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모든 일에는 이유가 (3)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을 때는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원래 촬영하다 보면 날 넘어가는 게 부지기수긴 한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이미지 생각하면서 계속 부대껴서 그런가. 멤버들과 같이 있을 때에 비해 두 배로 피곤했다.
‘게다가 혹을 하나 달고 챙겨 주고 있으려니 더….’
슬쩍 유역이 걸터앉은 침대 쪽을 바라보자 관찰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건 말건 멀뚱멀뚱 자기 자리에 앉아서 멍을 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 대표가 방출할 만하네….’
예능 출연이 거의 필수적이다시피 한 아이돌에 비해 배우는 작품으로만 활동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화면 안에서 대본에 따라 활동하기만 하면 되는 배우가 확실히 천직일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불을 끌어 올려 덮자 곧 촬영 종료를 알리는 슬레이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이 방 저 방에서 오늘을 마무리하는 인사가 흘러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나 또한 복도에 있을 스태프를 향해 감사 인사를 하자 깜빡깜빡 불이 들어오던 관찰 카메라의 전원이 완전히 꺼졌다.
‘이제 좀 편히 쉴 수 있겠네.’
카메라가 안 돌아간다고 부적절한 행동을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녹화되고 있는 이상 풀어질 수가 없으니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
그리고 다시 기나긴 침묵이 찾아왔다. 쟤한테도 잘 자라고 인사해 주는 게 좋으려나.
숙소에 있을 때는 정말 웬만큼 피곤해서 죽겠다 싶은 상태가 아닐 때는 서로 인사 정도는 하고 자는 게 국룰이었다.
이 녀석은 나랑 앞으로 계속 치대고 지낼 사이도 아니고… 괜히 어색해질 수 있으니 나대지 말자, 싶었으나….
‘그래도 오늘 내가 이것저것 시키는 거 따라온다고 고생했는데 너무 무신경한 것도 좀 그래.’
결국 신경이 쓰여서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오늘 너도 고생 많았어. 푹 쉬어.”
대답이 돌아오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말했으니까 된 거다, 하고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 올린 그때. 인사를 하고 직후도 아니고 애매하게 한 5분에서 10분쯤 지난 후에 유역의 침대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 혹시 주무세요?”
잠이 올락말락 하던 참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거의 다 왔던 잠이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아니 좀… 말을 걸 거면 일찍 걸지.’
타이밍하고는. 나는 속으로 가볍게 불평하고는 대답했다.
“아니. 아직. 무슨 일인데?”
주섬주섬 벽 쪽으로 돌렸던 몸을 정자세로 되돌리며 입을 열기 무섭게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헉, 아니, 저, 무슨 일은 아니긴 한데. 그게, 그러니까 제가 원래 말이 진짜 너무 많거든요. 친구들이 좀 너는 그만 말하라고 입만 열면 깬다고 너무 뭐라고 해 가지고 소속사에서도 되도록이면 말은 하지 말라고 코멘트 해 주실 정도라서 저도 문제라는 건 알고 있긴 한데 아무튼, 예능에 나온 이상 저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니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뭔데 이거. 무슨 옛날 개그 프로그램에 나왔던 속사포로 말하기 대회 같은 컨셉도 아니고.
느닷없이 터진 유역의 말문에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네?”
“어 그러니까… 제가 막 일부러 무시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요. 카메라 돌아갈 때는 절대 두 마디 이상 하지 말라고 하도 혼나 가지고….”
그러니까 찬찬히 요약하자면 캐릭터가 너무 깬다 싶을 정도로 말이 너무 많아서 회사에서 말을 하지 말라고 어드바이스를 해 줬다는 것 같은데.
나는 휴식 모드에 들어가 있던 뇌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 물었다.
“잠깐만. 그럼 계속 말없이 멀뚱멀뚱 있던 게 본인 성격이 아니라 컨셉이었어?”
그러자 유역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네! 아니 저 진짜 아까 오징어땡 먹어 보라고 하셨을 때도 한입 먹어보자마자 와 이거 미쳤다 돌았다 이거 완전 댕미친놈이네 입에 넣고 소멸시켜 주마 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될지 순간 브레이크가 걸려 가지고….”
아니 사람이 말이 이 정도로 많으면 좀 브레이크가 걸려도 돼요. 나는 표정이 질색으로 물드는 것을 막지 못한 채 유역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좀 조용히 좀 해 봐.”
그러자 익숙한 일인 듯 합, 유역이 제 양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나는 어이없는 광경을 지켜보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유역이 입을 막은 채 손을 번쩍 들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대체 얼마나 많았으면 저런 제스처가 몸에 익어 있는 거냐.
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어… 그러니까… 귀찮으실 텐데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저 아까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으면 분명 한 소리 들었을 거라서… 저도 그래서 원래는 예능은 잘 안 나오고 싶었는데 이번에 계약한 작품이 홍보 차원에서 젊고 소통 활발한 이미지를 원한다고 하셔서 정말 어쩔 수 없이….”
아니 이렇게 줄줄 본인 내부 사정 같은 거 얘기 안 해 줘도 된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가라앉혔다.
“알겠으니까 더 말 안 해도 돼. 나도 내 분량 챙길 겸 나선 거니까 너무 신경 안 써도 되고. 내 입장에서도 손해 볼 거 없어서 도와준 거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이야.”
그러자 다시금 자기가 말할 턴이 돌아와서 기쁘다는 듯 유역이 두 눈을 빛냈다.
“아! 네네, 부담스럽지는 않고요! 그냥 넘 감사해서… 헤헤… 마침 조금 전에 카메라 꺼졌으니까 감사 인사 정도는 꼭 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아무래도 개인 활동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다들 복작복작하게 공동생활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계속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형이랑 같은 방 쓰게 돼서….”
이거 또 안 끊으면 끝도 없이 말하겠네. 나는 흐린 눈으로 유역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만! 알아들었으니까 거기까지만.”
그걸 또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산뜻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주 가관이었다.
“네!”
어우 귀청이야. 빨리 더 말을 붙이지 못하도록 자는 척해야지. 나는 재빨리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나 이제 정말 자야 하니까 조용히 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러고는 풀썩 이불을 뒤집어쓰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걸로 된 건가…?’
슬쩍 시스템 창을 켜서 호감도를 확인해 보니 어느새 별 하나가 차 있었다.
이번 주 촬영이 끝나는 건 내일 오후 7시쯤. 아, 날이 넘어갔으니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지. 그럼 어제처럼 틈틈이 챙겨 주고 소외되거나 너무 뒤처지지 않도록 도와주면 쉽게 2개 달성할 수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미션을 가볍게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유역은 첫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로 계속해서 튀는 행동을 반복했다.
거기에 악의가 없는 건 어쨌든 보이긴 해서 그걸 도와주는 나와 함께 세트로 묶이며 서로 윈윈 관계처럼 잘 연출해 나갔다.
처음에는 유역의 태도에 당황했던 나머지 출연진들도 둘째 날 오후쯤 되니 유역의 캐릭터에 완벽하게 적응.
촬영을 마칠 때가 되니 서로 컨셉을 위해 말을 놓는 게 아니라 그런대로 편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 거 보면 확실히 나이 차이 크게 안 나는 게 영향이 크긴 해.’
겟 데뷔 촬영할 때는 나이 차이가 적게는 두세 살, 많이 나면 거의 띠동갑 가까이 나는 사이끼리 한 조가 돼서 무대 올리는 당일까지 조원끼리 서먹서먹한 경우가 많았다.
지금처럼 즐기는 모습을 보여 주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내가 올라가야 하는 서바이벌이라 더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이 차이가 끽해야 3살이 최대인 또래들인 탓에 나중에는 학기 초에 수련회라도 온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을지도.’
각자 일하는 분야가 다르다 보니 서로를 무시하거나 혹은 기 싸움을 벌이는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퍽 평화로웠다.
오히려 각각 직업군이 달라서 더 그냥 평범한 20대 초반 대학생들을 모아 둔 느낌이었다.
“아 근데 진짜 재밌었어. 방송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나도. 나 휴학한 이후로 친구들이랑 잘 못 만나서 이렇게 MT 느낌 나는 활동 진짜 오랜만이거든.”
“다음 주에 올 때 저 게임기 가져와도 되나요? 촬영 끝나고 놀 때 같이하면 재밌는 거 같은데….”
이게 친구들 모임인지 아니면 방송 촬영인지.
구분이 애매한 마무리가 끝나고 각자 흩어질 시간.
매니저가 오기를 기다리며 정원 안쪽에서 대기 중인 그때. 마지막 활동이 끝나고 멀찍이 벽 쪽으로 숨어서 붙어 있었던 유역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 혹시….”
여기서도 또 어제 방 안에서처럼 일장 연설을 늘어놓지는 않겠지. 나도 모르게 긴장한 순간 유역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따로 연락해도 되나요? 아, 전화는 부담스러우실 테니까 전화 말고 톡이나 문자로요!”
그래 내가 너랑 친해져야 하는 입장인데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니. 나는 짧은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너 편한 대로 해.”
“네!!!”
내 대답을 듣고는 신나서 자기를 데리러 온 매니저에게 달려가는 걸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면 거의 별 네 개 수준으로 친해진 거 아냐?’
왜냐면 오늘도 내내 저놈 챙겨 주느라 신경 쓴 것이 무색하게 별 하나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어떻게 더 해야 두 개까지 채워지는데?’
별 다섯 개를 찍은 현호도 나한테 저 정도로 치대진 않는단 말이다. 못마땅하기 그지없었으나 항의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예능 촬영 자체는… 재밌었으니까….’
처음 느꼈던 가벼운 이미지와 달리 요리뿅도, 춤신도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나름대로 진중한 면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사람을 첫인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겨서일까, 귀가하는 걸음이 그리 무겁지 않았다.
“나 왔어~.”
그리고 다시 엔카운터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조금 전 같은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했던 감상을 날름 철회했다.
“오, 아빠 왔다~.”
“아빠다~.”
“치킨은? 난 다리만 먹는데.”
“뭔 헛소리야.”
어이가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뒷걸음질을 치자 규민이 슥, 문을 더 활짝 열어 거실 전경을 보여 주었다.
“촬영 끝나고 아직 밥 안 먹었지? 애들이랑 얘기해서 너 복귀하는 시간 맞춰서 치킨 시켜 뒀는데 늦지 않게 잘 왔네.”
규민이 가리키는 방향을 슬쩍 바라보자 식탁 위에 놓인 치킨이 보였다.
“너 오븐 베이크 아니면 안 먹으니까 일부러 오븐 구이로 시켜 뒀어. 혼자 촬영한다고 고생했다.”
“어… 그, 그래.”
꽤 고맙기도 하고, 조금은 감동이기까지 한 귀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