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모를 줄 알았나 (1)
‘왜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요즘 1020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브랜드라서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를 텐데.
젊은 세대나 좋아하는 브랜드의 장식이 왜 뜬금없이 여기 떨어져 있는지 희한했다.
‘영인이 말고 다른 연습생들도 여기로 불러냈었나?’
무심코 손안의 장식을 들여다보던 그때. 차가 주차되어 있는 방향에서 가볍게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인이 대체 언제 돌아올 생각이냐고 눈치라도 주는 듯했다. 알았어, 간다고, 가.
나는 지퍼 손잡이로 추정되는 장식을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조수석으로 돌아왔다.
“뭘 그렇게 봤어요?”
영인이 대수롭지 않게 묻기에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방금 집어 온 물건을 보여 주었다.
“엥?”
이게 뭐냐는 듯 영인의 입에서 엉뚱한 의문형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연못 앞에서 주웠는데. 왜 이렇게 어디서 본 것 같은지 모르겠네.”
그러자 영인이 한참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다가 기어를 바꿔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저거 요즘 패피들 사이에서 조금씩 뜨는 브랜드 아니에요? 저희 백업 댄서 크루분들 중에서도 입은 분들 좀 있으시던데. 그 파란색 저지에 무늬 있는 트레이닝복 있잖아요. 현권이 형이 입은 블루종도 거기 거고요.”
영인의 말대로 주변에 패션과 트렌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여럿인 직종인 탓에 흔한 브랜드는 아니라도 눈에 익은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남은 찝찝함은 이게 왜 연못 앞에 떨어져 있었느냐인데….
‘연못 앞에서 무슨 사고라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극단적인 음모론인가.’
이 브랜드가 생긴 지 2년이 채 안 됐으니 이 장식이 거기서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었던 기간도 역시 길지 않았을 터다. 서천향은 몰라도 이 장식의 주인은 어쨌거나 골든링 미디어와 관련된 일로 사옥을 방문했다는 뜻일 텐데.
“…….”
내가 한참을 뭔가 생각하는 얼굴로 골똘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영인이 걱정이라도 한 건지 느닷없이 물었다.
“형 요즘 뭐 걱정 있어요?”
“뭐?”
내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냔 얼굴로 영인을 바라보자 영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갑자기 골든링이랑 미팅 좀 하면 안 되냐 하는 것도 그렇고. 요즘 좀 생각이 다른 데에 가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아서요.”
예리한 지적에 나는 놀란 기색을 숨기며 거짓말을 했다.
“그런 거 아냐. 어쨌든 이제 계약 기간 만료까지 반년쯤 남았으니까 너나 나나 소속사 찾느라 머리 아파야 할 시기인 건 같잖아. 다른 녀석들 입장에서는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는 우리가 부러울 수도 있으니 티 내기도 좀 그렇고 숨겨야 하니까….”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적당히 중언부언하고 있으려니 영인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아니면 다행이긴 한데요. 형은 생각이 너무 많으니까 좀 덜어 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전에도 이 얘기 하지 않았어요?”
했다. 아마 겟 데뷔 촬영 중이었을 때였나.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을 안 하면 이렇게 다 같이 노력해서 이뤄 낸 것들이 전부 꿈으로 돌아가 버리는데도,
나는 말할 수 없는 진심은 삼킨 채 영인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어으 피곤하다.”
다른 멤버들에게는 영인과 서울에서 좀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맛집에 다녀온 걸로 말을 맞췄기 때문에 맨손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적당히 숙소 근처 빵집에 들러 불만을 잠재울 간식거리를 사 가야 했다.
양손 가득 빵 봉지를 들고 거실로 들어서자 웬일인지 다들 거실 TV 앞에 모여 있었다.
“아 미치겠다, 저게 멀리서 보면 저런 느낌이었구나.”
“…….”
“와 아니 근데 진짜 내가 직접 할 때는 너무 길었는데 한 분 한 분은 되게 짧게 지나가 버리네. 아쉽다.”
뭘 보는 거지? 영인과 시간 단위로 밀린 렌터카를 주차 위치에 되돌려 놓고 숙소로 올라오니 다들 우리에게는 관심도 없고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정신이 없었다.
“우리 왔어. 뭘 그렇게 다들 뚫어져라 봐?”
내가 거실 안으로 들어서며 묻자 규민이 화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어, 이제 너 나온다!”
내가 나온다고?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보자 아래에는 깔끔한 프레임의 자막이 붙은 채로 겟 데뷔 팬 사인회 당시의 녹화 편집본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음?”
이건 또 언제 받은 거야? 벌써 반년 가까이 지난 영상을 대체 왜 이제야 보여 주는 건지. 눈을 의심하며 규민을 바라보자 규민이 마저 설명해 주었다.
“이거 이번에 투어 DVD 판매하는 거에 우리 데뷔 비하인드 영상 같은 걸로 같이 나갈 거래.”
“아~.”
그런 이유에서였군. 뭐 회사 입장에서는 컨텐츠로 판매할 수 있는 건 뭐든 끌어다가 분량을 채우고 싶을 테니까.
그리고 팬들 입장에서도 자신이 단편적으로 경험한 이벤트나, 참여하고 싶었지만 아쉽게 추첨제라 가지 못한 이벤트의 비하인드를 궁금해하실 테니 일석이조나 다름없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지? 시기로 따지만 그렇게 옛날은 아닌데.”
혜성의 소소한 감상과 함께 화면이 다음 멤버로 넘어간 순간.
“악!”
계속 초조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고 있던 은찬이 비명을 질렀다.
“왜요? 왜?”
갑작스러운 괴성에 다들 은찬 쪽을 바라보자 은찬이 고개를 획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자리를 피하기에 화면에 대체 뭐가 나왔나 했더니만.
“아, 대박. 근데 진짜 귀여운데요? 저거 지금도 숙소에 있는 거 아니에요?”
화면 속 은찬이 놀랍게도 꽤나 덤덤한 표정으로 앙증맞은 애교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날 정신이 없어서 다들 멀쩡히 잘하는 것만 보고, 커뮤나 SNS에 올라온 유명한 후기 정도만 보고 말았는데.’
은찬도 정말 많이 노력했구나. 아마도 팬들이 직접 가져와서 씌워 준 듯한 동물 모자를 쓰고 덤덤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고 있는 게 본인의 최선을 다한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 옆에 하연이 하필 너무 천연인 듯 팬 서비스 장인이라 더 부담이 되었을지도.’
간만에 겟 데뷔 시절 촬영본을 보니 풋풋하기도 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막상 그때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기도 하고 압박감도 느껴져서 힘들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마음만큼은 편하니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조금도 낙관적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아이돌로서 성공적으로 데뷔를 마쳤고 활동도 하고 있으니까.
마침내 30분짜리 팬 미팅 비하인드 영상이 끝나고 화면이 검은색으로 물들자 나는 규민에게 물었다.
“이거 말고 다른 건 또 없어?”
규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잠깐만. 아까 매니저 형이 단톡방에 몇 개 올려 주셨는데. 근데 이게 겟 데뷔 비하인드라기보다는 우리들 데뷔 비하인드 같은 편집이라서 아무래도 데뷔 조 쟁탈전 전에는 다른 연습생들 비중도 커서 거의 안 넣은 것 같더라고.”
그러고는 짤막하게 인트로에 삽입할 용도로 만든 것 같은 영상을 찾아 보여 주었다.
“다른 건 이건데? 근데 이건 엄청 짧아.”
규민이 이야기한 대로 50초짜리 편집본이어서 말 그대로 멤버들이 단독으로 나온 화면을 부분부분 잘라서 이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뒤에 얼쩡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탈락한 연습생들인가.’
홀린 듯 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불쑥 얼굴이 나오진 않았지만 뒤로 스쳐 지나가는 낯익은 옷차림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잠깐만.”
저 옷, 왜 이렇게 익숙하지? 싶어서 규민에게 화면을 멈추도록 하고 사복으로 보이는 옷차림의 디테일을 훑었다.
앞쪽으로 지퍼가 윤곽을 드러내며 자리 잡은 청재킷이었다. 지퍼를 잠그지 않아 벌어진 옷깃 아래로 달랑달랑 눈에 익은 형태의 장식이 흔들렸다.
‘잠깐만 저거….’
나는 순간 놀라 주머니에 넣고 왔던 장식을 꺼내 대조해 보았다. 로고가 꽤나 특이하게 생긴 덕에 초점이 다른 데 맞춰져 있어 블러 칠을 한 것처럼 흐리게 보이는데도 같은 장식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
내 요청으로 느닷없이 화면을 멈춘 규민이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더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장식을 보고 말했다.
“뭐냐?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어?”
나는 규민의 시선에 내 손으로 향해 있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주먹을 쥐어 장식을 감췄으나,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그거 임희록이 입은 옷 장식 아니야?”
그 순간 왜 저 옷차림이 갑자기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이상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뭔데요? 어? 그거 아까 형이 연못 앞에서 주운….”
영인이 슥 다가와 화면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내가 말하지 말라는 듯 눈을 맞추고 재빨리 고개를 가로젓자 입을 다물었다.
“엥? 연못이라니 뭔 소리야? 너네 오늘 어디 갔다 온 건데?”
규민이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눈을 빛내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 대화를 종결시켰다.
“있어. 밥 먹고 앞에 저수지 공원 크게 있길래 둘러보다 온 거야. 얘 한국어 가끔 헷갈리잖아. 연못이나 저수지나.”
“네? 언제는 저 한국말 너무 잘해서 그냥 한국인 같다면서요.”
느닷없이 튄 불똥에 영인이 억울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리 잘됐다.
나는 영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이 기회에 한국어 자격증에 도전해 보는 게 어떠냐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뭐야, 갑자기?”
규민이 계속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고 붙잡고 늘어졌으나 잠시 후 지원이 치킨 먹고 싶다는 얘기를 한 덕분에 모두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장된 화제가 되었다.
‘아니 설마…. 우연이겠지.’
겨우 방으로 돌아와서 이불 속으로 파고든 나는 곧장 임희록이 편집되지 않고 방영된 영상을 찾아보았다.
논란 때문에 하차한 연습생인 탓에 다시 보기 서비스에 올라와 있는 버전에서는 통째로 사라진 바람에 팬들이 실시간으로 올린 덕질용 편집본에만 파편처럼 남아 있었다.
‘장식 자체는 이 디자인에 붙어 있는 게 맞긴 한 거 같은데….’
기성품인 이상 이 장식이 임희록의 옷에서 떨어진 것이라 100% 확신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담 임희록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가.
연못 아래에 묻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