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3)
[오늘 이렇게 기쁜 상 안겨 주시고 항상 응원해 주시는 팬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 분 더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요.]
통상적인 수상 소감에 뭔가 특별한 것이 추가될 것 같은 멘트가 이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현호에게로 향했다.
[제가 따로 공개한 적이 없어서 다들 모르시겠지만 사정이 있어서 가족들과 꽤 오래 만나지 못했어요. 오늘같이 좋은 날만큼은 TV 중계를 통해서라도 보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 자리를 잠깐 빌려 보려 합니다.]
평소라면 이미 8명이 한마디씩 하느라 충분히 길어졌다고 빨리 정리하고 끊으라고 난리를 쳤을 스태프들도. 뭔가 평범한 소감과는 상황이 다른 걸 느꼈는지 끊지 않고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게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것보다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뭔가 일이 있었구나 짐작케 하는 내용을 말하는 제현호는 홀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덤덤했다.
[방송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금 충분히 잘 지내고 있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를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원망하는 마음도 없으니까.]
슬슬 시간을 늘려 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지 무대 아래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던 스태프 한 분이 서둘러 자르라는 듯한 수신호를 보냈다,
슥, 제현호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더니 알았다는 듯 긴 소감을 끝냈다.
[잘 지내는지. 힘든 일은 없는지 안부 정도는 전해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소감 발표 끝에 MC가 애써 돌발 상황을 수습하는 멘트를 하고 곧바로 엔딩 무대로의 전환이 이어졌다.
제현호의 사정을 모르는 다른 멤버들 모두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달려드는 와중, 나는 조금 전 현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는 원망 같은 거 안 해?’
비슷한 사연이 있는 나만이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현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하는 것 같아요.’
안 하면 안 하는 거고, 하면 하는 거지. 안 하는 것 같아요는 또 뭐야? 의문을 가득 띤 채 현호를 바라보자 현호가 담담한 말투로 설명했다.
‘이제 와서 원망하고 미워하고 한다고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지금 상황만 보면 그때 시설로 옮겨진 덕분에 학교도 잘 다니고, 회사 들어가서 트레이닝도 받고 어쨌든 잘 풀린 거니까… 그 집에 계속 남아 있었으면 더 큰 일을 당했을 수도 있겠다 싶고요.’
생애 첫 기억부터 친부모님은 온데간데없이 할머니나 양부모님과 함께였던 나와 달리 현호는 버려지기 전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고 했다.
먹을 거라곤 유통 기한이 지난 라면 정도밖에 없고 그것마저 떨어지면 누나와 함께 쫄쫄 굶거나 어디서 얻어 온 우유 팩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다고.
그러니 원망보다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더 크다는데….
‘글쎄다. 단체 미션 때문에 갇혔을 때 했던 말 생각하면 미련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던데.’
굳이 따지자면 다른 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 듯했다.
다행히 좋은 시설로 옮겨져서 자신은 두 다리 뻗고, 배 곯는 일 없이 지내는데. 누나는 계속 그 제대로 관리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집에 남아 있으니까.
말은 버려 줘서 더 나았다고 해도 아주 앙금이 없지는 않을 거고, 그립기도 하고 아주 조금은 원망스러우면서고 걱정이 되는. 그런 애증스러운 상대인 거겠지.
현호와 머리를 맞대고 뭐라고 소감을 해야 누나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의논하는 내내 나 역시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본인이 애초에 그렇게까지 강제로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는데 내가 나서는 것도 좀 이상한 그림이고.’
그러나 미션 때문만이 아니라도 어쨌든 현호와 누나 모두, 서로 만나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서로 어긋나 영영 포기하는 건 역시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오지랖이 지나친 거지, 뭐.’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현호를 설득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해 보자. 난 네가 그대로 포기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그 결과 현호도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으면 좋겠는데.‘
거기까지 이르고 나니 불쑥 유 대표가 생각이 났다.
‘혹시라도 유 대표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면….’
나도 현호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으려나. 하지만 이쪽은 성공을 해도 너무 성공해 버려서 동정심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거기다 사정이 좀 더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까.’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내가 누군가를 완전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내 친아버지는 누구지?’
인간이 자가 생식을 하는 동물도 아니니까. 어쨌든 아이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닌데.
내 친부는 내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쓰레기 남자 친구처럼 책임질 생각 없다고 네가 알아서 하라고 도망이라도 쳤을까.
유 대표에게 직접 물어 대답을 듣지 않는 한 영원히 미제로 남을 호기심이었다.
‘차라리 내 존재 자체를 모르는 쪽이 낫겠다.’
아무리 친부모 같은 건 이제 와서 아무 의미도 없다 생각하게 된 나라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모두에게 버려진 건 조금이 아니라 많이 상처가 되는 일이니까.
그래도….
‘솔직히 조금 궁금하기는 하네.’
머리도 굵을 대로 굵어진 마당에 상처를 받으면 얼마나 받겠냐는 마음과,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곱씹는 사이 혜성이 현호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개인적인 부분인 것 같아서 우리한테 다 털어놔 달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오늘 일로 우리한테 폐 끼쳤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 먼저 얘기해 줬더라도 다들 괜찮다고 찬성했을 거야.”
수상에 대한 축하로 들썩여야 할 팬 커뮤니티가 전부 현호와 관련된 이슈로 도배가 되는 바람에 신경 쓸까 봐 해 주는 말 같았다.
“아니에요. 마이크를 잡은 김에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안 될 것 같아서 순간 얘기한 건데 저도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덤덤한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엔딩 무대 이후 또 정신없이 마무리를 짓고 숙소로 돌아오니 비로소 올해의 모든 일정이 다 끝났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다들 고생했어~.”
“와 올해가 벌써 끝이네.”
주차장에서 숙소까지 올라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패딩을 뚫고 들어오는 매서운 칼바람에 다들 이를 달달 떨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씻어야지, 내일은 저녁때까지 침대에서 안 일어나야지. 다들 이런저런 계획들을 읊어 대는 와중 문을 열고 숙소에 발을 들이려던 순간 영인과 규민이 멤버들 앞을 가로막았다.
“……?”
“음?”
다들 무슨 일로 교통 체증이 생긴 건지 당황하기도 잠시 규민이 그런 에너지가 용케도 남았다 싶을 만큼 씩씩하게 외쳤다.
“잠깐만~. 올해 일정도 끝났고 말일부터 1월 1일까지는 본가로 가는 멤버도 있을 테니까 지금이 마지막 타이밍인 것 같아서. 좀 춥긴 한데 위에 스토브도 갖다 놨으니까 한 15분 정도만 협조해 주시죠?”
말은 청유형이었으나 사실상 반강제였다. 다들 얼떨떨한 기분으로 두 사람의 손에 이끌려 옥상으로 올라가자 A4 용지에 컬러 프린터로 출력한 듯한 허접한 플래카드가 우리를 반겨 주고 있었다.
[엔카운터 단독 송년회]
단독 콘서트도 아니고 단독 송년회는 뭐야? 조잡해 보이는 장식에 어이가 없었으나 나름대로 음료수에 맥주캔에 이것저것 차려 놓은 걸 보니 몰래 준비하느라 애쓴 티가 났다.
“뭘 이런 걸 준비했어. 다들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물론 이런 시간을 가지면 내부 단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굳이 몇몇이 몰래 고생할 필요는 없는데.
타박이라기보다는 힘들었을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나온 말에 규민이 우우 야유를 퍼부었다.
“자꾸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어르신처럼 말할래? 그냥 고맙다고 해.”
“아니, 굳이 안 해도 되는 고생을….”
“‘아니’ 한 번만 더 말하면 추방해 버려요!”
영인까지 나서서 내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나는 졌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어, 알겠다고. 고마우니까 다음부터는 하지….”
“아, 또!”
고생하지 말라고 해도 난리야. 나는 결국 말을 좀 바꾸고 나서야 드디어 가로막히지 않고 끝까지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그럼 같이 준비해.”
“그래 그러니까 낫다.”
가운데에 스토브까지 켜고 나니 그렇게 춥지도 않아서 나는 얌전히 두 녀석들이 또 뭘 준비했는지 잠자코 지켜보았다.
“자, 아아. 제1회 엔카운터 단독 송년회에 오신 여러분들 모두 환영합니다. 다들 이 자리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저와 영인이에게 감사의 박수 한 번 쳐 주시고요~.”
찔러서 절 받기식의 박수가 쏟아지자 규민이 자아도취에 빠진 얼굴로 웃으며 멘트를 이어 나갔다.
“각자 마시고 싶은 음료 챙겨서 마시면 되고 간식은 저기 있으니까 간단히 먹고 야식은 아래로 내려가면 데워 먹을 수 있는 걸로 준비해 놨어요. 너무 배 꽉꽉 채우지는 말고.”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하자고 이렇게 거창한 자리를 만들진 않았을 것 같은데.
또 뭘 하려고 그러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곧 영인이 작은 빔 프로젝터를 들고 와서 벽에다 대고 쐈다.
잘 정돈된 스크린 위에 쏘는 게 아니라서 화면이 좀 흐릿하긴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자 그러면~ 올해 초 겟 데뷔 방영 초기부터 지금까지, 엔카운터가 걸어온 길을 한번 쭉 감상하시겠습니다.”
그러고는 영상 하나를 재생하는데. 규민과 영인 그리고 그 외 각자 소속됐던 조에서 찍은 듯한 사진들이 겟 데뷔용 음원과 함께 영상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촬영 중에 스쳐 지나가듯 본 장면들도 있었으나 워낙에 인원도 많고 대규모의 프로젝트였다 보니 대체 이런 건 언제 찍은 거지? 싶은 장면들도 많았다.
그중 압권은 아마도 이규민이 제공한 듯한 화보 B컷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