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193화 (193/224)

#193. 할 필요는 없지만 (3)

사람은 여섯 명인데 방은 셋. 그럼 대충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예상할 수 있었다.

‘거실에는 따로 잘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안 보여.’

정 나는 죽어도 다른 사람이랑 같은 방 못 쓰겠다 한다면 거실에 이불 깔고 자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예능까지 나와서 그렇게 행동하는 건 솔직히 아까 깜짝 카메라 했던 내용이랑 다를 게 없으니까.’

둘둘씩 어떻게 묶으려나. 미리 조를 짜 놨을 수도 있지만 일단 시스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용해야 했다.

‘어차피 친해져야 하는 상황이니까 기왕이면 유역이랑 같은 방이 되면 좋겠는데….’

얌전히 마지막 멤버가 모일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마당에서 인테리어를 마감하고 나온 듯한 각종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는 스태프였다.

‘할 것도 없고 손이나 좀 보태 드릴까….’

슥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당 쪽으로 향하자 그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팍팍 찌든 사회인의 자세였던 스태프분이 화들짝 놀라 기합이 든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헉,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엇, 아뇨. 그냥 앉아 있으려니 심심해서 도와드릴까 해서….”

너무 놀라니까 이쪽도 괜히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주섬주섬 폐비닐을 집어 부피를 줄이기 위해 밟으려 하자 스태프가 필사적으로 두 팔을 휘저어 나를 내쫓았다.

“아뇨아뇨아뇨, 괜찮아요! 얼마 남지도 않았고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까 제가 할게요. 편하게 앉아 계세요!”

“혼자서 하시기에는 양이 좀 많은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세요!”

물론 출연진이 몸 쓰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냉큼 와 좋아요~ 할 관계자는 없겠다 싶긴 하다만.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거절할 필요가 있나? 나도 이제는 현장을 그렇게까지 얼마 안 와 본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부자연스럽게 거절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냥 스태프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느 정도로 반응하는 게 나은지 선을 잘 모르시는 걸 수도 있고….’

그리 중요한 건 아니긴 한데 반응이 너무 격렬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빈손으로 다시 털레털레 숙소 안으로 들어오자 잠깐 자리를 비웠던 먼저 온 출연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저희 이제 유역 씨만 남아서 마지막으로 대본 점검하고 있었거든요.”

그거 기어이 정말 마지막 출연자까지 하는 거냐. 분량을 그렇게까지 뽑아야 하나. 썩 내키는 방향은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요리뿅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인수 씨 바람잡이 역할 잘하실 수 있으시죠? 뮤비 보니까 연기 잘하시던데.”

“악. 아니 잘하는 건 아니에요.”

“뭘 잘하더만. 하여간 겸손은. 겸손도 지나치면 얄밉거든요.”

애초에 뮤직비디오에 연기라고 할 만한 게 들어가던가. 표정 연기도 연기이긴 하지만 그건 뭐랄까… 연기력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제때 필요한 얼굴을 보여 줄 줄 아는 컨트롤 능력에 가깝지 않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내게 주어진 역할은 참으로 하찮기 짝이 없었다.

내가 당했던 대본이랑 비슷한 듯 달랐다. 나는 한 명이 일방적으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것에 다른 한 명이 황당한 제안을 대안이랍시고 내미는 내용이었는데.

이번에는 두 참가자가 서로 주목받는 역할을 하겠다고 싸우는 컨셉이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역할이군.’

처음엔 가벼운 트집 잡기와 말싸움으로 시작했던 다툼이 슬슬 몸싸움으로 이어지려 하자 그걸 말리기 위해 끼어들었다가 영화 속에나 나오는 할리우드 액션처럼 쓰러져서 상황을 심각하게 만드는 배역이었다.

‘연기라고 해 봐야 그냥 고개 숙이고 코피 난 척하는 게 다잖아.’

그렇게 호들갑 떨고 띄워 줄 것도 없다만. 자칫하면 이걸로 유역과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음….’

그도 그럴 것이 유역이라는 인물에 대해 사전에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필모그래피라고 할 만한 것도 한 줌 수준인데다가 예능 출연은 몇 년 전에 여행 예능에 꼽사리처럼 끼어서 출연한 게 전부였다.

‘그거라도 좀 보면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원래 배우들은 이미지 소모를 막기 위해서 일부러 신비주의를 택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일부러 다른 출연진들이 챙겨 주느라 말을 거는 장면이 스치듯 지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행인 수준의 존재감이었다.

‘오히려 스태프가 더 화면에 자주 잡히는 것 같은데.’

그 짧게나마 비칠 때의 인상은 평범한 내향적인 대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말수 적고 시키는 것 외에는 나서는 법 없는.

먼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지만 뭘 시키면 뒤로 빼거나 못 한다고 하진 않았다.

그거 말고는 성격을 파악할 만한 방법이 없어서 오리무중이었다.

‘이런 타입이랑은 뭘 어떻게 친해져야 하냐….’

지금까지 나름대로 관리자 포지션으로 활동했던 입장에서 내향적인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은 간단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억지로 친해지겠답시고 이것저것 캐묻고 친한 척하면 더 멀어지는 타입들이니.

그냥 싫어하는 거 강요 안 하고 해야 하는데 선뜻 나서질 못해서 버벅이고 있는 거 구제해 주듯 몇 번 물어 와서(?) 도와주면 가까워져 있던데.

이번에도 같은 방식을 기대해 보기에는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거기다 같이 있는 시간은 대부분 촬영 중일 거고.’

가뜩이나 외향인이 이렇게 많아 보이는 곳에서 별 하나 이상 채우는 게 가능하긴 할까? 나도 모르게 걱정이 앞선 그때 스태프가 신호를 보냈다.

“얼른 부세트장으로 이동 부탁드릴게요! 유역 씨 매니저님한테서 연락 왔는데 한 10분쯤 도착 예정이시래요.”

“넵, 알겠습니다~!”

다른 출연자들의 쾌활한 OK 사인과 함께 조금 전 으슬으슬한 분위기의 폐가로 향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보고 꽤 놀라겠지.’

이런 곳이 촬영장이라곤 믿기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내 배역이 그리 비중이 큰 것도 아니고 대단한 연기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긴장하지 말고 그냥 보통 정도로만 하자. 속으로 마음을 다지고 내가 나설 차례를 기다렸다.

“안녕, 하세요….”

곧 매니저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유역이 황폐하기 그지없는 내부에 놀라 움찔거리기도 잠시.

다른 출연자들이 태연하게 바닥에 주저앉은 채 유역을 맞아들였다.

“안녕하세요, 유역 씨! 저희 미팅 때 못 봬서 서운했었는데 오늘 이렇게 뵙네요!”

“와, 유역 씨다!”

메인 연기자인 두 비연예인 출연자를 보고 있자니 정말 누가 연예인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이 정도면 이 두 사람이 배우로 데뷔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아무래도 자기 스스로 나서서 본인을 PR 하는 특성이 강한 직종이라서 그런가.

요리뿅과 인플루언서에게 붙들린 유역은 무슨 길에서 사이비 전도사를 만난 행인 같았다.

“아, 네.”

다만 그 행인이 말수가 매우 적은 편이랄까.

“저는 요리뿅이고요, 이쪽은 춤신 님이세요. 아, 이렇게 세 분은 누구신지 아시죠?”

요리뿅이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으로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준 그때. 슬슬 인플루언서가 갈등의 시작을 알렸다.

“아, 춤신 말고 그냥 상연이라고 하라니까요.”

“그럼 다들 뭐 어떻게 알아봐요. 춤신 님이 춤신 님이지. 저라고 뭐 좋아서 맨날 안녕하세요!! 요리뿅입니다!!! 하겠어요?”

“그럼 요리뿅 님도 본명으로 불러 달라고 하세요. 저는 제 채널에서 라방 할 때도 이제 본명으로 더 많이 불러요.”

갑자기 험악해져 가는 분위기에 그 사이에 낀 유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여기선 일단 시선을 외면하라고 했으니까….’

스윽,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자 옆에 앉아 있던 아이돌 선배의 어깨가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거, 티 내지 말라니까.’

그리고 그러는 사이 요리뿅과 춤신의 언성은 점점 더 높아져 갔다.

“아니 그런 식으로 할 거면 개인 방송이나 계속하지 여기는 왜 나온 거예요?”

“와 지금 그게 요리뿅 님이 저한테 하실 말씀이에요? 나 되게 억울해지네?”

여기서부터 내가 끼어들 타이밍이었다.

“두 분 다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은데 잠깐 따로 진정 좀 하시고….”

그러자 미리 정해둔 대로 춤신이 휙, 나를 뿌리치기 위해 내 쪽으로 팔꿈치를 휘둘렀다.

“아, 좀 놓고 말씀하시라고요. 누가 보면 내가 사람 팬 줄 알겠네?”

“악!”

실제로는 부딪힐 뻔한 것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척 내 인생 최대한의 순발력을 발휘하려 벽 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헉….”

“어, 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척 그대로 바닥을 향해 웅크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심각해진 걸 느꼈는지 유역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19 불러야 하나? 저희가 임의로 차에 태워서 병원 가도 되는 거예요?”

스태프들이 하나둘 웅성거리며 진짜 응급 사태라도 벌어진 듯 어딘가에 연락을 취하는 척한 그때.

털썩.

“응?”

무언가 풀썩 힘이 빠져서 쓰러지는 소리에 다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헉, 어떡해.”

“……?”

“엥?”

이 짓궂은 장난의 주인공. 유역이 게거품을 물며 낡아 빠진 시멘트 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

“어????”

그 후로 15분 정도는 내가 지금껏 현장에서 겪어 본 것 중 최악의 아수라장이 이어졌다.

***

“아 진짜 어떡해. 죄송해요. 정말로 그렇게까지 놀라실 줄은 몰랐어요.”

잠시 후. 선 채로 기절하는 바람에 쓰러졌던 유역은 거의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곧바로 실제 상황이 아니라 멤버별 반응을 보기 위한 설정극이었다는 사실을 밝히자 유역은 덤덤한 표정으로 안도했다.

‘어쨌든 성격이 모난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잠깐이긴 하지만 기절할 정도로 멘탈이 약하단 말야?

다들 위가 아파서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고 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말로만 그렇게 하는 거지 정말 쓰러지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오늘 컨디션이 너무 안 좋으면 들어가서 내일 다시 합류해도 된다고 했으나 유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어쩐다… 본촬영을 위해 잠깐 대기 시간을 거치는 사이 나는 우선 뭘 해야 할지부터 정했다.

‘얼른 사과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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