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188화 (188/224)

#188. 굳이 그런 생각을 (2)

“먹기는 뭘 먹어.”

정확히는 밥 먹을 새도 없었다. 그대로 주방으로 직진해서 먹을 게 있나 뒤져 보니 어제 한가득 시켰던 배달 음식들이 모두 빈 통만 남기고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그 늦은 밤에 다 먹었냐….’

나는 쯧, 짧게 혀를 차고는 주섬주섬 집에 있는 인스턴트 라면 중 제일 칼로리가 낮은 것을 찾아 물을 올렸다.

“라면 먹을 사람?”

나중에 한 입만 하고 우르르 달려드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여러 개 끓이는 게 낫지.

나랑 제현호가 1개씩 먹으니까 다른 녀석들은 한 젓가락씩 줄 거 생각해서 세 개 끓이면 되려나.

일부러 냄비를 제일 큰 걸 찾아서 3인분을 끓이고 있으려니 방에 있던 다른 녀석들도 튀어나와 기웃거렸다.

“어 뭐야 누가 라면 끓여?”

“나, 나도 한 입만…!”

우글우글 몰려들어서는 무거운 이야기를 꺼낼 새도 없이 한바탕 소란이 휘몰아쳤다.

“계란 네 개만 넣는다. 대충 풀 테니까 알아서 가져가서 먹어.”

무슨 급식소 단체 조리도 아니고 우르르 달려들어서는 결국 1인분이 뭐야 0.5인분도 못 먹은 것 같지만.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의 우중충한 분위기를 이어 갈 것도 없이 정신없이 멤버들에게 휩쓸린 제현호의 표정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 정신없다. 진짜.”

옷을 실내복으로 갈아입을 겸 제현호와 함께 쓰는 방으로 들어오자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엄청 최악이라고 할 정도로 어색한 건 아니긴 한데. 슬쩍 현호의 짐이 있는 방향을 보자 담담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타이밍이 맞아서 정말 다행이다. 조금 더 일찍 출발했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이자 제현호가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형, 덕분에… 못 볼 줄 알았는데 만났, 으니까….”

그러고는 무슨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질질 끌고 한숨을 쉬더니 가까스로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내게 도움받은 게 얼만데 참으로 새삼스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됐어. 내가 신경 쓰여서 그랬던 거니까 의식 안 해도 돼.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도 없고.”

이쪽도 어쨌거나 미션 때문에 움직인 게 제일 크기도 했고. 물론 미션이 없었다고 그냥 뭐 알아서 하겠지 하고 내버려 둘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지만.

나도 덕분에 얻은 게 있는 입장이니 너무 대단한 은인 대접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현호의 감사 인사를 받아 낸 다음, 고개를 돌려 다시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미션 보상은….’

멤버들에게 휩쓸려서 한창 정신없다가 겨우 잠잠해지니 팟, 하고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서브 에피소드 미션(호감도) 클리어!]

[▷ 기다리던 그 사람]

[보상 수령]

[▷코인 1개]

[▷등장인물 ‘제현호’ 보유 스킬 수동 활성화 개방]

[서브 리퀘스트 미션 ▷ 불순한 동기]

[보상 수령]

[▷미수집 단서 1개]

[▷코인 2개]

우르르 쏟아진 팝업 메시지들을 정리하고 나서야 제현호의 스킬이 눈에 들어왔다.

[▷제현호(A)] (Clear)

[- 보유 스킬: 장화 신은 고양이]

[- 발동 시간: 5분]

[- 스킬 효과가 발휘되는 동안 상대방에게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켜 사용자의 의견에 동조하게 한다.]

[- 사용 코인: 1개]

뭐 이런 스킬이 다 있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른 사람 눈에 퍽 불쌍한 사람처럼 보여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따라오게 만든다는 것 같은데….

‘음….’

우리 중에 가정사로는 아무래도 제일 안쓰러운 녀석이니 아예 전혀 어울리지 않게 생뚱맞은 건 아닐지도.

그래도 제현호와 그 귀엽고 앙증맞은 이미지의 고양이라니 좀 안 어울리기는 했다.

놈은 잘생긴 거지 작고 귀여운 이미지랑은 좀 다른 계열이었으니까.

나중에 뭐든 밀어붙여야 하는 게 있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으니 스킬 자체는 마음에 드네.

머릿속으로 짧게 정리하는 사이 그다음으로 확인해야 할 것이 퍼뜩 눈앞에 어른거렸다.

‘맞다. 키워드 새로 받았지.’

지난 몇 주 동안 정말 토 나오도록 바빠서 단서를 어디서 캐야 할지 손도 못 대고 있었는데.

부디 좀 파고들어 갈 만한 힌트가 되는 단서가 나와 주었기를 바라며 추리 탭으로 들어갔다.

[수집된 단서]

[- 춤추는 대박 떡볶이]

[- 한지훈]

[- 199X년 12월 24일]

새로 추가된 키워드는 내가 태어난 해의 어느 날이었다.

‘12월 24일이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좀 이어서 파고들 만한 키워드를 달라고 했더니만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내 출생이랑 뭐가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과거의 신문 기사들을 백업해 두는 아카이빙 사이트에 들어가서 키워드로 제시된 날짜를 검색해 보았다.

‘별거 없는데…?’

별거 없는 정도가 아니라 대단한 기록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어디의 제과 기업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신제품을 출시한 기록 따위가 추리에 도움이 되는 단서일 리는 없으니까.

‘또 뭐 없나?’

답답한 마음에 또다시 막다른 길에 다다른 기분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으려니 제현호가 의아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형도 무슨 고민 있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 퍼뜩 대답했다.

“어? 아냐. 아까 좀 급하게 뛰어다니고 그랬더니 피곤한 것 같아서.”

그러자 제현호가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럼 먼저 씻으실래요? 지금 욕실 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일찍 씻고 한숨 주무시면 저녁 먹기 전에 깨워 드릴게요.”

자기 때문에 고생한 게 신경 쓰여서 그러나. 나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괜찮아. 방금 라면 먹었는데 바로 자면 얼굴 부어서 안 돼. 알아서 편히 쉬고 있을 테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러고는 주섬주섬 침대 위에서 베개를 세워 등받이 삼아 핸드폰을 들여다보자 더 권하지 않고 순순히 침묵이 찾아왔다.

‘그래서 이날이 진짜 뭔데?’

결국 각종 동영상 사이트며 이곳저곳을 상세하게 뒤진 끝에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 답답하네.’

잠깐 머리라도 식혀야지. 거실로 나가자 다들 본인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늘어져서 휴일을 보내고 있는 와중 이규민은 거실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

또 뭘 보고 앉아 있나 궁금해서 흘끔 화면을 들여다보니 연말이면 온갖 채널에서 틀어 대는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영화였다.

‘저놈의 크리스마스.’

우리도 무대 컨셉 중에 저거 비슷한 거 하나 있었지,

그때가 하필 방영일이 딱 크리스마스이브여서 메리 크리스마스 한 번을 외치지 않고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엔카운터로서 맞는 크리스마스도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 그냥 넘어가기 좀 힘든 것도 있었고.’

그 시즌 전후로 컴백했거나 활동 중인 아이돌의 연례행사이자 숙명 같은 거지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규민과 자리를 조금 띄워서 소파에 앉자 화면 속에서는 10대 여학생들이 열심히 준비한 크리스마스 공연이 한창이었다.

“웬일로 네가 거실에 다 나와 있냐.”

금발의 여자 주인공이 곧 화면을 가득 채우고 이규민이 또 헛소리를 했다.

“너 제인 테일러 좋아하냐?”

“뭔 헛소리야.”

워낙에 유명한 영화여서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만 영화가 거의 20년 전에 촬영된 만큼 40대가 된 지 오래인 배우였다.

“제인 테일러 보려고 앉았나 했지.”

“그냥 방에 있으려니 답답해서 나온 건데. 다시 들어가?”

“누가 언제 꺼지랬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발매했을 즈음에 유 대표나 비안도 이 나이대였겠지.

제인 테일러가 저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확실히 그냥 스캔들 정도가 아니라 연예계 전체가 난리 날 법한 대사건이었겠다 싶었다.

‘지금은 뭐 하고 살려나….’

문득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작년에 무슨 자녀의 입시 비리에 휘말려서 고소를 당했다는 얘기가 잔뜩이었다.

‘모르는 게 나을 뻔했군.’

같은 영화에 또래 친구로 출연했던 배우 중에는 여전히 현역 톱스타로 잘나가는 사람도 있으니 참 대조적이었다.

이거 찍을 당시에는 여주인공 역의 배우가 훨씬 더 인기도 많고 관심도 많이 받았을 텐데.

자식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서 팬들에게 받았던 애정과 관심을 배신하느니 독신으로 살면서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 나가는 쪽이 확실히 팬들에게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 대표가 나를 버린 것도 이해가 아예 안 되지는….’

까지 생각하고 나니 입안이 썼다. 그걸 버려진 내가 이해해 주는 것도 웃긴 일인데.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화면을 보자 어느새 영화 속에서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자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9X년이면… 그때 유 대표가 활동을 했던 시기던가?‘

퍼뜩 생각이 나서 연예 기사 면의 오래된 기록들을 뒤지자 밀키즈의 2집 앨범 발매일이 그해 11월 말이었다.

’그럼 그때 유 대표도 활동을 했던 건가?“

내 생일이 7월인데? 7월에 아이를 낳고 바로 그해 연말에 대중이 아이돌에게 요구하는 컨디션으로 바로 복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내 생일이 실제로는 7월이 아니라거나…?

평생 내 생일이라 받아들이고 살아왔던 날짜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웠다.

‘이건 비안 선배님한테 물어보면 바로 알 텐데.’

하지만 이 연말에 ‘안녕하세요 선배님, 죄송한데 혹시 이날 뭔가 특별한 일 같은 게 있으셨나요?’ 하고 대뜸 물어보는 것도 이상한 놈이잖아.

결국 나 스스로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날 요일이….’

다행히 일요일이었다. 그럼 그날이나 전날 음방 같은 게 분명 있었을 텐데,

각 방송사별로 그날 방영했던 옛날 예능 프로그램의 다시 보기를 공식 홈페이지에서 저화질이나마 제공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나는 지상파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

내가 영화를 보다 말고 갑자기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더니 뭘 찾느라 인상을 쓰는 것을 규민이 퍽 이상하게 보는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 여기 있다.’

20년 전의 자료들은 대부분 유실된 와중에 딱 M사 한 곳만 자료가 남아 있었다.

[199X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특집]

요약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아서 통째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약간 긴장한 채로 쭉 타이틀부터 10초씩 빨리 감기를 눌러 대며 20년 전쯤 활동하셨던 선배님들의 무대를 넘기려니 곧 기다리던 순서가 나왔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우리 곁에 찾아온 네 명의 아름다운 요정!]

아, 내 손. 내 발. 그 시절 특유의 과장된 내레이션과 함께 편집된 오프닝 영상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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