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분명 휴가일 텐데 (3)
본인이 싫다는 걸 뭐 어떻게 강매를 하냐. 이대로 첫 미션 실패를 맞이하는 것인가 눈앞이 캄캄해진 그때,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게 통할까?’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멀뚱히 실패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차피 뭐 대단한 시도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뭐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흠흠, 민망한 척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고 말했다.
“아니, 나도… 휴가니까 평소에 못 먹는 거 먹어 보고 싶었지.”
그러고는 머쓱한 얼굴로 내 머리를 스스로 헝클어트렸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 동정하고 그래서 그랬던 건 아냐. 멤버들 다 있을 때 수시로 군것질하는 모습 보여 주고 싶지도 않고, 실제로 평소엔 그다지 관심 없었던 것도 맞는데….”
그러고는 여기서부터가 본심이라는 듯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팬분들이 맨날 이거 먹어 봐라, 저거 먹어 봐라 추천해 주시니까 궁금하긴 하더라고. 기껏 시간 내서 사진에 후기에 추천해 주셨는데 계속 무시하는 것도 죄송하고 해서.”
그러자 현호가 그제야 내가 왜 그랬는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애들도 자리 비웠겠다 타이밍도 괜찮은데, 나만 먹는 것도 좀 그렇잖아. 우리 둘 다 알아서 식사 때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 후 말없이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곧이어 현호가 자신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건 제가 생각을 못 했어요.”
이때다.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서 나는 슬쩍 음흉한 속내를 드러냈다.
“내가 이런 거 누구한테 얘기하겠어. 지원이는 너무 어리지, 규민이나 영인이는 평소에도 너무 많이 먹어서 여기서 더 먹자고 하면 정말 고삐 풀릴 것 같고, 하연이나 혜성 형은 평소에도 부담이 좀 많아 보여서 말 꺼내기가 그렇더라고.”
은찬은 자연스럽게 거론하지도 않았다. 남 눈치를 썩 잘 보는 편이 아닌 현호도 은찬이 그런 고민을 털어놓기에 적합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네가 아무래도, 다른 녀석들보다는 협조도 잘해 주고 편하니까….”
그렇게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쐐기를 박자 현호가 결심한 듯 한결 결연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저랑 먹으러 가요.”
‘됐다.’
뭔가 순진한 애(?)를 속인 것 같아서 죄책감이 없지 않았지만 사실 뭐 그렇게까지 거짓말은 아니니까.
내가 먹는 데 그다지 욕심이 없는 편인 건 맞았다. 이건 어렸을 때부터 대체로 부족함 없이 누리고 자란 덕이 컸다.
‘감사해요, 부모님….’
어렸을 때부터 굳이 식탐이 안 생길 만한 환경이었다고 해야 하나….
체질적으로 살이 금방 붙는 타입도 아니라서 며칠 많이 먹었다고 체중을 걱정하고 전전긍긍해 본 적도 없었다.
소속사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식사는 딱 성장에 필요한 만큼만. 억지로 더 먹거나 허겁지겁 먹어 본 적이 애초에 없어서 먹는 데 한이 맺혀 본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었다.
‘연습생 합숙 생활 때 다른 녀석들이 체중이나 식단 때문에 스트레스받았던 거 생각하면 꽤 양반이었지.’
다른 녀석들처럼 늦게까지 연습 끝나고 잠들기 직전에 몰래 야식을 시켜서 잔뜩 배를 채워 봐야 자려고 누웠을 때 속이 더부룩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요약하자면 그냥 원래 소식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게, 속 편하게 먹는 체질이라 지금껏 별생각 없었다는 것뿐이지만.
어쨌든 미각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가끔은 맛있는 걸 먹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겸사겸사 나도 평소에 안 먹던 걸 먹어 보는 거라면 다른 애들 없을 때 몰래 먹는 게 낫긴 하니까.’
아무튼 100%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내친김에 현호를 끌고 나갔다.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왜 자꾸 뭘 먹으라고 하나 의아해했던 지난번과 달리 끌고 가는 곳마다 선뜻 같이 테이블에 앉아 주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 저녁때가 되면 근처 대학가나 주변 도시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 빤히 보여, 그 전에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행동을 서둘렀다.
“이따 집에 들어가서 먹을 거 사 가자.”
마지막으로 택시를 타고 20분쯤 이동해야 하는 지역의 빵집까지 들러 집에 들어오고 나니 이제 배달로도 시켜 먹을 수 있는 집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리스트가 달성되어 있었다.
‘아직 휴가 며칠 더 남았으니까 나머지는 배달로 먹으면 되겠다.’
휴, 가슴을 쓸어내리자마자 잠깐 머릿속에서 내려놓고 있었던 또 다른 온고잉 사건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내일인가.’
비안의 소속사 사무실에 찾아가기로 한 일정이었다.
‘약속 잡자마자 주문한 선물도 잘 도착했으니까….’
나머지는 내가 내일 가서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비안이 내게 어느 정도의 호의를 베풀어 줄 수 있는지에 달렸겠지.
나는 비안의 프로필을 정리해 둔 팬 사이트에 나와 있던 비안이 자몽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TMI를 보고 고른 선물 세트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내가 준비한 건 탄산수나 음료에 간단히 타서 마실 수 있는 제로 슈가 자몽청과 자몽 생과 세트였다.
‘괜히 이상한 부담스러운 선물 들고 가서 역효과 나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지.’
박 대표에 대해 알려 달라고 다짜고짜 말을 꺼내기 전에 비안이 내게 어느 정도의 호의를 갖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테니.
일단 내가 유 대표 관련해서 아는 게 있다는 건 비밀로 해 둘 생각이었다.
‘일단은 뭐… 나도 눈치를 봐서 판단을 해야….’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갑자기 현관 쪽에서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
누구지? 멤버 중에 일찍 돌아온 녀석이 있다면 알아서 문 열고 들어왔을 텐데. 매니저라면 미리 연락을 했을 테고. 거실 소파에 비스듬하게 앉아 있다가 현관 쪽을 보자 현호가 방에서 벌떡 뛰쳐나왔다.
“제가 주문했어요.”
그러고는 성큼성큼 배달원이 이미 두고 간 봉투를 챙겨 안으로 들어왔다.
“저번에 줄 길어서 못 먹었던 그거요. 배달도 되는 것 같길래 제가 시켰어요. 계속 얻어먹기 죄송해서요.”
“어? 어어… 고마워.”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리스트에 있었으나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나중에 배달시켜 먹어야지 하고 포기해야 했던 가게의 디저트였다.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해 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묘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현호를 따라 식탁 쪽으로 갔다.
“얼마 나왔어? 내가 보내 줄게.”
“됐어요. 저도 받아먹기만 하기 불편해서 그래요.”
그러고는 곧장 포장을 뜯어서 먹으라고 내주는데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가 오해한 게 그렇게 신경 쓰였나.’
내친김에 등장인물별 호감도 상태를 확인하자 이전보다 별이 훅 늘어 있었다.
[▷제현호(A)] ★★★★
‘음?’
조만간 얘도 호감도 미션 수행 가능하겠는데? 대체 무슨 일이 터질지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모두를 위한 궁극적인 목표, 무사히 엔카운터 활동을 마치는 것을 위해서라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가수가 남들 앞에 서는 게 무서워서 무대 위에 못 올라간다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일단 그건 내일 다녀오고 나서 생각해도 될 것 같고.
나는 우물우물 현호가 배달시켜 준 생크림롤을 먹으며 지금까지 모아 둔 키워드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어찌 됐든 박 대표가 유 대표… 그러니까 내 친모 관련된 원인으로 외압을 넣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대체 유 대표가 은퇴할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나는 막막하고 씁쓸한 기분을 달콤한 크림으로 지워 버린 채 한숨을 삼켰다.
***
그리고 다음 날, 미리 정해 둔 시간에 맞춰서 택시를 타고 비안의 소속사 건물로 향한 나는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노른자 땅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빌딩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사무실 되게 좋은 데 있네.’
위치도 위치지만 낡은 구축 건물들이 대부분인 와중 올린 지 얼마 안 됐거나 관리를 매우 잘한 듯 외관이 굉장히 깔끔해서 더 눈에 띄었다.
현재 비안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는 간판스타도 비안, 주 매출원도 비안인 소규모 기획사였다.
비안 외에도 데뷔한 지 연차가 좀 쌓인 유명 가수들이 더러 소속되어 있었으나 전부 합해서 열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규모였다.
그렇다고 해서 비안만 돈을 벌어 오고 나머지 가수들은 적자를 내고 있는 기업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신인 발굴을 위해 투자하지 않는 대신, 기성 가수들에게 각각 원하는 대우를 맞춰 주고 절대 손해를 보지는 않는, 안정적인 회사라고나 할까.
앞으로 확 성장할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적자를 보거나 고꾸라질 일도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선택과 집중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싶은 케이스지.’
다른 소규모의 업력이 짧은 회사들이 잘 모르는 신인들을 후려쳐서 데려와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에 비하면 나름대로 성실한 노선을 개척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오늘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나는 입구에서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부터 했다. 그러곤 곧 생각지도 못한 얼굴의 등장에 당황하고 말았다.
“……?”
응접실 소파 한가운데 앉아서 뚱한 표정으로 나를 슬쩍 바라보고 시선을 돌린 건….
“네가 왜 여기 있어?”
다름 아닌 공민형이었다.
“…….”
공민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무시할 뿐이었다. 왜 이놈이 여기 있지? 놀라기도 잠시 사무실 안쪽의 탕비실에서 우당탕탕 뭔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어~! 인수 씨 왔어요? 잠시만~ 내가 지금 뭘 쓰러트려 가지고, 어머!”
그리고 다시 또 뭘 엎은 건지 단단한 접시가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화들짝 놀라 탕비실 쪽으로 달려가자 선반에서 뭘 꺼내다 쏟았는지 접시는 바닥에서 뒹굴고 있고 각종 티백 박스와 간식을 담아 두는 정리함도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아하하…. 내가 원래 이렇게 푼수가 아닌데 오늘따라 좀 자꾸 손이 꼬이네요?”
어느새 내 뒤를 따라서 소파에서 일어난 공민형이 익숙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탕비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도 가만히 보기만 할 수는 없어서 뒤따라서 정리를 도우려 하니 비안이 질색하며 나를 쫓아냈다.
“손님한테 일 시키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쉬어요. 앞에 소파 있으니까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아니, 손님이라고 해도 내가 후배인데 감히 가요계 대선배님을 앞에 두고 치우는 모습을 멀뚱멀뚱 보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비안은 강경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강제로 소파에 앉혀진 채 5분쯤 더 지난 후에야 비안이 간단한 다과를 든 민형을 옆에 끼고 응접실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