으로 하고.
나는 잠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다음 코드비 대표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음이 울린 끝에 대표가 언제나와 같이 억양이 독특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어어, 인수 씨~ 무슨 일이에요?
다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나긋나긋한 톤이었다.
“아, 네. 대표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가볍게 안부로 포문을 열고 어제 누구랑 필드를 나갔네, 어느 대기업 사장이랑 약속을 잡았네 하는 허풍 섞인 자기 자랑은 적당히 호응해 준 후 패스하고.
- 그래서 인수 씨, 무슨 일로 전화한 거예요?
대표가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보다 들떴을 즈음 본론을 꺼냈다.
“지원이요, 다음 분기부터 정산 나오죠? 구체적인 금액은 좀 나중에 나오더라도요.”
우리 계약은 기본적으로 분기별 정산이었다. 당장은 선투자금이 없는 나도 정산까지는 꽤 요원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뜬금없이 다른 멤버의 정산 얘기를 꺼내는 것이 다소 의아한지 대표가 예나 아니오가 아닌 다른 대답을 했다.
- 응? 그걸 인수 씨가 갑자기 왜?
“저… 다른 게 아니라요. 지원이 할아버님이 지금 입원해 계신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죠? 관련된 사정으로 지원이가 2주 정도 활동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 응?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안 되지, 그건.
아무리 기획사 운영은 초보인 사장이라지만 다행히도 그 정도의 상식은 있었다.
‘스케줄을 생각하면 2주 빠지기는커녕 없는 2주도 만들어서 넣고 싶어 하는 회사니 뭐….’
“네. 지원이 없이 활동을 강행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런데 아무래도… 지원이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참을 수 없다는 듯 대표가 나를 재촉했다.
- 이유가 뭡니까.
“지원이가 학생이고 하다 보니 할아버님이 갑자기 입원하셔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간병비 때문에….”
- 아… 그런 문제로군요. 지원 군이 나이도 어린데 고생이 너무 많네.
“그죠, 사실 지원이가 워낙 음색도 좋고 매력적인 친구라 탄력만 붙으면 훨씬 더 돋보일 수 있는 친구인데 계속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게 아쉽더라고요.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100인데, 외부적 요인이나 컨디션 때문에 30밖에 못 보여 주는 게 너무 아깝잖아요.”
평소 중복해서 지적해 왔던 체력 문제를 슬쩍 경제적 고민 탓으로 돌리자 대표가 뭔가 결심한 듯 굳센 목소리로 답했다.
- 어유, 지금 활동에 집중해야 할 어린 친구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으면 안 되지! 기다려 봐요. 내가 윤 실장이랑 얘기 좀 하고 다시 전화할게요.
그렇게 대표와의 통화가 끝났다.
‘어떻게든 본인 선에서 해결을 해 줄 모양인데.’
그리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놀랍게도 대표 본인이 간병비를 부담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네?”
내가 듣고도 믿기지 않아서 되묻자 대표가 호쾌하게 웃었다.
당연하게도 맨입으로는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
지원해 주는 대신 우리 활동 후반기에 발표할 멤버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에 관련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다.
할아버님이 쓰러져서 내가 스케줄에 급하게 대타로 들어간 것과 대표가 직접 할아버님의 병문안을 가는 것까지.
이런 것까지 그래야만 하나 입 안이 썼지만 지원은 그마저도 감사히 받아들였다.
‘괜히 정산 가불이니 해서 나중에 형평성 논란 같은 거 붙는 것보다는 낫긴 한데….’
원하던 방식이 아니었던지라 마음이 썩 개운하지 못했다.
다시 전화해 본 지원은 그마저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는지 지나칠 정도로 고마워했다.
-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막막했는데, 정말 형 덕분이야….
“아냐, 내가 뭐 한 것도 없는데.”
- 한 게 없긴. 나는 회사에 부탁해 볼 생각도 못 했는걸. 할아버지도 형한테 꼭 감사 인사 전해 달라고 하셨어….
곧이어 운 좋게 바로 내일부터 근무가 가능한 간병인을 구한 덕에 지원은 내일부로 복귀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머릿속으로 빨리 쳐내야 하는 일부터 쭉 정리했다. 우선 현찬부터 연락해 보고, 임희록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수소문도 해 보면 좋을 테고.
‘공민형은 어떻게 된 거지?’
그 이후로 소식이 뚝 끊겨서 그것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럼 우선.
‘현찬부터 얘기를 해 봐야지.’
지금쯤 그날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불안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테니.
나는 다짜고짜 전화하는 대신 메신저로 먼저 운을 띄웠다.
[나]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서인수입니다. 오전 11:30
그러자 순식간에 읽음 확인 표시가 나타났다.
‘뭐야, 진짜 계속 신경 쓰고 있었나?’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대답도 없이 읽씹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답신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불쑥 영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 뭔데?”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영인을 올려다보자 영인이 힘차게 외쳤다.
“점심 안 먹어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긴 했네. 오늘 당번이 이 녀석이던가.
“지금 나갈게.”
다들 주섬주섬 식탁 앞에 앉아 있는데 혼자 나중에 먹기도 그래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테이블 위에 우유와 시리얼, 주스 따위가 올라왔다.
‘나도 나지만 이놈도 참 이놈이다.’
규민이 한국인의 얼이 이런 건 식사로 쳐주지 않는다고 항의했으나 영인이 영어로 대답하는 바람에 다들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너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었어?”
규민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묻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데?”
“뭐래. 한국에 왔으면 사람이 쌀밥에 반찬을 먹어야지.”
투덜거리면서도 영인이 내준 외국산 시리얼을 그릇 가득 붓는 게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네가 제일 많이 먹는다, 네가.”
“어차피 먹을 거면 든든하게 먹어야지.”
이런저런 쓸데없는 얘기는 하는 와중에도 현찬으로부터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연락처 주고받은 게 나만 있는 건 아니었지? 마침 지원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과 한자리에 모인 김에 말을 꺼냈다.
“참, 현찬 선배님이랑 혹시 연락해 본 사람 있어?”
없을 거 같긴 한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묻자 다들 아는 게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때 나까지 끼어들기 좀 그래서 나는 연락처 안 받았어.”
혜성을 비롯해서 아예 연락처 교환을 안 한 멤버들도 있고, 연락처가 있는 멤버들도 굳이 연락할 생각은 안 했다기에 이대로 수확이 없나 했는데.
“아, 근데, 다 끝났으니까 하는 얘기인데….”
배도 채웠겠다 슬슬 식곤증이 밀려오던 모두의 귀가 솔깃해지는 오프닝이었다.
멤버 전원의 시선이 운을 뗀 규민에게로 향했다.
“현찬 선배님 이번이 마지막 활동이라는 얘기가 있더라.”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들 머리 위로 물음표를 하나씩 띄웠다.
“엥? 왜요? 이번에 콘서트 잘됐잖아요.”
“뭐,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슬슬….”
“슬슬 뭐?”
아직 은퇴하기에는 어린 나이 아닌가. 내년에 다른 멤버들 제대하면 단체 활동 한두 번쯤은 더 할 수 있는 연차일 텐데.
나 역시도 의아함을 감추지 않은 채 규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규민이 좀 난감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늘어트렸다.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닌데, 거의 공공연하잖아. 여자 친구 있는 거.”
“엥?”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랬어?”
“아, 그럼 우리 소속사에만 돌았나? 잘은 모르는데 엄청 유명한 재벌가 딸이라던데. 그래서 스캔들 절대 나면 안 된다고. 여자 친구분 집이 엄청 엄격해서 연예인 애인이랍시고 기사 오르내리고 그러면 헤어지게 할 거라나 뭐 그런 얘기 있었어.”
최소한 나는 들어 본 적 없는 얘기였다.
“처음 듣는데?”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혜성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나도 듣긴 했던 것 같아. 만나고 있는 분 있다고. 근데 그게 누군지는 잘 몰라서….”
나도 나름대로 여기저기 인맥이 넓은 편인데 왜 몰랐지? 꽤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자 규민이 별로 도움 안 되는 위로를 건넸다.
“너한테 그런 스캔들 가십 같은 거 함부로 말했다간 혼날 것 같아서 말 안 해 준 거 아냐?”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연습 중에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면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한마디 했을 테니까.
“아무튼, 감사하긴 한데 그 여자 친구분 관련해서 소문이 좀 무성하다 보니 뒷말이 깔끔하신 분은 아니긴 해.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설마 그럼 얼핏 말했던 그 ‘노친네’가 이쪽이랑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협박을 받고 있다거나….’
의구심이 든 그때 메신저 알림이 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산뜻하게 도착한 메시지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먹은 그릇을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블랙온 현찬 선배님] 안녕하세요, 후배님^^ 오후 12:47
[블랙온 현찬 선배님] 그날 잘 들어갔어요? 오후 12:47
왠지 떠보는 듯한 메시지에 내 쪽도 비슷한 태도로 회신했다.
[나] 네, 덕분에 잘 먹고 안전하게 숙소로 귀가했습니다. 오후 12:48
[나] (이모티콘) 오후 12:48
일부러 열 좀 받아 보라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얼굴의 거북이 이모티콘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규민이 선물해 줬을 때 쓰겠냐고 뭐라고 했었는데 이럴 때 쓸 일이 있네.’
그러자 또 한참 동안 회신이 오지 않았다.
‘이러다 흐지부지 연락 끊기는 게 목적인가.’
이럴 땐 눈치 없는 척하는 게 정답이었다.
나는 거북이가 해맑게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더 보냈다.
[나] (이모티콘) 오후 1:03
그러자 이번에도 곧바로 읽음 확인이 떴다.
‘이건 100% 그날 뭐 했는지 기억하는 거다.’
강한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