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할 필요는 없지만
잠시 후, 미팅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기운이 쭉 빠졌다.
어쨌거나 다들 말 많고 외향적인 건 다행이었다.
뭐라도 좀 해야 예능에 어울리는, 재밌는 장면이 나오지 죄 얌전한 사람들만 모여 있으면 방송용으로는 영 부적절할 테니까.
‘그래서 일부러 좀 시끄러운 사람들 위주로 섭외한 건가.’
갑자기 나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저렇게 소란스러운 편인가? 위기감이 느껴졌으나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어쨌든 3주, 그것도 매주 1박 2일 정도만 같이 지내는 거니까….’
겟 데뷔 찍을 때는 내가 정말 이 녀석까지 안고 가야 하는 건가 싶은 녀석이랑도 2주를 내리 붙어 있었는데 뭐.
하나같이 외향적이라 사회성도 충분해 보이고, 그 정도 스케줄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촬영이 시작되는 건 당장 다음 주부터. 촬영 장소는 지방의 작은 단독 주택이었다.
‘저희 농촌 체험 같은 거 하러 가는 건가요?’
설마 그 장 보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마트가 아니라 전통 시장 같은 데서 봐야 하는 건가?
잠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난이도가 올라간 게 아닌가 싶어 당황스러웠으나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아, 촬영 장소로 섭외할 만한 주택이 마땅치 않아서 지방으로 간 거지 거기도 개발은 꽤 되어 있는 곳이라 마트 있고 편의점에 있을 건 다 있어요.’
그렇다고 하니 일단 믿어 봐야겠지만. 이런 종류의 예능에서 말은 그렇게 해 놓고 사실은 거짓말이었습니다~ 하고 뒤늦게 고백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나는 미리 최악을 생각해 두었다. 화장실이 집 밖에 있어서 나가서 씻고 들어와야 하는 집을 예상하고 있으면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이 집도 연식이 오래돼서 그렇지 그렇게 나쁜 환경은 아닐지도.’
숙소로 돌아와 전경을 둘러보고 나서 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지원이 갸우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미팅 괜찮았어?”
얼굴에 피곤해 보이는 티가 그렇게 났나. 나는 아차 싶어서 입꼬리를 들어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응, 다들 적극적인 분들이라 촬영할 때 분량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오히려 다들 자기 비중 늘리려고 달려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일단 유튜버랑 인플루언서 둘은 자기 비즈니스 홍보하려는 목표도 있을 테니 확실히 적극적으로 나올 테고.
아이돌 선배도 마냥 소극적이거나 뒤로 빠지는 성격은 아니라서 나만 빼는 것처럼 보일 수는 없다! 전투적으로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아까 모델은 좀 조용한 타입이었나….’
슬쩍 SNS에 올려놓은 동영상들을 확인하니 죄 술자리에서 찍은 듯한 영상들뿐이었다.
‘얌전해 보이더니 제일 무서운 사람이었네.’
처음엔 같은 날 찍은 영상을 여러 개 올린 줄 알았는데. 입은 옷이나 동행인들, 뒷배경 등이 전부 달랐다.
장소도 고깃집, 횟집, 이자카야, 등등 아주 각양각색이었다.
‘그렇게 먹고도 체중을 유지하는 게 대단한데….’
영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앞에 놓여 있는 젓가락에는 손도 안 댄 듯 깨끗했다.
그런 타입 좀 있지. 술은 마셔도 안주는 절대 안 먹는 타입. 방송 중에까지 술을 마시려 하지는 않을 테니 아무래도 괜찮았다.
“나 먼저 씻어도 될까? 어차피 다들 9시 넘어서 씻을 테니까 시간은 안 겹칠 것 같긴 한데.”
얼른 들어가서 머리를 좀 쉬게 해 주고 싶은 생각에 우선 욕실로 들어가자 다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마찰도 분쟁도 없이 평화로운 숙소를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멤버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솟구쳤다.
이만하면 무난한 조합으로 모였다,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무난은 무슨 기적적으로 잘 모인 거지. 마음을 고쳐먹으며 씻고 잘 준비를 하자 느닷없이 시스템 창이 튀어나왔다.
‘또 뭘….’
나도 모르게 불평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서브 에피소드 미션 ▷ 오만과 편견]
[예상 수령 보상]
[▷미수집 단서 1개]
[▷코인 1개]
‘시켜 주시면 시키는 대로 해야죠, 암요.’
직전에 획득한 키워드가 아무튼 유 대표와 관련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다음을 어떻게 뻗어 나가야 할지 막막한 와중 가뭄에 단비 같은 미션이었다.
‘뭐… 연독률이 떨어지고 독자들이 하차해 버리면 자기네들도 곤란하다더니 그건 사실인가 보지.’
내가 내리 헤매는 모습만 보여 줘서 좋을 게 없을 테니.
짧은 심호흡과 함께 수락 버튼을 누르자 곧 구체적인 미션 내용이 나타났다.
[등장인물 ‘유역’의 호감도를 ★★까지 올릴 것.]
‘응?’
유역이 누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오늘 미팅에는 나오지 않았으나 조금 전 PD님의 입을 통해 들었던 이름이었다.
‘아까 들은 것 말고는 처음 듣는데.’
신인이거나 지금껏 단역만 맡아 왔나? 검색해 보니 출연 이력이 얼마 안 되는 신인이 맞았다.
‘데뷔 자체는 아역으로 일찍 했는데 큰 임팩트가 없어서 유명하진 않았구나.’
나름대로 아역 연예인의 정석 코스를 밟아 온 사람이었다. 어린이 광고 모델로 데뷔, 이후 영화나 드라마에 아역 단역으로 출연, 그러다 어린이 방송 채널에서 간단한 MC나 진행자 역을 맡고 활동하다가 완전히 배우로 전향.
현재는 고등학생 정도의 아역 배역을 맡거나 조금씩 성인 연기에도 도전하는 모양이었다.
‘성인 연기자로 발돋움하면서 홍보할 겸 나오는 건가 보네.’
이미 유명해서 이름만 들어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 만한 다른 출연진과 달리 아역에 정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솔직히 잘 모를 것 같지만.
‘기왕 미션도 받았으니까 나랑 좀 잘 맞는 타입이었으면 좋겠네.’
아무쪼록 성실한 사람은 싫어하지 않으니까. 나랑 성격적으로는 안 맞더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미워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도 어렸을 때부터 노력 또 노력에 내몰리며 살아왔던 타입이라서.
‘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오늘 미팅에서 만나고 온 인플루언서가 나를 팔로우했다는 안내 메시지가 떴다.
‘나도 맞팔해 줘야지.’
아직 촬영 전이라 공개적으로 나를 태그하거나 메시지를 보내진 않은 모양이나 나 말고 다른 출연진들도 팔로우 신청을 미리 해 둔 듯했다.
‘나도 이참에 해 두자.’
이미 맞팔 상태였던 아이돌 선배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과도 팔로우를 마치자 이어서 단톡방 초대 메시지가 날아왔다.
‘아주 속전속결….’
[쭈인] 안녕하세요! 오후 8:32
[쭈인] 아까 미팅 때 만났던 우주인이에요 오후 8:32
[쭈인] (이모티콘) 오후 8:32
우주복을 입은 다람쥐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이모티콘이 정말 딱 본인이 쓸 법하게 생긴 종류였다.
[쭈인] PD님한테 연락처 받아서 유역 씨도 초대했어요! 오후 8:33
[쭈인] (이모티콘) 오후 8:33
[뿅] 안녕하세요! (이모티콘) 오후 8:34
곧이어 다른 참가자들도 하나둘씩 인사를 하기에 나도 늦지 않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나] 안녕하세요. 오후 8:37
[나] 다들 잘 들어가셨을까요? 오늘 만나 뵈어서 즐거웠습니다. 오후 8:37
진짜 잘 들어갔는지 궁금했다기보다는 안부 인사였는데.
곧바로 모델 군이 지금 실시간인 듯 대학가에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즐기고 있는 사진을 보냈다.
[이워누] (사진) 오후 8:28
[이워누] ㅋㅋㅋㅋㅋ 오후 8:28
[이워누] 이따 ㅈ2ㅏ정 넘어서 들어갈 것 가1ㅌ아요 오후 8:29
[쭈인] 대박 거기죠? 그 곱창 맛있는 집 오후 8:29
[이워누] (사진) 오후 8:29
[쭈인] 와 윤기 미쳤다 오후 8:30
대체 뭘 어떻게 하면 키보드도 아니고 모바일로 타자를 치면서 오타가 저렇게 나는지 모르겠는데.
오늘도 열심히 젊음을 즐기고 있구나. 서로 시시콜콜하게 웃고 떠드는 건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흐린 눈으로 사진을 넘기며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한바탕 뭐 어디는 뭐가 맛있네, 저희도 한번 모이는 게 좋겠네 이야기가 나오다가 각자 좋은 저녁 보내라고 마무리가 되기까지. 시간이 거의 30분이 넘게 흘렀는데도 대화방에 초대된 유역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바빠서 메시지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럼 나중에라도 보겠지. 아까 보고 있었던 유역의 프로필을 훑어보던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단어를 찾아냈다.
[소속사: 연성 프로덕션]
‘어…?’
그러나 지난달에 최신 업데이트된 프로필에는 다른 회사가 기재되어 있을 것을 보니 지금은 다른 소속사로 이적한 듯했다.
‘어쨌거나 연성 소속으로 활동했던 거면 유 대표랑도 좀 인연이 있으려나.’
그래서 일부러 호감도를 높여 보라고 미션을 준 거였나. 시스템이 새삼 기특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잠시.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채팅을 읽었다는 읽음 완료 표시가 떴는데도 유역은 묵묵부답이었다.
‘일부러 씹는 건가?’
단톡방에서 자기랑 관련 없는 대화가 죽죽 올라갈 때 반응 안 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인사 정도는 해야….
‘나 설마 꼰대인 건가.’
평소 동생 라인의 멤버들에게 보수적이라고 비난받는 입장인지라 갑자기 뜨끔 찔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래도 인사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도 이렇게 분위기 맞추는 거 좋아하진 않거든.’
그러나 그날 내가 눈을 붙일 때까지도 유역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평범한 인물은 아닐 수도 있겠는데.’
불쑥 설마 유역이 외자 이름이고 유 대표랑 무슨 친인척 관계라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본명은 장유역으로 성씨를 떼고 이름만 예명으로 사용하는 듯했다.
‘어쨌든 실제로 만나 볼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
당분간은 비교적 스케줄이 느슨하긴 하지만 당장 두 달 후부터 시작될 월드 투어 기획이 한창이었기에 마냥 백수처럼 놀아도 되는 시기는 아니었다.
‘촬영 날 될 때까지 나는 나대로 내가 할 일을 해야지.’
멤버들과 다 같이 준비하는 것 말고도 내가 따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팬분들이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공개되려면 두 달은 더 남았으나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서 견디기 힘들었다.
‘내일 당장 연습실부터 가야지. 일단은 얼른 눈 좀 붙이고….’
그리고 일주일쯤 뒤. 가제 ‘집 밖은 위험해’의 촬영일 당일.
매니저와 함께 촬영용 합숙소에 도착한 나는 그 엄청난 비주얼에 그대로 압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