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예상외의 관심 (3)
“형도 붙이실래요?”
제현호가 내민 건 마스크 팩이었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내가 순간 당황해서 멀뚱히 올려다보고만 있으니 제현호가 평소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덧붙였다.
“필요 없으면 말고요.”
제현호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돌로서 소소한 셀프 관리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제현호가 내민 팩을 받아 들었다.
“아냐. 방금 세수하고 왔으니까 나도 할게.”
주섬주섬 팩을 까서 얼굴에 붙이는 동안 제현호는 묵묵히 자기 침대로 가서 팩이 떨어지지 않는 각도로 기대 누웠다.
‘아니, 이 뭐….’
제현호가 자기 돈 주고 샀을 리는 없고. 누가 갖다준 건가? 나는 꽤 고급 브랜드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포장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물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야?”
그러자 제현호가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혜성 형이 줬어요.”
그러면 그렇지. 나중에 나도 고맙다고 해야지. 그래도 와중에 그걸 준다고 내 몫까지 받아 와서 하고 있는 현호가 기특하기는 했다.
‘벌써 몇 번째 생각하는 거 같은데 진짜 용 됐다.’
처음엔 이거 사인회장 같은 데 데려다 놓으면 한숨 푹푹 쉬고 팬들 무시하는 발언 해서 일내는 거 아닌가 했는데.
나름대로 노력도 하고 발전도 하고 자기가 잘하는 게 뭔지 연구도 하는 게 점차 프로다운 모습을 익혀 가고 있었다.
“이거 다 하고 바로 잘 거지?”
내가 슥 시간을 확인하며 묻자 현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경제적으로 하는 건 여전하고.
거기까지 완벽하기를 바라는 건 나도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얌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그래, 그럼 푹 쉬고, 내일도 파이팅하자.”
그래도 이제 절반은 건너왔으니까. 지옥의 해외 스케줄이 끝나고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쭉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갈 곳은 없을뿐더러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
그 후 지옥의 강행군이었던 해외 스케줄이 마무리된 날. 우리는 쉴 틈도 없이 다시 사옥으로 호출되었다.
“흐아암~.”
“아 피곤하다…”
“눈 감으면 바로 잘 수 있을 것 같아… 흐암….”
저마다 피곤하다는 내색을 숨길 수조차 없어서 한마디씩 내뱉는 사이 우리를 데리고 사옥까지 가야 하는 매니저도 안색이 썩 편해 보이진 않았다.
“저희 오늘 사옥 가는 게 마지막 일정이죠?”
낮 시간 동안 내내 태평양을 날아 한국 시간으로 오후에나 공항에 내렸기 때문에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비행기가 착륙한 게 오후 4시니까 사옥까지 오는 데만 차로 한 시간쯤.
다들 저녁은 거르고 일단 잘래! 쉴래! 모드가 장착되어 있는 와중 사옥에 들러야 한다니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니까….’
처음 파리에서 귀국했을 때만 해도 다들 에너지가 넘쳤다. 장거리 비행이 피곤하기는 해도 일단 대부분은 비행 시간 내내 자면서 떨어진 체력을 보충했고 귀가하고 나서도 각자 반응을 찾아보거나 짐을 정리하는 등 쓸 에너지가 조금씩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본 활동 이후, 급격하게 비축된 기력이 소진되기 시작하면서 하나둘 말수가 줄어들었다.
출국할 때는 그래도 조잘조잘 힘이 남아서 떠들기도 하고 기내식이 나오면 뭐가 맛있네 이건 별로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
귀국할 때는 다들 사람의 형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썩 얌전해진 모습을 보였다.
‘시차 때문에 고생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네.’
파리에 갔을 때는 일정이 워낙 짧고 스케줄이 하나뿐이라서 시차를 느낄 새도 없었다.
쉴 수 있을 때 쉬고! 스케줄 소화하고! 귀국! 의 아주 간결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적응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번 미국 일정은 오고 가는 두 번의 비행을 포함하더라도 3박 이상 지내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피로도가 체감되었다.
거기다 그쪽 시차에 조금 익숙해질 만하니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탓인지, 차에 도착하자마자 눈부터 붙인 멤버가 있을 정도였는데. 그게 누구인가 하니….
‘많이 피곤하긴 했나 보네.’
바로 제현호였다. 계속 피곤해요, 졸려요 힘들다는 걸 표현을 해서 케어를 받은 다른 멤버들과 달리 제현호는 아무런 투정도 불평도 없었다.
그래서 더 다른 멤버들보다 이런저런 지원에서 후순위로 밀렸고 그조차도 한마디도 티를 안 내서 결국 내가 챙겨 준 적도 있었다.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니까.’
너무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우리가 혼자서 모든 걸 챙길 수 없기 때문에 스태프분들과 함께 이동하는 거라고 누누이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하더니만.
체력도 좋은 게 바로 지쳐서 곯아떨어진 모습을 보니 퍽 안쓰러워서 주머니에 쑤셔 놨던 안대를 슬쩍 씌워 주었다.
평소라면 뭐냐고 벌떡 눈을 떴을 녀석이 그대로 쿨쿨 잠들어 있는 걸 보니 정말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저희 사옥 갔다가 숙소로 바로 가는 거 맞나요?”
매니저도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지 한 번 물어서는 대답이 없어 재차 목소리를 높이자 매니저가 퍼뜩 놀라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아, 네네. 아마도요? 공식적인 스케줄은 없는데 대표님이 꼭 사옥으로 와 달라고 말씀하셔서요. 아마 향후 활동 관련해서 하실 얘기가 있으신가 봐요.”
매니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다.
“우~. 급한 거 아니면 쉬고 싶은데.”
“대체 무슨 급한 일이길래 그러시지….”
투덜투덜 한마디씩 얹고 있으려니 매니저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진화에 나섰다.
“미팅 끝나면 꼭 좀 바로 귀가할 수 있도록 제가 말씀드릴게요.”
이 시점에 해외 스케줄 마치고 피로에 전 녀석들을 데리고 할 말이 뭐가 있다고.
나 또한 못마땅한 심기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사옥에 내리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생각지도 못한 포상이었다.
“어어, 왔어요?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지. 주소 찍어 줄 테니까 그쪽으로 와요.”
도착했다고 주차장에서 전화하자마자 갑자기 오라 가라 하길래 대체 왜 이러나 했는데.
대표가 찍어 준 주소에는 웬 고급 레스토랑이 있었다.
“……?”
“뭐야?”
다들 눈으로 보고도 여기가 맞는지 믿기지 않아서 멀뚱히 차를 대고 서 있으려니 주차 부스에서 직원이 나와 안내를 해 주었다.
“코드비 일행분들이시죠? 안쪽으로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뻔히 우리가 누구인지 알 텐데도 그룹명이 아닌 회사 이름으로 호명하는 게 나름의 배려라고 느껴졌다.
다들 막 비행하고 내려서 입국장까지는 팬분들이 기다리고 계시니 어떻게 의지를 불태워 멋진 모습을 유지했으나 차에 탄 순간 몰골이 말이 아니게 무너진 것이다.
그런 꼴로 연예인이랍시고 주목받고 그러면 아무래도 보여지기 위한 삶을 직업으로 택한 우리라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직원분의 안내를 받아 내부로 들어가자 원래도 테이블이 얼마 안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오늘 손님을 우리만 받기로 했는지 내부에는 대표뿐이었다.
“어어, 오늘 고생했어요~. 이쪽으로 와요.”
표정이 아주 의기양양한 게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아, 네. 대표님. 안녕하세요.”
“얼른 앉아요. 먼 길 오느라 수고했을 텐데 배 든든히 채우고 가서 쉬어요.”
“앗,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 비용은 오늘 대표님이 내는 건가. 다들 슬쩍 눈치를 보고 있으려니 대표가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는 내가 우리 고생해 주는 친구들 꼭 한번 데려와 보고 싶어서 어렵게 마련한 자리니까 다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왜 굳이?’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이긴 하지만 누구도 이런 취미가 없는데 어째서. 차라리 집에서 배달 음식이나 배 터지게 먹여 주는 걸 더 좋아할 녀석들만 잔뜩이었다.
‘이런 데는 과식하면 소화 안 돼서 힘들어지는 때 와야 좋아하지….’
물론 비싼 밥 먹여 주는 게 싫다는 건 아닌데. 잔뜩 고생하느라 체력이 바닥 난 상태에서는 평양 감사도 아쉬운 소리가 나온다는 뜻이었다.
“그럼,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곧 다른 직원이 나와서 하나하나 코스를 설명해 가며 접시를 내오기 시작했다.
대표가 엄선한 곳이라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만 음식은 확실히 맛있었다.
뭐가 어디 산이고 뭐는 어떻게 조리를 했고 하는 얘기들이 귓등으로도 안 들려서 그렇지.
대체 왜 갑자기 이런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가. 대표에게 들었던 의문이 풀린 건 숙소로 돌아오고 나서였다.
“참 각자 소속사로 정산 내역서 도착했을 테니까 문의해 보시면 답변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랑 직계약 체결되어 있는 두 분은 바로 메일로 보내 드렸고요.”
왜 갑자기 비싼 회식을 준비했는지 의아했는데. 곧바로 메일함을 확인해 정산 내역을 본 나는 순간 내가 숫자를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야… 정산 기간이 분기니까 3분의 1로 나누면 훨씬 줄어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에 깜짝 놀랐다.
“뭐야 얼마인데?”
아무래도 내가 개인 활동이 제일 많기도 했고, 예능이나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따로 섭외받은 게 많았어서 다른 녀석들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본소속사와의 계약으로 인한 이중 수수료도 없으니 다른 녀석들보다 정산금이 훨씬 많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풍족해지는 금액이라고만 말할게.”
아무리 허물없이 지내는 멤버들이라지만 금액 관련된 차이가 눈에 보이는 건 좋지 않을 게 뻔해서 나는 약간의 힌트 정도만 주었다.
“너 다음 달부터는 정산받을 수 있겠다.”
“헐 미친.”
그리고 그 말에 다들 늦은 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하나둘 본소속사에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쪽에서도 수수료 정산하고 공제하는 프로세스가 있을 테니 실제로 얼마를 벌었는지 알게 되는 건 한참 더 걸리겠지만.
성공의 단맛을 어렴풋이 전해 들은 모두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금 상태면 쇼 케이스 무대 한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인이 감격에 차서 한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다들 기운이 났다니 다행이었다.
“자 그럼 내일도 연습 일정 있으니까 다들 잊지 말고 10시까지 준비해 주시고요. 피곤하실 테니까 오늘은 푹 주무세요!”
내일부터 다시 하루의 휴일도 없이 새로운 강행군이 시작된다는 건, 당장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