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년 차 천재 연습생의 데뷔 공략-203화 (203/224)

#203. 한 발자국 더 (3)

여름에는 워터 파크, 겨울에는 스파. 각 계절을 책임지는 대표 여행지나 다름없었다. 워터 파크는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불볕더위와 싸우며 여기저기서 튀는 물줄기로 체온을 식히면 그만이지만 겨울은 또 얘기가 달랐다.

‘여기 노천탕도 있는 것 같던데.’

춥고. 축축하고, 수증기는 뜨거운 애매한 곳에서 어중간하게 일했다가는 몸살만 걸려 오기 십상이었다.

‘근무 환경만 더 열악해진 거 아냐?’

걱정하기도 잠시 준비해 온 카메라가 세팅되자마자 본격적으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오늘 엔카운터 분들께서 수고해 주실 파트는 총 네 곳이고요. 각각 2인 1조로 투입돼서 활약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나은가. 안도하기도 전에 드르륵, 브리핑을 맡은 담당자분이 스크롤을 끌어 내려 PPT를 화면에 띄웠다.

“우선 저희 제원 리조트는 제주도 해안 심층수를 사용하는 해수 사우나로 제주도 청정 자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물 성분 좋은 건 저도 알겠어요. 그래서 저희가 뭘 하면 되는 거죠?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설명을 기다리자 곧 우리가 배치될 파트로 추정되는 슬라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희 리조트에서 손님들께 제공하는 즐길 거리는 크게 네 파트고요, 최고급 객실 서비스, 해수 스파 파크, 최정상급 셰프님들을 모신 다이닝 서비스, 제주도 유명 기념품 샵을 모아 둔 쇼핑 센터 이렇게 네 가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네 곳이 바로 우리가 일할 곳이라는 말이지.

그리고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해수 파크만 아니면 된다!’

객실 정비라고 해 봐야 청소니까 땀 좀 빼고 몸을 움직여서 고생하면 될 거고. 다이닝 쪽은 음식 만드는 건 전문적인 기술도 필요한 영역이니 서버나 잔심부름 정도만 시킬 것 같은데.

기념품 샵에서도 판촉 알바나 포장 정도를 시키지 대단한 노동을 요구할 것 같진 않았다.

“해수 파크 하면 인수가 진짜 제대로 일할 것 같은데.”

“시끄러워.”

규민이 옆에서 장난스럽게 고사를 지내기에 일침을 날려 주며 눈앞의 PPT를 지그시 바라봤다.

‘솔직히 해수 파크만 강도가 너무 남다르잖아.’

같은 청소라고 해도 설비가 잔뜩 들어서 있고 물이 허벅지 위까지 찰랑거리는 욕조 안을 치우는 것이 물기 없는 평지를 청소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해수 파크 같은 건 부디 영인이나 하연처럼 체력적으로 자신 있는 녀석들을 배치해 줬기를.

간절히 기원한 내 소망이 통한 것일까.

“자 그럼 오늘 어디서 일하게 되실지 배치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파크 파트]

박하연

해수 파크 파트에 박하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파크 파트]

박하연, 서인수

그 옆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이름이 내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

나도 모르게 절망의 감탄사를 내뱉은 순간 미팅 룸 전체가 흔들릴 만큼 격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하 진짜 심장 떨렸네.”

“파이팅~!”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다들 나와 하연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고 가는 것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뭐… 제일 고생하는 데 막내나 은찬처럼 불안불안한 일원이 배치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마음은 편한가.

이후로 다른 파트도 공개되었지만 그리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몰 파트]

이규민, 표영인

[다이닝 파트]

정은찬, 주혜성

[룸 파트]

유지원, 제현호

몰 파트는 시끄럽고 입담 좋은 녀석들로 채워 둔 것 같고, 룸 파트도 주혜성이 붙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지원이 룸 파트로 간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파크로 배치된 것보다는 낫지.’

나는 마침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고는 안내 직원을 따라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파크 자체는 그렇게 규모가 크진 않았다. 실내는 전문 사우나 정도의 크기고 실외는 적당한 길이의 유수 노천 풀이 있고 그 가운데 수영장 규모의 해수 풀이 있었다.

그리고 해수 풀에서 유수 노천 풀로 이어지는 꽤 높고 거대한 워터 슬라이드가 위용을 자랑했다.

‘오….’

속으로 감탄하고 있으려니 직원이 웃으면서 우리에게 유니폼을 건네주었다.

“날이 많이 추우니까 방한복 꼭 챙겨 입으시고요. 안에 온수 팩이 있어서 그렇게 춥지 않으실 거예요. 물이 좀 튀긴 하지만 온수이기도 하고 앞에 난방 장치도 있으니 몸 녹이면서 하시면 되고요.”

우리가 배치된 곳은 바로 그 워터 슬라이드였다. 음…. 어째 키즈 카페에서의 악몽이 다시 재생되는 것 같은데.

2차로 위기감을 느끼기도 전에 저 멀리서부터 땅이 울리는 것 같은 진동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응…?”

나도 하연도 그쪽을 바라본 순간. 엄청난 인파의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우리, 정확히는 슬라이드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오늘은 인근 초등학교에서 3, 4학년 단체 견학을 와서 조금 정신없으실 거예요.”

그러니까 저기 보이는 우리 가슴 좀 아래까지 올라오는 키의 어린이 떼가… 그냥 몇십 명 정도가 아니라 백 명 단위라는 건가요? 질문조차도 나오지 않아 꽉 막힌 입을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했다.

“자자, 우리 친구들 한 줄로 쭉 서 볼까요? 바닥이 미끄러워서 다칠 수 있으니까 뛰면 안 돼요!”

능숙해 보이는 전담 직원을 뒤로하고 잠시 멀뚱히 굳어 있던 우리는 재빨리 안내 자리로 뛰어 들어갔다.

“이쪽으로 한 명씩 올라와 주세요!”

“와아아!”

“대박!”

“TV에서 보던 형이다!”

“사인해 주세요!”

미안해 애들아, 형이 지금 펜도 없고 종이도 없고, 무엇보다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

“헐, 사진 찍어야 되는데!”

“진짜 엔카운터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얼른 타고 싶은데….”

우리에게 정신이 팔려서 워터 슬라이드는 안중에도 없어진 아이부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고 벌써부터 불평인 아이까지 혼이 나갈 것만 같았다.

“자, 사인은 나중에 해 줄 테니까 일단 차례차례 계단으로 올라와 주세요!”

일단 빨리 아래로 내려보내 버리자. 한 명 한 명, 교육받은 대로 있는 힘껏 튜브를 밀어 아래로 보내니 조금 전의 불평은 어디 가고 잔뜩 신이 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하하하, 완전 재밌어!”

“한 번 더 탈래,”

역시 일단 태워 주고 나면 불만이 사그라드는군. 안전 규정을 위해 정해진 대기 시간을 채우되 최대한 부지런히 로스되는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쪽으로 올라와 주세요!”

처음에는 당황한 듯 내 지시를 어정쩡하게 따라 하기만 했던 하연도 20분쯤 지나니 어느새 익숙해져서 공중에 흩뿌려지는 시간이 착착 줄어들었다.

“다음 친구 대기해 주세요!”

“나 선생님 친구 아닌데!”

“아닌데~!”

가끔 초등학생 특유의 말꼬리 잡아 놀리기가 발동되었으나 잠시 후 15미터 아래로 밀어 버리는 순간 모든 작고 소중한 원한이 사그라들었다.

“꺄아아아악!”

어쩌면 나 이거 적성에 맞는 것일지도.

오전을 그렇게 불태우고 나니 곧 식사 시간이 되었다.

“생각보다 점심시간이 이른 편이네요?”

다른 파트 사람들은 12시나 12시 반이나 되어야 점심시간인 것 같던데.

오늘만큼은 적당히 먹었다가는 제정신으로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꽤 든든하게 배식을 받아 자리에 앉자 주위에는 전부 파크 파트 직원들밖에 없었다.

“저희가 일이 제일 힘드니까요. 먹는 거라도 잘해 줘야죠.”

준비한 식사가 그렇게 양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제일 마지막에 먹는 파트는 다른 파트 직원들이 제일 맛있는 곳만 골라 먹은 뷔페와 마주하게 된다나.

그리 큰 위로는 되지 않았으나 다행히 직원 밥은 기대한 것보다 맛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먹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원래도 적게 먹는 편은 아니긴 했지만. 하연의 배식판은 누가 보면 전문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너 그거 다 먹을 수 있어?”

내가 결국 조심스럽게 묻자 하연이 그런 걸 왜 묻냐는 듯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걸 다 못 먹어요? 전 항상 이렇게 먹고 싶은데.”

그게 원래 먹고 싶은 양인데 평소에 관리해야 하니 자제하는 거구나. 나는 약간 흐린 눈으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먹을 수 있으면 됐고.”

먹은 만큼 알아서 움직일 테니 괜찮겠지. 식사를 마치고 다시 원래 일하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으려 한 그때.

“아, 잠깐만요. 아까 갈아입은 유니폼은 세탁함에 넣어 주시고요. 지금 입은 실내복 차림으로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직원을 따라가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광활한 내부의 건식 사우나였다.

“아까 슬라이드에서 고생해 주셨으니까 오후부터는 여기서 정리를 담당해 주시면 됩니다.”

“……!”

하연과 나 모두 두 눈이 번뜩였다.

이제 좀 편하게 일할 수 있으려나, 기대한 것이 무색하게 물 지옥 다음 나타난 건 불지옥이었다.

‘아니 워터 슬라이드에서 고생했으니 오후는 여기로 넣어 준 거라고 말이나 하지 말지.’

주룩주룩 흐르는 땀에 벌써 식혜와 얼음물을 몇 잔째 들이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들 수건과 베개는 또 뭘 그렇게 여기저기 사방팔방 흩어 놓고 주무신 건지.

수면실을 치워도 치워도 뒤돌아서면 제자리였다.

‘아까 제육 한 움큼 더 먹을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

잠시 후. 오전 2시간, 오후 4시간.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하고 총 6시간 동안 이어진 노동을 마치고 홀에 다시 모이니 각 파트별로 노동의 흔적이 선명했다.

“아, 나 진짜 쇼 호스트로 전직할까 봐.”

“솔직히 오늘 저희가 진짜 매상 찢었다니까요.”

여전히 에너지가 남아 있는 규민과 영인은 얼굴만 보면 모르겠지만 말을 얼마나 많이 한 건지 목소리 끝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

음식 냄새만 맡아도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이 없는 건 은찬과 혜성이었고,

“힘들긴 하지만 보람찼어!”

“……”

지원과 현호는 보호용으로 붙였는지 손목에 테이핑이 감겨 있었다.

그리고 나와 하연은….

“근데 너네는 왠지 얼굴에 윤기가 더 좔좔 흐르는 것 같다. 우리 몰래 뭐 했어?”

나는 슬쩍 하연과 눈을 맞추고는 시선을 피했다.

“뭐 우리야 계속 몸 움직이고 땀 흘렸으니까 그렇지. 너네도 운동해, 그럼 피부 좋아져.”

적당히 둘러댔지만 진실은 따로 있었다. 어차피 편집본이 공개되면 다 알게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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