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그때의 선택이 (4)
“아니 지금이 어느 땐 줄 알고. 인터넷 없는 시대에서 오셨나.”
슬쩍 J 신문사의 연예 통신부 결정권자로 보이는 이사진들의 사진을 확인하니 죄 요즘 세대와는 동떨어져 있는, 곧 은퇴를 앞둔 아저씨들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심사 위원 점수가 투표와 성적 점수에서의 압도적인 차이를 뒤집을 만큼 영향을 준다면 그건 소비자 기만이 맞았다.
그럼 최소한 투표라도 무료로 해야 했을 거 아냐?
구독 중인 SNS의 스크롤이 대상을 탔을 때보다 더 빠르게 위로 밀려 올라갔다.
“검색어 실트도 수상 조작 관련으로 난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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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 조작
2. 대상 대체
3. #수상조작_해명해
4. 초코 시즌
5. 연말 선물
6. #내게_어울리는_친구타입
7. 엔카운터
8. 조작아니
9. 크리스마스이브
10. 새해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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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들은 물론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엔카운터의 수상을 예상하고 있었던 탓에 반발이 더 빠르게 번졌다.
“이러고 이전에 뒤집힌 적 있었나?"
"글쎄요.”
다들 손에 쥐고 야무지게 뜯던 닭 다리도 내려놓은 채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기 바빴다.
스크롤 할 때마다 임주희의 수상이 조작일 수밖에 없는 증거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볼수록 어이없네.’
각 퍼센트별로 점수를 계산해 보면 엔카운터의 점수가 0점이라고 해도 실제 수상자보다 점수가 더 높았다.
그 말은 즉 심사 위원 점수에서 마이너스 점수를 퍼 줬다는 건데. 설명에는 분명 심사 위원 점수를 ‘가감’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더해’ 산출한다고만 했지. 물론 음수를 더한 것도 더한 거라고 우기면 수학적으로는 맞겠지만.
상식적이고 관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더하다’의 의미는 마이너스가 아니니까.
해당 조항을 들어 이건 ‘조정’이 아니라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쏟아졌다.
주관사 홈페이지의 문의란에도 같은 내용으로 벌써 50페이지가 넘게 항의 글이 작성되고 있었다.
‘진짜 어쩌려고 이러냐.’
주관사가 한심한 건 한심한 거고. 누가 봐도 대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성적을 내고도 수상을 빼앗겨 울적해 하고 있을 인수를 생각하니 속이 탔다.
‘안 그래도 인수 은근히 자존감 낮은데.’
연습생 생활이 길어서 그런가. 뭔가 표면적으로 당당해 보이고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위태롭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너무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아무래도 연차도 길고 대형사인 NO 출신에 겟 데뷔 때도 줄곤 1위를 유지했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동안 승재를 덕질할 때는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실력! 성적! 겉으로 보이는 퍼포먼스와 간지가 최고다! 승재는 무대 위에서만큼은 완벽한 대신 사생활에서 다소 느슨하거나 평범한 그 나이대 애들처럼 투덜거리고 뺀질거리는 모습을 보여 줘서 그런가.
힘들다, 쉬고 싶다, 응석을 부릴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한결같았다.
‘야, 니가 지금 쓸어 담는 돈이 얼마인데 지금 팬들 앞에서 평범한 청년으로서의 일상 운운하는 건데.’
그렇게 평범한 일상 원하면 통장 잔고도 나랑 바꾸든가.
약한 소리를 할 때마다 채찍질을 하고 싶어졌던 승재와 달리 인수는 지나치게 성실한 면이 있었다.
아직 신인이라 기합이 잔뜩 들어간 것도 있겠지.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흔적으로 남아 있는 연습생 시절부터의 기록만 봐도 자기가 하는 일에 얼마나 열정이 넘치고 진지한지 엿보였다.
‘그게 오히려 걱정이 될 줄은….’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본인이 잘못한 게 아닌데도 가책을 느끼고 있지 않을지 걱정이 됐다.
‘승재라면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닌 듯한? 하고 캔맥 하나 까고 있었겠지.’
이번엔 모처럼 성실한 멤버를 잡아서 좋아했는데. 이게 반대로 걱정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결과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타입.
분명 아이돌로서는 최적의 성향일진대.
‘그것보다 좀 네 마음 편하고, 네가 행복한 것도 챙기면 안 되는 거야?’
인덕은 그새 새로 올라온 인수의 피드를 확인하며 쓴 입맛을 다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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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 안녕하세요, 드리머분들! 오늘도 열띤 응원으로 함께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보내 주신 성원 덕분에 오늘도 이렇게 양손 가득 든든하게 귀가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일정도 함께 파이팅! 하고 즐거운 연말 마무리해 봅시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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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게시글이 제대로 올라간 것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잠시 심호흡을 삼켰다.
문제 될 만한 발언은 아무것도 없는 게시글인데도 순식간에 예상한 대로 댓글이 엄청나게 달렸다.
[- 내가 다 억울해 ㅠㅠㅠㅠㅠㅠㅠㅠ 대상이 진짜 누구 건지 다들 아는데 심사 위원들만 모르는 듯]
[- 나 같으면 내 대상 내놔 미친 넘들아 뻐큐부터 올릴 것 같은데 역시 리더의 그릇이 남다르다….]
[- 인수야 너는 잘못한 거 없어 다들 너 그리고 엔카운터 응원하는 사람들뿐이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고]
[- 주작으로 받아 봤자 다 본인 불명예인데ㅎㅎㅎㅎㅎㅎ 누가 진짜인지 뻔히 보이는 걸 손바닥으로 가리는]
여기에는 내가 어떤 반응도 해서는 안 됐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실제로 억울한 마음이 조금도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걸 드러내는 순간 그때부터는 내 흠이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눈에 훤했다.
[- 아까운 마음은 알겠는데 이제 데뷔한 지 반년도 안 됐으면서 대선배님 머리채 잡는 클라스 대단하네ㄷㄷㄷㄷ]
[- 팬덤 장사하는 남돌이 대중 픽 앞에서 억울하다고 주름잡는 거 봐라ㅋㅋㅋㅋㅋㅋㅋㅋ 느그 본진 느그네서나 대박 신인이고 난리지 대중은 누군지도 모른다고]
[- 리더라면서 진짜 ㅈㄴ 경솔하다 지금까지 문제 안 터진 게 신기하네]
[ㄴ 이미 방송 중에 몇 번 터졌음 제작사에서 커버 쳐 줘서 그렇지 팬덤이 존나게 콘크리트라 얘 빼면 프로그램 망해서ㅋㅋㅋㅋ]
그러니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았다.
나는 가상의 악플을 상상하고 고통받는 것은 그만두고 후, 정신을 차렸다.
슥, 벌룬 커뮤니티의 지난 게시글들을 훑어보니 평소에 소통 잘하기로 유명한 멤버들은 이미 나와 비슷한 느낌으로 감사 인사를 올린 후였다.
‘어이구.’
지원이 올린 글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얼핏 보기에도 혜성이 옆에서 같이 고민해 준 것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올린 사람은….’
은찬뿐이었다.
‘솔직히 우리 중에 제일 올릴 건수가 있는 건 정은찬 아닌가.’
일단 자기 이름 세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는 트로피가 있잖아. 다들 앨범 프로듀싱상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할 거 같은데.
아이돌 본인이 받을 만한 상은 아니니까.
그러나 본인은 그런 호기심 따위는 개의치 않는 건지 묵묵부답이었다.
‘뭐…. 본인도 딱히 자랑스러워 보이진 않는 눈치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프로듀서들이 상주하는 커뮤니티는 한바탕 뒤집힌 모양이었다.
‘받을 만했다’와 ‘쟤가 저걸 왜 받냐’의 싸움으로.
본인도 왜 받았는지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상을 여러 사람들이 요목조목 분석해 가며 타당하네, 억지네 하고 떠드는 꼴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정은찬의 그 대단하신 프라이드에 생채기 정도가 아니라 비수를 꽂는 행위였다.
‘차라리 좀 태평한 성격이었으면 나았으려나.’
아무렴 받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줬겠지. 실제로도 난 잘났고! 하고 당당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아냐.’
정은찬의 밸런스를 맞춰 주고 있는 게 무엇이던가.
그나마 자존감이라도 낮아서 그의 오만한 자존심이 거기서 더 높아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셈이었다.
여기서 더 정은찬이 폭탄이길 바랄 수는 없지.
“…….”
좀 전에 퍽 울적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안쓰러웠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자존심이 센 편이다 보니 지금 어떻게 대하는 것이 최선일지 예상되었다.
‘본인 스스로 이 상황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 줘야지 뭐.’
나는 짧은 한숨을 삼키며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따로 출연 일정은 없지만 대신 그 이상으로 힘든 연습 일정이 있었다.
오늘은 아쉬운 소식을 전했지만 KMC에서 주관하는 시상식에서는 우리가 제일 주목받을 것이 뻔했다.
‘오히려 너무 휩쓸어 간다고 억지 몰아 주기 아니냐 욕먹는 게 걱정될 정도지….’
하지만 실제로도 저희 성적이 잘 나왔는데 어떡해요. 상을 쓸어 담게 화제를 모았는데.
갑자기 자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뭔가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 못 받았다고 침통해 있었으면서. 방송국 소속의 임시 회사 소속이라 지금껏 불편한 것들만 잔뜩이었는데.
‘이런 건 나쁘지 않네.’
우리 성적이 나빴다면 얼굴도 못 들 만큼 부끄러웠겠지만. 지금은 든든한 아군이 등 뒤에 버티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무대 잘하는 거나 생각하자.’
긴 상념을 마치고 눈을 감은 채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눕자 건너편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이 안 오나….’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니 계속 부스럭부스럭 제현호가 뒤척이는 소리가 귓가를 건드렸다.
‘좀….’
부스럭, 부스럭….
나는 한참을 인내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이불 위를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켰다.
‘좀 적당히 하고 자라!’
지금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잠을 못 자는 건지. 아까 감사 인사 올리는 거 보면 제일 산뜻하더니. 속으로는 많이 심란했나?
안 그러던 녀석이라 걱정이 되기도 해서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물었다.
“잠이 안 와?”
“…….”
제현호는 그대로 드러누운 채 반응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다.
뭐야 그냥 잠꼬대였나. 나는 다시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 올려 덮고 잠을 청하려다가 불쑥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네.”
‘대답 안 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한참이나 뒤척거리는 거 보면 금방 잠들기는 글렀고. 이럴 땐 즉효 약인 것이 있었다.
‘주혜성한테도 잘 먹혔던 건데….’
일명 진실의 시간. 나는 재빨리 바닥을 디디고 서서 제현호를 일으켜 세웠다.
“잠깐 바람 좀 쐬자. 위에 롱패딩만 입어.”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이 계절에 술 한 캔 까기에는 지나치게 추운 날씨니까.
그냥 바람이라도 쐬고 속 깊은 얘기 몇 마디 하면 그래도 좀 답답한 건 풀리겠지.
‘설마 안 간다고 하면…’
내가 살짝 눈치를 본 것이 무색하게, 제현호가 주섬주섬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