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하나하나씩 (3)
‘야!’
나는 차마 현찬이 보고 있는 앞에서 큰소리는 못 내고 속으로 삼켰다.
“뭐가 필요해서 이러는 건데. 돈?”
아니, 이래서야 우리가 정말 협박범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 재빨리 테이블 아래에서 규민의 발을 밟자 규민이 내 무릎 위를 이가 악 다물릴 만큼 세게 꼬집었다.
‘미친놈 아냐, 이거.’
그러려고 나온 게 아니라고 끼어들려던 찰나 규민이 먼저 유유자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거 말고요. 3일간 고루고루 괴롭히셨잖아요. 일부러 큐 사인 바꾼 것도, 무대에서 실수인 척 당황하게 한 것도, 바닥 표시 갑자기 상의도 없이 덮어서 실수 유도했던 것도, 다 직접 준비하신 일이라면서요? 무대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선배님이 왜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데요.”
나는 그제야 규민이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뒤집어 놓은 것을 흘깃 발견했다.
‘이놈도 진짜 보통 인물이 아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았으나 연습생 생활을 오래 하면서 순진할 여유 따위는 없어졌는지 가끔 이렇게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철저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서 나보고는 안 믿는 것 같으니 어쩌니 하는 말을….’
아무튼 지금은 아군이니 실이 될 건 없었다.
“어쨌든 잘 넘어갔잖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제 와서 탓하는 이유가 뭔데?”
현찬이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처럼 창백한 낯빛으로 되물었다.
“이제 와서가 아니죠. 지금이니까 여쭤보는 거죠.”
‘우리’ 일이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현찬에게 실수를 유도하도록 사주한 사람이 나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내가 해결하는 것이 맞았다. 나는 규민이 더 주동자가 되지 않도록 가로막았다.
“아시겠지만 저희가 단기간에 유명해진 만큼 저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작은 실수도 남들보다 수배는 큰 흠이 되는 상황에 저희가 대처를 잘했다고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최소한 이유라도 알고 싶어요.”
현찬은 말이 없었고 규민이 뭐라 덧붙이려 한 순간 나는 다시금 규민의 발을 꽉 밟았다.
“저희 모두 초등학생, 중학생 때부터 선배님 무대 보면서 아이돌을 꿈꿔 왔던 친구들이에요.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미션으로 저희를 꿈꾸게 했던 곡들 무대로 올릴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정말 너무 감사한 기회였는데, 이렇게 콘서트에도 불러 주시고 저희 막내는 너무 기뻐서 울기까지 했어요.”
사실 이건 살짝 어폐가 있었다. 지원이 운 건 전설의 대선배님과 함께 무대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동작이 너무 힘들어서였다.
그마저도 정말 엉엉 운 건 아니고 혼자 자기 자신의 느린 진도에 화가 나서 몰래 훌쩍인 정도였지만.
‘그래도 어쨌든 울긴 했으니까.’
속으로 자연스럽게 합리화하며 현찬을 바라보자 현찬이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저흰 선배님께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무대를 얼마나 사랑하는 분이신지 저희가 쭉 지켜봐 왔는데, 고작 후배에 대한 시기나 질투 같은 거로 그러실 분은 아니라고 믿으니까요.”
규민이 강에는 강으로 나가는 유사 협박범이라면 나는 반대로 온건파로 나갈 생각이었다.
원래 팀 내에서 뭔가 의논하고 타일러야 하는 상황이 있으면 내가 강경파고 규민이 온건파였는데.
‘이런 데서는 또 세게 나간단 말이지.’
의외다 싶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덕분에 강경책과 회유책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썩 나쁘지 않았다.
“…….”
열심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현찬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뭐 어쩌겠다는 거지.’
결국 규민이 참지 못하고 먼저 현찬의 아킬레스건으로 추정되는 사정을 건드렸다.
“스캔들 때문에 약점이라도 잡히신 거예요?”
이미 규민의 소속사 쪽 연습생들에게는 공공연한 사실로 퍼져 있는 내용을 언급하자 현찬이 반사적으로 손등을 흠칫 떨었다.
‘맞나?’
진짜 그것 때문에 협박당하고 있던 거라고? 놀랄 틈도 없이 가게 안쪽으로 이어진 창고에서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앗.”
우리가 동시에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긴 순간 현찬이 다급히 일어나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그러나 이미 문 안에서 걸어 나온 것을 우리 모두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버린 후였다.
‘이건….’
나와 규민의 머릿속에 동시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공개되면 진짜 큰일이긴 하다.’
현찬 못지않게 우리도 놀라 심장이 떨어질 광경이었다.
***
잠시 후, 긴 접견(?)을 마치고 무사히 카페를 빠져나온 나와 규민은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아….”
이게 뭔 상황이냐. 안에서 정신없이 하소연을 듣고 났더니 기운이 쭉 빠졌다.
“재벌 집 고명딸이랑 사귀고 있어서 스캔들 나면 집안 전체가 뒤집힐 위기보다 더한 상황일 줄은 몰랐는데.”
규민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자 나는 곧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여기 대놓고 홍보는 안 해도 연예인이 차린 카페라고 알려지긴 해서 주위에 팬들 있을 수도 있어.”
물론 현찬의 연차가 연차인지라 예전이었으면 이 앞에 진을 치고 있었을 팬들도 자신의 현생이 우선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이긴 하지만.
남들 다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입방정을 떨어서 좋을 건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규민이 한 시간이 넘는 녹음 파일을 저장하며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어떻게 해. 그냥 넘어가야지. 어쨌든 아무 일도 없었던 건 맞으니까.”
오기 전까지만 해도 ‘와, 이거 대박이네. 제대로 해명 못 하기만 해 봐라. 가만 안 둘 거다.’ 등등 벼르던 규민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은 어떻게든 잘 넘어갔다고 쳐도, 앞으로도 이런 일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그렇다고 우리가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이번 같은 상황을 무사히 넘길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잘 대응하는 것뿐이었다.
“애들한테는 뭐라고 말하게?”
“음….”
나는 잠시 미간을 짚고 생각을 하다가 호출한 택시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말했다.
“적당히 섞어서 얘기해야지. 정신 바짝 차리고 긴장할 수 있게.”
“글쎄다….”
“그럼 다른 방법은 있고?”
규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얌전히 규민과 뒷좌석에 탄 채로 기사님께 짧은 묵례로 인사했다.
이유를 알고 나면 조금은 방향이 잡힐 줄 알았는데, 막상 알아내고 나니 더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
조금 전, 카페 안에서 느닷없이 안쪽으로 이어지는 직원용 휴게실 문을 열고 나온 건 이제 열 살쯤 되었을까 싶은 여자아이였다.
‘와! 대박! 엔카운터다!’
최대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차림으로 나오려고 전혀 관리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순간 영업이 끝난 카페에 어째서 어린아이가 있지? 현찬의 친척인가? 정도로만 생각했으나, 현찬이 온갖 호들갑을 떨며 반응해 준 덕에 어렵지 않게 더한 경우의 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엇.’
나보다도 먼저 어떤 가능성에 대해 알아본 규민이 무심코 꺼낸 질문에 현찬의 표정이 아주 가관으로 일그러졌다.
‘혹시 따님이세요?’
그렇게 생각하니 확실히 닮은 얼굴이었다. 현찬의 반응만 아니었어도 얼마든지 친척이라고 우길 수 있었겠지만.
‘…왜, 이걸로도 협박하게?’
그리고 규민의 예상은 정답이었다.현찬이 ‘노친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곧바로 규민이 멍청한 얼굴로 결혼하셨어요? 언제요? 하고 묻는 바람에 분위기가 배로 험악해졌다.
아이가 보이는 나이 그대로 열 살쯤이라고 치면 블랙온이 한창 전성기로 활동하고 있을 시절에 태어났을 터였다.
‘확실히 어떻게든 숨겨야 할 만하네….’
이제 와서는 은퇴할 시기가 다 된 마당에 뻔뻔하게 나가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만.
그렇게 되면 지난 10년간 팬들과의 활동이 기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년도 아니고 10년. 은퇴하고 나서 밝혀지더라도 충격적일 텐데 한창 1군으로 활동했던 톱스타가 사실 기혼이었고, 아이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확실히 연예면에 기사 몇 줄 실리는 정도로 끝날 리 없었다.
‘사실은 재벌 여친이 있다더라 하는 찌라시를 스스로 퍼트릴 만큼 지키고 싶은 가족이 약점으로 잡혀 있다면… 보통은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되는 건가.’
생각해 보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굳이 차이를 꼽자면 유 대표는 이미 일찍이 은퇴를 하고 가수가 아닌 경영인으로서 영업 중인 사람이고, 내가 열 살짜리가 아니라 성인이 된 나이라는 것 정도였다.
만약 유 대표가 비슷한 협박을 받게 된다면, 그는 나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까?
문득 떠오른 질문에 나는 쓰게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 번 물 먹이려 했으면 됐지, 두 번 세 번은 나도 그냥 두고 못 봐.’
뒤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게 뭐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었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쪽은 방해나 안 하면 다행이지.’
다행히 그쪽에서는 소식이 잠잠한 것 같다만 원한 관계로 엮여 있는 골든링 대표가 나를 노리고 있을 확률이 아주 역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나저나 그 노친네가 박 대표가 아닐 줄은 몰랐는데.’
기껏 남의 비밀만 털고 얻은 소득은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현찬이 문제의 노친네, 그러니까 현 소속사의 대표에게 전달받은 이야기는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의도치 않게 겟데뷔 촬영 때 블랙온 커버 미션이 너무 히트를 쳐 버리는 바람에 얼결에 우리가 블랙온의 케이 팝 정신을 이어받았네 어쩌네 하는 얘기들이 많은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여기에 다른 이권들이 또 잔뜩 얽혀 있었다.
‘하여간 일이 뭐 그렇게 복잡해서는….’
처음 커버 미션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받았을 때만 해도 제작진은 이렇게 아예 미션이 통째로 블랙온 커버로 나갈 거라고 설명을 안 했다고 했다.
많고 많은 커버곡 중 일부이겠거니 생각하고 커버 판권 판매에 합의했는데.
미션이 통으로 블랙온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거기에 소속 연습생은 한 명도 없는 그룹이 졸지에 후배 그룹처럼 인식이 되어 버렸으니 그쪽에서 화가 단단히 날 만도 했다.
방영분을 본 후 소속사 차원에서 항의했으나 이미 전파를 타 버린 것을 다시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다.
이에 진짜 블랙온의 후배 그룹을 기획하고 있던 소속사 사장이 비용은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저놈들 망신은 한번 줘야겠다, 하고 밀어붙인 계획이었다는 설명이었다.
긴 설명을 듣고 나오자마자 나는 규민과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너 저걸 믿냐?’
‘아니.’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어쨌든 현찬에게는 절대 외부에는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이 있었고, 그걸 빌미로 협박당해서 한 짓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괜히 기분만 심란해진 채로 숙소로 돌아왔다.
규민과 숙소 현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그때, 숙소 안에서 우당탕탕 정신없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애들끼리 몰래 야식이라도 시켜 먹었나?’
그다지 큰 걱정은 품지 않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