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쉬는 기분이 안 드네 (2)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만 마음의 소리를 더는 숨기지 못하고 뱉어 버리고 말았다.
“아뇨.”
내가 말해 놓고도 놀라서 합, 입을 틀어막자 비안이 호탕하게 웃었다.
“오늘 많이 힘들었어요? 왜 내가 봤을 땐 재밌게 논 거 같지?”
그야… 매 순간이 괴롭기만 한 건 아니었으니까? 나쁜 경험이 아니었다는 것까지는 나도 인정하겠지만 그렇다고 다시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늘 이렇게 자리 만들어 주신 걸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내가 다시 영업용 미소를 되찾은 채 은은한 얼굴로 웃어 보이자 비안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또 기회 있으면 봐요.”
내 말 하나도 안 들은 거 아냐? 유유자적하게 인사를 하고 차를 돌려 멀어지는 비안을 보며 나는 한숨을 삼켰다.
그러곤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서 공민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뭔데? 오후 4:32
[나] 왜 너까지 따라 나온 거야? 오후 4:32
그러자 5분쯤 후에 답장이 왔다.
[공민형] 나도 나가고 싶어서 나간 거 아님 오후 4:38
그건 말하지 않아도 그래 보였다. 나와서 한 거라고는 무슨 비안의 마리오네트처럼 이거 하라고 하면 이거 하고, 저리로 가라고 하면 저리로 가고, 그러면서 표정은 내내 뭐 씹은 사람마냥 굳어 있었으니까.
나는 최소한 비안에게 후배로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비즈니스 스마일이라도 장착했지 저놈은 그런 것도 없었다.
[나] 그럼 왜 나왔는데 오후 4:49
[나] 너도 뭐 비안 선배님한테 약점 잡혔냐? 오후 4:49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공민형] 꼭 너 같은 생각이나 한다 오후 4:50
뭐야, 왜 시비인데. 그럼 딱 봐도 억지로 끌려 나온 게 뻔해 보이는데 뭐라고 하냐.
둘이 무슨 각별한 사이라도 되냐고 물어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어차피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기자들이 부풀리기 좋아할 만한 사이보다는 나이 차이 크게 나는 큰누나와 막둥이, 아니면 막내 이모와 조카 정도로 보이더만.
뭐 때문에 공민형이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비안에게 ‘협조’한 것인지 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의아하기만 했다.
[나] 그럼 뭔데 ㅡㅡ 오후 4:51
그리고 그 후로 메시지가 뚝 끊겼다.
아 정말. 왜 혼자 알고 말을 안 해 주는데. 답답한 기분만 남은 채로 어쩔 수 없이 숙소로 돌아오니 제현호가 식탁에 뭔 빵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었다.
‘얼결에 곤란한 오해를 받게 된 것 같은데.’
고맙긴 한데… 이렇게까지는…. 아니 난감한 것보다도 어쨌든 고마운 마음이 더 크기는 한데….
내가 거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제법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바람에 윽, 어쩔 수 없이 식탁 앞에 앉았다.
“이제 며칠 있으면 규민 형 오니까 얼른 먹어요.”
이게 무슨 식단 조절 때문에 햄버거 먹으면 안 되는 동생한테 햄버거 사다 주는 언니 같은 상황이냐고.
그간 식단 조절로 힘들었던 적이 없을 정도로 식탐도 없는 편이고. 군것질을 좋아해 본 적도 없지만… 앞서 뿌려 놓은 씨앗이 있으니 별수 없었다.
제현호가 기껏 준비해 준 걸 마다할 수도 없고.
‘이제는 어째 자기가 더 진심인 것 같기도.’
나는 하는 수 없이 얌전히 식탁 앞에 앉아 크림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쨌든 이제 리스트에서 하나만 먹으면 미션도 달성인가.’
오늘 비안에게서 유의미한 정보만 얻을 수 있었으면 미션도 진행하고 뻐꾸기 단계도 낮추고 딱이었을 텐데.
이렇다 할 대단한 성과는 없어서 애매한 소득에 쓴 입맛만 다시던 중, 크림빵 하나를 겨우 다 먹어 갈 즈음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비안 선배님] 잘 들어갔어요? 오늘 넘넘 고생 많았어요^^~ 둘이 나이도 같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자리 한번 만들어 봤어요^^ 오후 5:24
생각해 주신 마음은 정말 감사한데 별로 원하지 않았어요…. 그대로 답장해 버리고 싶은 것을 애써 사회성을 끌어올려 감사 인사를 보냈다.
[나] 넵, 오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선배님도 오늘 운전해 주시느라 정말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후 5:25
별다른 의미 없이 정말 안부 차 보낸 연락이라면 빨리 마무리 짓고 좀 쉬고 싶은데.
이곳저곳 끌려다니며 쌓였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들이닥치기 시작한 그때.
감겨가던 눈이 딱 떠질 만한 문장이 핸드폰 화면에 떠올랐다.
[비안 선배님] 아무튼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 민형이가 있어서 못 했죠? 오후 5:26
나는 반사적으로 ‘네.’ 하고 보내 버릴 뻔한 것을 이성을 발휘하여 참았다.
[비안 선배님] 휴가 언제 끝나요? 끝나기 전에 우리끼리 따로 한번 볼까요^^? 오후 5:27
당연하지만 비안 또한 이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허투루 살아남은 것이 아니기에 20대 남자애가 머릿속으로 할 만한 생각은 뻔히 읽을 수 있는 듯했다.
나는 서둘러 일정을 잡을 수 있도록 회신을 보냈다.
[나] 이번 주 토요일까지 휴가입니다. 편하신 날 말씀해 주시면 제가 오늘처럼 사무실로 찾아뵙겠습니다. 오후 5:28
그렇게 다시 이틀 후에 비안의 사무실로 찾아가기로 했다.
이번엔 정말 계획했던 대로 박 대표 관련이든 밀키즈 활동과 관련된 이야기든 물어볼 수 있겠지.
어떤 답을 들려줄지는 비안의 의사에 달려 있는 일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럼 일단은 또 이틀 유예인가.’
곰곰 생각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엔카운터 공식계정으로 뭘 올렸는지 SNS 반응 알림이 상단에 떴다.
‘이번엔 누구이려나….’
하고 SNS에 들어가 보니 영인이 고향에서의 셀카를 잔뜩 올려 두었다.
‘이 녀석은 뭐… 지나칠 정도로 잘 지내고 있네.’
배경으로는 새하얀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가족들과 호화스러운 요트를 타거나 서핑을 즐기는 사진들이었다.
이 녀석, 은근히가 아니라 진짜로 도련님이었잖아? 놀라기도 잠시 곧바로 규민이 남긴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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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인증) 뭐야 나도 데려가ㅏㅏㅏㅏ
└[영인](인증) (파도 이모티콘)
└[혜성](인증) 나도나도(파도 이모티콘)(파도 이모티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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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지원이 좋아요를 찍은 것까지 아주 반응이 골고루였다.
자작 컨텐츠야 앞으로도 계속 찍어야 하니까… 아예 특집으로 잡고 다 같이 호주로 떠나는 것도 괜찮을지도. 기회가 된다면 나쁘지 않았다.
영인의 집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대저택이라면 현지에서 묵는 홈스테이 컨셉으로 잡아도 괜찮을 테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나중의 이야기고.’
영인의 근황을 알게 된 김에 다른 녀석들은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녀석들도 SNS 쓰는 거 같긴 하던데.’
제일 많이 사용하는 건 벌룬 앱 기본 기능에 포함되어 있는 게시판형 SNS였다.
다른 멤버들이 각자 공식 인증된 자기 아이디로 댓글을 달아 주거나 반응할 수도 있어서 팬분들께 제공하는 컨텐츠로서도 좋았다.
그걸 알기에 다른 녀석들도 근황이나 셀카 등을 올릴 때 개인 SNS보다는 벌룬 앱 게시판을 더 자주 사용했다.
‘또 그새 올라온 게 뭐가 있나….’
은찬과 하연은 아마 하연이네 식구들과 함께 놀러 간 듯 캠핑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누구네 집이라고 딱히 설명하지는 않았는데 일반인 가족분들은 죄 얼굴이 모자이크가 되어 있음에도 누구 가족인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들 엄청 크네….’
제일 큰 분은 2m가 넘는 것 같은데, 맞나? 다른 분들은 가려져 있는데 그분만 안 가려져 있길래 뭔가 했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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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제일소중한퇵은] 헐 옆에 있는 분 배구 선수 박차연 선수님 아니에요?
└[하연](인증) 맞습니다(폭죽 이모티콘) 저희 사촌 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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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저렇게 장신 유전자가 확고한 집안에 키로 득 보는 사람이 없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이쪽은 놀러도 다니고 잘 지내는 것 같고.
규민도 예의 할아버지 가게에 들른 사진을 올렸다. 일각에서 너무 대놓고 가족 사업장을 홍보하는 게 아니냐 하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지만….
‘부모님이나 형제도 아니고 할아버지라서 어째 효도 정도로 퉁쳐지는 것 같네.’
게다가 그냥 가게도 아니고 원래부터 맛집으로 소문나서 관광 성수기 때에는 몇 시간씩 대기하기도 하는 가게인 모양이었다.
어영부영 자리 못 잡은 가게를 손자 이름으로 홍보해서 덕 보려고 한다기보다는, 원래도 장사 잘되고 고기 질도 좋아서 유명했던 곳이라 마당 한편에 포토 존이 생긴 정도의 차이였다.
‘이것도 나름대로…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굉장하군.’
팬들이 올린 포토 존 후기를 보니 무슨 이규민이 어렸을 때 탔던 목마, 이규민이 학교에서 타 온 상, 이규민이 어렸을 때 입은 잠바 같은 것부터 입간판까지 골고루 구비되어 있었다.
‘나였으면 절대 못 하게 하지….’
내가 견딜 수 있는 건 딱 입간판 정도였다. 그것도 쪽팔려서 볼 때마다 가리고 싶어 했을 것 같은데.
내 양부모님이 두 분 다 개인 사업을 하는 분들이 아니셔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무튼 규민이야 애초부터 큰 걱정 안 했으니까 괜찮고.
‘지원이가 좀 걱정됐는데.’
할아버지가 퇴원을 하긴 하셨는데 여전히 거동이 불편해서 간병인을 쓰는 걸로 알고 있었다.
연락이나 소식이 없으면 제일 불안한 녀석이라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히 지원의 근황도 벌룬에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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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인증) 안녕하세요, 드리머분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서 점점 게을러지는 것 같아요ㅋㅋㅋ 이대로 곰이 되어 버리면 어떡하죠? (사진)
└[내일우유] 지리산 레인저분들한테 신고해야겠네….
└[지원](인증) 네????
└[내일우유] 아 지원아 미안해 ㅠㅠㅠㅠ 뒤에 마저 쓰고 댓글 단다는 게 앞에만 덜렁 가 가지고 ㅠㅠㅠ ‘여기 아기 반달곰이 탈출했어요ㅠ’까지 마음의 눈으로 봐 줘ㅠㅠㅠㅠㅠㅠ
└[지원](인증)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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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오해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잘 지내는 거 같으니 다행이고….
‘가만. 지금까지 근황 보고 안 한 게 나뿐인가?’
물론 벌룬 챗으로는 계속 하루에 한 번씩은 들러서 셀카도 올리고 TMI도 풀고 하긴 했는데.
나를 개별적으로 구독해 주신 분들만 볼 수 있는 것 말고 전체 공개된 기록은 아직이었다.
‘내가 제일 문제네, 내가.’
나는 재빨리 오늘 비안 외 1인과 함께 찍었던 사진 중 제일 잘 나온 것을 골라서 게시판에 올렸다.
[인수] 오늘 비안 선배님과 민형이를 만나고 왔어요. 오랜만에 감사 인사드릴 겸 찾아뵈었는데 반가운 얼굴이ㅎㅎ!
공민형의 향후 데뷔가 결정되었으면 그것도 어떻게 홍보를 같이 해 주든가 할 텐데, 그건 들은 바가 없어서 그냥 친분 공개 정도로 멈췄다.
‘결국 오늘 소득은 없이 놀기만 한 건가.’
눈앞에 가득 쌓인 빵을 더 먹기가 양심에 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